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우 변호사: 이런 나쁜 선례에 저희들이 일조할 수는 없습니다. 퇴정하겠습니다.
권영국 변호사: 재판부 결정에 유감을 표합니다. 퇴정하겠습니다.
5월6일 오전 11시35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417호 형사대법정에서는 용산 참사 사건과 관련해 기소된 피고인들의 유무죄를 가리기 위한 공판이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속개됐다. 생존권과 주거권 그리고 저항권이라는 21세기 초 한국 사회의 화두와 관련해 한 획을 그을 이 재판에서는 그러나 사실관계 인정과 법리 적용을 놓고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지 않았다. 되레 재판장과 검찰, 변호인 사이에 치열한 신경전만 펼쳐졌다. 무엇 때문에? 시곗바늘을 공판이 시작된 오전 10시로 되돌려보자.
법정 앞에는 이번 공판의 성격을 알리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피고인은 9명에게는 특수공무집행방해 혐의 혹은 그 뒤에 ‘다치게 하거나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뜻의 ‘치상’ ‘치사’ 등이 덧붙은 혐의를 받고 있다. 특수공무집행방해치사의 경우 최고형은 무기징역이다.
재판부가 입장한 뒤 시작된 공판에서 변호인단은 공판기일을 미뤄달라고 재판부에 요구했다. 지난 4월14일 재판부가 “검사는 신청인의 별지 기재 서류(검찰의 수사 기록)에 대한 열람·등사를 허용해야 한다”고 결정했음에도 검찰이 이를 따르지 않은 데 대한 문제제기였다. 변호인들은 이에 앞서 김석기 당시 서울경찰청장, 백동산 용산경찰서장 등 경찰 간부들을 비롯해 경찰특공대원, 참사가 난 용산 4구역 철거용역회사 직원 등의 진술서와 진술조서를 공개토록 검찰에 요구했다가 거부당했다. 그러면 담당 재판부가 검찰에 이를 공개하도록 결정해달라고 신청했고 법원은 이를 받아들여 공개 결정을 내렸지만, 검찰은 그 뒤에도 ‘사건 관계인의 명예나 사생활의 비밀, 생명·신체의 안전, 생활의 평온을 현저히 해할 우려가 있고 법령상 타인에게 제공 또는 누설 등이 금지된 정보·자료 또는 수사 방법상의 기밀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며 끝내 공개를 거부한 것이다.
변호인 쪽은 검찰이 9명을 기소하면서 수사 과정에서 작성한 전체 기록 1만여 쪽 가운데 3분의 1에 해당하는 3천여 쪽을 공개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번 사건의 핵심 쟁점인, 1월20일 참사 당시 경찰의 공무 집행이 정당했는지, 그리고 화재 발생 지점은 어디인지를 가리려면 검찰의 나머지 수사 기록이 공개돼야 한다는 게 변호인들의 생각이다.
따라서 변호인들은 검찰이 재판부의 결정에 따라 나머지 수사 기록을 공개할 때까지는 공판을 진행할 수 없다고 했다. 이대로는 피고인의 자기방어권과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그리고 변호인의 변론권이 보장될 수 없기 때문이다. 형사소송법은 재판의 두 당사자인 검사와 피고인이 서로 평등한 지위에서 대등하게 공격과 방어의 수단과 기회를 부여받아야 한다는 ‘당사자 대등주의’를 천명하고 있다. 이를 실현하려면 균등한 정보력을 바탕으로 재판이 시작돼야 한다는 게 변호인단의 시각이다.
