이 노무현 대통령 서거 특별판을 발간한 데 대해 한때 노무현 대통령을 모셨던 참모로서, 최근까지 공동연구를 해온 동지로서 감사 말씀을 드린다. 그러나 사실관계 오류와 공감할 수 없는 내용에 또 한 번 슬픔에 잠겨야 했다. 사실관계 오류는 쪽에서 바로잡기로 했으므로 왜 이러한 오류가 발생하게 되었는지 분석해본다.
진보 언론의 존재 이유는 수구 언론과 다른 시각에서 독자에게 정치 분석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특별판의 분석은 그러한 기준에 미흡했다고 생각된다.
특별판 기사는 왜 사실관계에서 오류를 범하게 되었을까? 무엇이 기자들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일까? 조·중·동 프레임 때문이다. 기자들은 이념에 상관없이 조·중·동 프레임에 갇힌 교수들로부터 학습하고 있다. 조·중·동 프레임의 핵심은 ‘반노무현’과 ‘제왕적 대통령 프레임’이다. 이 둘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기득권층에 도전한 노무현을 죽이기 위해 만든 것이 ‘반노 프레임’이라면, 오랫동안 독재문화를 경험한 한국민의 정서를 이용해 노무현이 왜 잘못됐는지를 설득하는 데 동원되는 것이 ‘제왕적 대통령 프레임’이다.
보수는 영웅주의적 시각에 갇혀 있으므로 제왕적 대통령 프레임을 쓰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진보는 개인보다는 구조적 모순에 천착하거나 연구 대상과 직접적 소통을 통해 문제의 원인을 진단하는 해석주의적 시각을 사용한다. 필자는 한 번도 진보 언론으로부터 참여정부의 정무나 홍보에 대해 인터뷰를 받아본 적이 없다. 우리의 목소리는 기사 어디에도 반영되지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제왕적 대통령이기를 포기했다. 권력을 제자리에 돌려놓은 노 대통령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이었다. 하지만 국회에서 만든 법에 대해서도 언론은 노무현 탓을 했고, 여론에 떠밀려 하지 못한 정책도,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 공고화로의 과도기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도 노무현 탓을 했다. 제왕적 대통령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대통령을 낡은 프레임으로 단죄했기에 노 대통령은 진보 언론에서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없었다. 진보 지식인들의 노무현 비판이 과학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 프레임을 사용해 분석한 특별판도 대통령 서거의 책임마저도 노무현에게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의 선의를 믿는다. 하지만 어떤 선의로 시작했건 반노 프레임으로 기사를 쓰는 한, 결론은 그렇게 흐르게 돼 있다.
기자는 “노 전 대통령이 도덕적 기준을 한껏 높여놨기 때문에 스스로 도덕주의의 덫에 걸린 측면이 있다”고 썼다. 심지어는 “도덕주의적 담론은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까지 인용했다. 선진 민주국가치고 정치인의 도덕성을 요구하지 않는 나라는 없다. 투명한 정치에서는 정치인이 도덕적이지 않으면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21세기 정보화 시대를 맞아 세상이 더욱 투명해지면서 도덕적 지도자, 진정한 리더십이 서구 학계에서 폭발적 관심을 끄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오바마 미 대통령도 진정한 리더십으로 성공했고, 위대한 리더는 모두 도덕성으로 승부한 사람들이다.
과거보다 더 부패했느냐, 덜 부패했느냐 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 많은 이들이 부패는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도자의 의지에 따라 같은 조건하에서도 부패를 줄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왜 중요하지 않은가. 완벽하게 부패를 없애지 못하는 한, 과거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는 패배주의적 시각이야말로 얼마나 위험한가.
공이 과보다 큰 정치인은 우리가 지켜야노 대통령은 지도자 개인의 도덕성만으로 부패를 없애려고 노력하지는 않았다. 측근들을 감옥에 보내면서까지 책임정치와 참여정치를 통해 민주주의를 완성하려 했고, 시스템을 통해 부패 문제를 해소하려 했다. 검찰 개혁을 위해 공직자비리수사처를 신설하려고 그렇게 외쳤건만 결국은 국회의 비협조로 성사되지 못했다.
정당의 강화를 위해 선거제도 개혁을 시도했고 이를 위해 대연정을 제안했건만, 본질은 사라지고 대연정에 대한 비난만이 난무했다. 대연정을 비난한 교수가 정당 개혁을 말할 자격이 있는가. 노 대통령은 왜 대연정 제안을 하게 되었을까, 참모를 인터뷰하는 기자를 보지 못했다. 그것이 왜 잘못인지에 대한 원인 분석은 없고 오로지 노무현이 주장했기 때문에 대연정은 나쁜 것이 되었다.
도덕성은 정치인의 생명이며 국민에게서 얻는 신뢰의 원천이다. 그것은 정치인이면 누구에게나 요구되는 덕목이므로 이를 앞세운 노 대통령에게 문제가 있다는 진단은 이해하기 어렵다. 노 대통령이 도덕성의 덫에 걸린 것이 아니라, 시민으로 돌아간 ‘시민 노무현’조차도 관용하지 못한 현 정권의 치졸한 정치보복과 이를 방관하고 검찰의 여론몰이에 협조한 언론이 그를 절망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버려야 할 것은 도덕정치가 아니라 도덕적인 사람에게는 티끌만 발견돼도 버리자고 외친 진보 진영의 콤플렉스다. 수구 세력은 서로 공범 의식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흠집이 있는 사람도 감싸주고 재활용한다. 진보 진영은 도덕적 순결주의에 빠져 모 아니면 도의 결론을 내린다. 경직된 이분법적 사고의 결과다.
