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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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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가 인문학에 빠진 날

‘쓸데없는 책’으로 앎에 목마른 갈증을 푸는 시간, 서울대 ‘미래지도자 인문학 과정’
등록 2009-04-21 15:16 수정 2020-05-03 04:25

37살에 대기업 부장이 된 친구는 1억원 연봉계약을 마친 날 자랑스레 저녁을 샀다. 서울 강남의 집은 나날이 가격이 오르고 있었고, 맏딸은 전국 단위 영어경시대회에서 메달을 땄다고 했다. 입가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단둘이 앉은 3차의 호프집에서, 그는 축축한 눈으로 이렇게 물었다. “근데, 산다는 게 뭐냐? 내가 왜 사는지를 모르겠다. 돈을 위해서? 딸을 위해서?” 말을 마친 그는 급하게 취해갔다.

현직 판사도, 병원장도

지난 4월15일 저녁 서울대 신양학술정보관에서 기업인 등 미래지도자 인문학 과정 수강생들이 교수의 강의에 열중하고 있다.

지난 4월15일 저녁 서울대 신양학술정보관에서 기업인 등 미래지도자 인문학 과정 수강생들이 교수의 강의에 열중하고 있다.

왜 살까?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한 자각으로 시작되는 학문이 철학이다. 죽음을 넘어, 삶을 더 풍부하게 만들고 싶은 욕망의 총합이 인문학이다. 후마니타스(Humanitas). ‘잘 먹고 잘 살자’가 아닌 ‘제대로 살자’는 학문. 부동산과 국가대항전에 올인하는 이 땅에서는 낯선 이름이었다. 이른바 ‘7080 세대’에게는 더욱. 중·고등학교 시절 그들은 그런 책들은 ‘쓸데없는 책’이라고 들으며 자랐다. 교사와 부모로부터. 대학 시절 그들은 책을 쥘 기회가 없었다. 신음하는 민주주의와 끌려가는 학우들 때문에. 직장에 들어간 이후는 더 시간이 없었다. 이어지는 야근과 폭음 때문에.

이제 그들의 삶이 바뀌고 있다. 4월15일 저녁 6시30분. 서울대 법대 옆 연못 자하연을 지나 신양학술정보관 3층에 들어선다. 다른 강의가 끝날 시간에 강의실은 열린다. 서울대 인문대학의 미래지도자 인문학 과정. 올해 첫 기수를 뽑았다. 42명의 수강생들. 대부분 중견기업의 대표이사(CEO)이거나 대기업·중견기업의 임원·간부들이다. 현직 판사도 있고, 병원장도 있다. 미래를 만들어갈 40대 중견들이 제대로 된 ‘인문학 만찬’을 즐길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 강의 개설의 목표였다고 한다. 저녁 6시30분부터 시작된 수업은 3시간 동안 이어진다.

이날의 강의 주제는 몽골 최고의 정복자 쿠빌라이와 대청제국 최고의 통치자 홍타이지. 청강을 하던 기자는 최대의 제국을 이룬 두 정복자의 이름을 보고 잠시 의심해본다. 인문학으로 위장한 처세학 강의는 아닌지. 수없이 많은 경영·처세학 서적에서 본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순간 겹치고 지나갔다. 오해는 커리큘럼 일람으로 풀렸다. 이 과정의 첫 강의는 이상의 시 ‘오감도’를 디지털의 시각에서 해석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당나라 시대의 시성(詩聖) 두보와 고려조 의 이규보가 다녀갔고, 서양문학을 대표하는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가 등장했다. 여기에 미셸 푸코의 현학과 러시아 쉬프레마티슴(절대주의)의 창시자 말레비치의 추상이 더해졌다. 6개월 동안 동양 인물 18인과 서양 인물 18인의 삶과 역사를 되짚어보게 된다.

‘쿠빌라이’편 강의는 김호동 동양사학과 교수가 맡았다. 대륙의 동쪽 끝 고려로부터 중동으로는 아라비아반도, 아프리카로는 이집트, 유럽으로는 폴란드와 독일의 중반까지 뻗어나갔던 세계 최대의 제국 몽골. 100만 명 남짓한 인구로, 구대륙의 3분의 1에 육박하는 영토를 정복한 정복왕. 수강생들은 강의를 통해 대제국의 원천은 ‘몽골적인 가치’를 강요하지 않은 다양성이 그 근간임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동북아와 유럽, 아프리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쟁을 치러낼 수 있었던 기마병의 엄청난 기동력에 놀란다. 역사상의 어떠한 제국도 여러 전선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할 수는 없었다. 로마제국도 아프리카에서 전선을 형성할 때면 라인강변에 굳은 방벽을 쌓고 게르만과는 조용히 지내는 식이었다. 주요 지역 2곳에서 동시에 분쟁이 벌어져도 미군이 한꺼번에 개입할 수 있도록 군사전략을 바꿨던 조지 부시의 미국에도 ‘동시 개입’은 버거운 과제였다.