변호인단은 그동안 검찰의 수사 기록 공개 거부가 계속되자 이날 공판에 앞서 이미 두 차례나 공판기일 변경을 신청하고, 법원 명령에 불복하는 검찰의 수사 기록을 압수해달라고까지 재판부에 요청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변호인들이 이런 신청을 할 자격이 없다며 기각했다. 재판부는 다만 검찰이 공개하지 않은 수사 기록과 여기에 등장하는 증인들을 나중에 검찰 쪽 증거나 증인으로 신청하더라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선에서 ‘제재’를 가했다.(상자 기사 참조)
변호인들이 검찰의 수사 기록 공개를 이토록 중시하는 이유는 뭘까? 미공개 수사 기록 안에는 검찰의 기소 내용을 일방적으로 뒷받침하는 증거와는 배치되는 증언, 피고인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증언들이 다수 포함돼 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재판부가 미공개 수사 기록을 증거로 채택하지 않겠다고 나오면서 검찰이 최근 하는 수 없이 추가로 공개한 참고인 진술조서 등을 보면 변호인들의 판단이 무리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추가로 공개된 수사 기록을 보면, 우선 사건 전날인 1월19일 용산 남일당 건물 시위대의 저항 정도가 도심 테러에 준하는 상황이라서 특공대 투입이 불가피했다는 경찰의 설명을 뒤집는 진술이 나온다. 현장에 투입된 신아무개 경찰특공대원은 ‘19일 오후에도 농성자들은 화염병이나 벽돌 등을 투척했느냐’는 검찰의 질문에 “농성자들은 화염병이나 벽돌 등을 의도적으로 도로 쪽으로 던지진 않았다. 도로 쪽으로 던진 것은 다음날 새벽 작전을 개시하기 전에 보았다. 19일 오후 헬기를 이용해 정찰할 당시 돌이나 화염병을 투척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고 답했다. 또 다른 특공대원 김아무개씨는 진압이 신중하지 못했음을 암시하는 발언도 했다. 그는 “중간에 작전이 변경된 것도 그랬고, 진압작전 과정에서도 특공대장님이 재촉하는 무전을 하는 것 자체도 좀 신중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처음 계획했던 대로 진압작전이 진행됐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위대가 궁지에 몰리기 전에 진압이 끝났으면 이런 일까지는 없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특공대원과 화재 진압에 동원된 소방관 등이 망루에 어느 정도의 인화 물질이 쌓여 있는지 모른 채 투입돼 경찰이 안전관리에 소홀했던 것으로 판단되는 진술도 있다. 석아무개 경찰특공대원은 ‘당시 강당에서나 제대별 회의 때 시위 현장(옥상 또는 망루)에 수십 통의 시너나 등유 등 인화·발화성 물질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냐’는 검찰의 질문에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강당에서 브리핑을 할 때나 제대별 회의 때 시너통 같은 것이 많으니 화염병 이상의 화재에도 대비하라는 교육을 받지 못했냐’는 물음에도 “그런 얘기는 듣지 못했다. 화염병에 대비해 소화기를 준비하라고 했을 뿐이다”라고 진술했다. 역시 현장에 출동한 소방관 노아무개씨도 인화 물질의 정확한 양을 사전에 알았는지에 대해 “(경찰이 보낸) 협조 공문을 받은 것이 19일 오후 9시53분경인데 그 공문에 나와 있는 것 이외에는 정확한 시너의 양에 대해 전달받지 못했고 그 이후에 당직관 이○○가 용산서 담당자와 구체적으로 협의할 당시에도 시너가 정확하게 얼마나 있는지 말을 안 했기 때문에 우리도 그러면 펌프차로도 가능하겠다고 생각을 하고 출동 계획을 수립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퇴정한 변호인, 재판부 기피 신청 검토변호인 쪽은 검찰의 미공개 사건 기록이 전부 공개되면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본다. 권영국 변호사는 “(수사 기록 공개를 거부하는 것은) 사실관계 자체를 다른 방향으로 몰고 가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며 “우리는 검찰이 형사사건의 증거를 은닉하는 범죄 행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변호인들은 검찰의 수사 기록 공개 거부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는 한편, 5월15일 열리는 4차 공판 때까지 재판부가 수사 기록 압수·공개 등 변호인들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재판부 기피 신청 등 최후 수단을 동원하기로 했다. 검찰의 막무가내 비공개 결정에 끌려가는 재판부도 문제가 있다는 게 변호인들의 생각이다. 또 해당 검사들을 직권남용, 직무유기, 증거은닉, 공무집행방해 등의 혐의로 12일 서울지검에 고소·고발하는 한편, 검찰이 검사들을 처벌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검찰이 사건 기록을 제출하도록 강제하기 위한 특별검사제 도입을 추진할 방침이다.
용산 참사에서 숨진 이상림씨의 아들이자 현재 피고인 신분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이충연씨의 형인 이성연씨는 이날 재판이 끝난 뒤 “문제를 빨리 해결할 방법이 재판인데, 공정하게 진행되지 않아 갑갑하다”며 “지금 반의 반쪽짜리 재판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특수공무집행방해 혐의를 받고 있는 김아무개씨의 부인 권영옥씨도 “결과가 정해져 있는 것 같아 재판에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용산 사건 피고인들이 구속된 지도 이미 100여 일째. 검찰은 법원의 수사 기록 공개 명령을 따르지 않고 법원은 이를 강제하지 않으면서 용산 재판은 파행을 거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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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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