인간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종합적 접근이 필요하다. 공과 과를 비교해서 공이 과보다 큰 정치인은 우리가 지켜야 한다. 남의 오류 한두 개로 전부를 버리자고 외치면 자신은 더 완벽해 보이는가. 성숙한 사회는 변별력이 높은 사회다. 흑백뿐만 아니라 약간의 채도 차이도 구분해낼 줄 아는 변별력을 갖춘 언론과 시민집단이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위해 꼭 필요하다.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는 추모 행렬에 감성적인 면이 전혀 없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이를 ‘욱 민주주의’로 폄훼해서는 안 된다. 이는 역사의 진보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진단일 뿐이다. 어느 나라에나 ‘욱 민주주의’는 존재한다. 인간은 이성뿐만 아니라 감정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혁명이나 폭동의 주기 연구에서 그 나라에서 며칠 장을 치르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다. 대부분 장례식을 계기로 민심이 폭발하고 역사적 진보를 이루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성적 불만이 많이 쌓여도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감정적 촉발이 이뤄지지 않으면 혁명이나 시위는 성공할 수 없다. 따라서 감정적 기폭제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이것이 언제 터질지 이론적으로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역사는 항상 예기치 못한 우연에서 이뤄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기폭제가 있다고 해서 항상 민심이 폭발하는 것은 아니다. 즉, 가스가 차 있어야 불씨를 만날 때 폭발한다. 2008년 촛불집회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협상이 촉매제 구실을 한 것이 좋은 예이다. 그것이 백만 촛불로 이어졌던 것은 그 이전에 축적된 현 정권에 대한 불만이 구조적으로 이미 턱밑까지 차 있었기 때문이다. 현 정권에 대한 비판 의식은 노무현 정부에서의 학습 결과라고 생각된다.
왜 ‘욱 민주주의’처럼 보이는가기자는 노 대통령의 언론과의 싸움을 무모한 도전이라고 했지만 필자는 미래를 위한 투자였다고 본다. 꼭 이기는 싸움만 해야 한다면 김구는 독립운동도 하지 말았어야 한다. 노 대통령은 당신이 지금 이기는 싸움보다는, 장기적으로 국민이 이기는 싸움을 원했다. 그는 옳았다. 참여정부 기간 자연스럽게 민주주의를 학습한 시민들이 촛불에서 조·중·동을 타도하고 한겨레·경향을 살리는 운동에 동참했다. 그러나 진보 언론은 노무현 정부는 신자유주의 정부이며, 촛불은 신자유주의 반대집회라고 해석했다. 현장 서베이 결과에 따르면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욱 민주주의’가 폭발하는 시기는 예측할 수 없지만, 구조적 조건에 대한 연구는 체계적으로 가능하므로 예측도 가능하다. 그런 측면에서 열린우리당의 압승이 ‘욱 민주주의’의 결과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필자는 2003년 9월, 문화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곧 신당이 창당될 수밖에 없고, 2004년 총선에서 신당의 과반수 압승도 가능하다고 예견한 바 있다. 참고로 2004년 총선 전, 의 인터뷰에서 정치학자와 전문가 19명은 한나라당의 제1당 내지 과반수 승리를 예측했다. 정치현상에 대한 설명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증명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예측에서 판가름 난다. 대부분의 학자가 틀렸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열린우리당의 압승이 ‘욱 민주주의’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 왜 현상적으로 몇몇 정치현상이 ‘욱 민주주의’처럼 보이는가? 소통의 어려움 때문이다. 소통도 권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언론 권력을 가지지 못한 소수의 깨어 있는 시민이 다수를 움직이려면 커다란 정치적 사건이나 충격, 쉬운 쟁점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러한 쟁점이 존재할 때에만 이성과 감정이 만나 결합되면서 민심이 폭발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점진적인 시민혁명을 겪는 중이다. 그 시민세력의 중심에 노무현 사상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로 그에 대한 재평가가 빨라진 것은 사실이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이뤄질 일이었다.
따라서 노무현의 자산을 버리고 진보 진영이 새 출발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큰 착각이라고 본다. 노무현의 지지자는 자발적 정치 참여를 실천해본, 깨어 있는 시민들이다. 수구 언론의 프레임에서 자유로운, 정치의식이 높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소수일지 몰라도 다수를 움직일 수 있는 오피니언 리더들이다. 이들의 힘이 강한 것은 자잘한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오직 노무현의 신념과 가치로 뭉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현 정권이 노무현 죽이기를 통해 노무현의 사람들을 거세하려 한 것이 영악한 전략이었는지 몰라도, 그들을 너무 쉽게 버린 진보 진영은 악의는 없었는지 몰라도 어리석었다.
반성·자책 뒤따라야 진정성 인정받을 것문재인 변호사 인터뷰 내용처럼 피의자의 반론권은 검찰 소환 전에 보장했어야 한다. 노 대통령의 서거와 함께 뒤늦은 감은 있지만 와 의 방향 전환에 감사드린다. 그러나 그에 상응하는 반성과 자책이 뒤따라야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시민들은 한길로 묵묵히 가는 사람을 원한다. 언론도 그렇다. 시류에 편승해 소신을 바꾸는 정치인이나 논조를 바꾸는 언론이나 뭐가 다른가. 와 이 이번 사건에서 수구 언론과 정도의 차이조차 없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정도의 차이를 구분하는 변별력이야말로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와 이 진보 고유의 프레임으로 신문을 만드는 진정한 진보 언론으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그래야 진보 언론이 제기하는 이명박 정부와 검찰의 책임론이 힘을 받고, 독자로부터도 신뢰를 얻게 될 것이다.
조기숙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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