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에 유익하거나 정당한 의견이 있는 경우에는 소정의 절차를 밟아 상관에게 건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국방부 장관의 적법·정당한 명령을 따르지 않을 의사로 지휘계통을 통한 건의 절차를 경유하지 않은 채 헌법소원을 제기하였는바, 이는 군의 지휘계통을 문란하게 하고 군기와 단결을 저해한 것으로, 각 법령 준수 의무를 위반한 것이다.”
국방부가 불온도서 지정의 근거로 내세운 한총련 내부 문서. 하지만 이 문서에서 ‘군대 도서 보내기 운동’을 진행한다는 구절은 어디에도 없었다.
육군본부가 군대 내 불온도서 지정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한 군법무관 2명을 파면하면서 내놓은 첫 번째 징계 사유다. 내부 건의 절차를 거치지 않아 군 지휘계통을 문란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부분은 어느 규칙이나 조항을 어긴 것일까? 이 입수한 육군본부 징계위원회 서류를 보면, 이는 군인복무규율(대통령령) 제24조에 위반된다고 돼 있다. 24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하는 군에 유익하거나 정당한 의견이 있는 경우 지휘계통에 따라 단독으로 상관에게 건의할 수 있다. 이 경우 상관이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는 결정을 하더라도 항상 상관의 의도를 존중하고 기꺼이 이에 복종하여야 한다.” ‘상관에게 건의할 수 있다’는 일종의 선택적 권리 조항인 것이다. 그런데 주어진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다는 것이 징계 사유가 될 수 있을까.
사실, 군인복무규율 제25조에는 “군인은 복무와 관련된 고충사항을 진정·집단서명 기타 법령이 정하지 아니한 방법을 통하여 군외부에 그 해결을 요청하여서는 아니된다”는 조항이 있다. 군법무관들의 헌법소원 제기에 딱 떨어지게 적용이 가능한 이 조항을 놔둔 채, 엉뚱한 조항을 적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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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두고서는, 25조가 위헌 소지까지 거론될 정도로 대표적인 독소조항으로 지적돼온 점을 군 당국이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이 조항은 별다른 예외나 구제 방법도 제시하지 않은 채 군 내부의 문제점을 외부에 알리는 행위를 원천적으로 금지하고 있어 개정 요구를 받아왔다. 실제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2005년 군부대에서 훈련병에게 인분을 먹였다는 ‘인분사태’가 난 뒤 “복무와 관련된 고충사항에 대하여 필요시 외부에 알리는 것을 허용하는 등 외부통제장치 방안이 포함되도록 군인복무규율을 개정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결국 이 조항을 적용해 군법무관들을 파면할 경우, 군인복무규율의 독소조항 폐기 등 또다른 이슈가 불거질 가능성이 있는 만큼 이를 피하기 위해 무리수를 뒀다는 것이다.
군법무관 파면 사태를 둘러싸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처럼 ‘황당한’ 군 당국의 일처리가 하나씩 드러나고 있다. 국방부가 불온도서를 지정하는 과정과 징계 사유 등을 두고서 여러 가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국방부는 지난해 8월 불온도서 목록 지정과 관련해 “군내 반입을 금지한 23개 도서는 사회 일부 단체에서 군 장병들의 ‘의식화’를 목적으로 추진하는 ‘군내 도서 보내기 운동’ 목록에 포함된 것”이라고 밝혔다. ‘사회 일부 단체’가 도서 보내기 운동을 벌이려고 해 어쩔 수 없이 불온도서를 지정했다는 얘기다. 그런데 ‘사회 일부 단체’로 설명된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은 “그런 운동을 전개한 바 없다”고 밝혔다. 진실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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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석 민주당 의원이 국방부에 “한총련은 그런 적 없다는데 어찌된 일이냐”고 문의하자, 국방부는 “기무사령부에서 한총련이 장병 의식화 목적으로 ‘책자 보내기 운동’을 추진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다각적인 방법을 통해 첩보를 검증한 후 장관에게 보고했다”고 밝혔다. 이에 첩보보고서 등 원자료를 요구하자 “정보수사기관 업무 특성상 제출할 수 없다”고 답했다. 이로써 진실 공방은 묻히는 듯했다.