“술과 골프, 부동산 이야기를 바꾸고 싶었다”

강의 뒤의 질문 시간. “몽골의 거대한 대제국이 지금처럼 몰락한 걸 보면 결국 기마민족의 기동성도 농경민족의 지구력 앞에 무릎 꿇은 것 같은데, 의견이 어떠십니까?” 빙긋이 웃던 교수가 살짝 긴장한 표정이다. “몽골제국도 결국 기마병의 기동력이 중국에서 개발된 화약과 유럽에서 개량된 총포의 위력 앞에 무력해지는 시기를 맞습니다. 결국 핵심 경쟁력을 잃은 몽골제국은 순식간에 무너진 거죠.” 또 다른 질문이 이어진다. “원나라는 몽골족이 세운 나라이고 청나라는 여진족이 세운 나라인데, 지금의 중국인들이 그들의 역사도 자신들의 역사로 봅니까?” 교수의 답.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강역 아래 일어났던 모든 세력의 역사는 모두 중국사라고 생각합니다. 몽골과 만주족은 모두 형제고 같은 민족이라는 거죠.” 한반도사와 중국사, 세계사를 넘나드는 질문과 대답은 길게 이어진다.

밤 10시를 훌쩍 넘긴 강의가 끝난 뒤, 교수와 수강생들은 후문 앞의 한 맥주전문점에 둘러앉았다. 이제는 수강생들에게 질문할 시간이다. ‘왜 인문학인가’를 묻는 질문에 전근용 세종원 대표이사는 “갈증이 있었다”고 말했다. 전 대표는 “주말이면 교보문고 신간 코너와 인문학 코너에서 한가득 책을 안고 돌아와도 가슴속에는 무언가 채워지지 않은 앎에 대한 욕구가 남아 있었다”고 했다.

경영인들에게 인문학이 하나의 유행처럼 퍼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주최하는 인문학 조찬 강좌 ‘메디치21’이 있는 날이면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 입구엔 검정색 고급 승용차가 끝없이 이어진다. 수강생이 400명이 넘는 날도 있다고 한다.

강좌를 만든 인문대학 변창구 학장(영어영문학)은 “경영자들에게 경영을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동어반복밖에 안되지 않겠냐”며 “문학과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은 교수의 몫이고, 그것을 해석하고 자신의 것으로 확장시키는 것은 수강생들의 몫”이라고 말했다.

“정신적 삶이 없으니 가난하다”

뭐라고 해도 ‘성공한 사람들을 위한 호사’라는 기분은 떨칠 수 없었다. 다시 물었다. 인문대학 이영목 교수(불어불문학)는 “인문학의 위기라는 현실 앞에서, 우리 인문대학에서는 우리 스스로가 사회에 대해 폐쇄적인 것은 아니었냐는 자기반성으로 강좌를 만들었다”며 “지금은 미래의 지도자들을 꿈꾸는 이들을 위해 소수에게만 공급하는 시스템이지만, 대중과 다수에게 다가가는 과정을 밟아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온 국민이 무료로 수강할 수 있는 인문학 인터넷 강의를 준비 중이라고 했다. 인터넷을 통한 ‘인문학의 향연’은 인문대학 차원에서 추진했던 것인데, 지금은 대학 본부에서도 뜻을 모으고 있단다. 시기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멀지 않은 시기에 개강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인문학은 사회와의 소통을 넓힘으로써 대중의 삶에 기여해야 한다. 이런 강의를 소수에게만 공급하는 것은 인문학의 본질에도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렇다. 인간은 빵만으로는 살 수가 없다. 미국의 언론인 얼 쇼리스가 지난 1995년 뉴욕의 한 교도소에서 20대 초반의 한 여죄수를 인터뷰했을 때의 일이다. 살인 혐의로 8년째 복역 중이던 여죄수는 ‘사람들이 왜 가난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시내 중심가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정신적 삶이 없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정신적 삶이 뭐냐’고 되묻는 질문에 그녀는 “극장과 연주회, 박물관, 강연 같은 거죠. 그냥 인문학이오”라고 답했다. 그 말에 깨달음을 얻는 얼 쇼리스는 곧바로 뉴욕의 노숙자와 알코올중독자들을 위한 인문학 강의를 시작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인문학 강의’라는 별칭을 얻고 있는 ‘클레멘트 코스’는 그렇게 시작됐다. 클레멘트 코스의 첫 수료자 17명 중 2명이 의사, 1명은 간호사가 됐다. 그들은 그렇게 삶을 되찾았다.

글 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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