그런데 뒤늦게 공방의 진실을 풀 단서가 나타났다. 군법무관 헌법소원과 관련해 국방부가 지난 2월 헌법재판소에 첩보 자료를 제출한 것이다. ‘16기 한총련 7~8월 방중사업계획서’라는 한총련 내부 문서가 바로 그것이다. A4용지 30장 분량의 이 문서는 △7~8월 구호와 핵심 토론 과제 △상반기 평가 △정세 △시기 규정과 목표 △교양사업 △조직사업 △핵심사업 △실천활동 등의 항목으로 나뉘어 있으며, 이른바 ‘불온도서’와 관련된 내용은 ‘교양사업’에 소개돼 있다. ‘일꾼(회원) 교양 대책’ 가운데 하나로 ‘6월15일~8월15일 방(학)중 책읽기 운동’이 제시된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는 “방중 책 읽기는 더 많은 대학에서, 더 많은 일꾼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자”고 돼 있을 뿐, 이 책들을 군 복무 중인 병사들에게 보내자는 내용은 없다. 게다가 “총화 방법은 상반기 책 읽기 운동과 동일합니다”라고 밝히고 있어, 이같은 책 읽기 캠페인이 방학마다 주기적으로 이뤄지던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5권을 읽은 일꾼들에게 소정의 상품을 증정합니다”라는 안내도 눈에 띈다.
그렇다면 ‘군내 도서 보내기 운동’ 첩보의 근거는 무엇일까? 국방부가 내놓은 답변을 보면 ‘군내 도서 보내기 운동’이 허구였을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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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한총련 내부 문건에서는 6월15일~8월15일에 책 읽기 캠페인을 벌인다고 돼 있는데, 국군기무사령부가 첩보를 입수한 것은 7월15일이다. 기무사령부의 보고를 받은 국방부가 불온도서를 지정해 예하 부대에 내려보낸 때는 7월 하순이다. 이미 캠페인 기간이 절반 이상 지난 상태였다. 한총련이 도서 보내기 운동을 진행했다면, 군부대로 보내진 책이 적발되거나 압수될 수 있는 시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국방부는 “실제 적발되거나 압수된 불온도서가 얼마나 있냐”는 질의에 “없다”는 답을 내놓았다.
불온도서 선정 방식도 의구심을 자아낸다. 한총련 문건에는 불온도서로 지정된 23권 말고도 10권가량의 책이 더 나온다. (하종강 지음), (여연구 지음), (조영래 지음), (올가 말리체바 지음) 등이 그것이다. 등의 장편 역사소설도 포함돼 있다. 국방부는 총 30여 권 가운데서 일부를 추려내고 나머지를 불온도서로 지정한 셈이다. 국방부는 선택된 23권의 분류 기준과 관련해서도 처음엔 ‘북한 찬양 11권, 반미·반정부 10권, 반자본주의 2권’이라고 했다가, 나중엔 ‘북한 찬양 6권, 반미·반정부 14권, 반자본주의 3권’이라고 설명을 바꿨다. 처음에 23권을 추려낸 기준은 무엇이고, 23권을 두 차례에 걸쳐 세 분야로 분류한 기준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국방부는 설명을 내놓지 않고 있다.
파면당한 박아무개 대위의 징계 사유로 거론된 품위 유지 의무 위반 혐의도 논란 거리다. “조사 과정에 대한 항의 표시로 삭발하고 벙거지 모자를 착용한 상태로 근무에 임하는 등의 행위는 군 간부로서 기본적 품위를 손상시”켰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 대위는 최근 헌법소원 취하 회유와 압박 등으로 인해 극심한 스트레스성 탈모를 겪고 있고, 치료 과정에서 머리를 짧게 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며 내놓은 국방정책은 ‘안보’와 ‘실용’으로 대표된다. 그렇다면 이번 불온도서 지정 논란과 관련해 어떻게 안보를 강화하고 어떤 실용을 챙겼을까? 앞서 설명했듯이, 불온도서 압수와 관련해 국방부 스스로 아무런 성과도 내놓지 못했고,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 조짐과 관련해 더욱더 단결이 요구되는 군심을 갈라놓기까지 했다. 실용·안보와 관련해 역효과만 낸 것이다. 군법무관들을 혼쭐내주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 그나마 유일한 성과일까.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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