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27일 서울 영등포구 하자센터. 40여 명의 스무 살들이 ‘또라이 선언’을 했다. “나는 스펙(토익점수·학점 등 점수화되는 조건)이나 추구하면서 살지는 않겠다” “나는 문화를 많이 소비하고, 또 많이 생산하겠다”. 상식과 통념을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흔히 ‘괴짜’라고 부른다. 긍정적 ‘괴짜’는 발칙함·기상천외함을 통해 조직에 활력과 생기를 가져온다. ‘또라이’는 괴짜의 과격한 버전쯤 되겠다.
스무 살들이 우르르 또라이 선언을 할 수 있었던 무대는 2월25~27일 사흘 동안 ‘문화생산자 캠프’였다. 캠프는 꽉 짜인 고등학교 생활을 끝내고 이제 막 사회 혹은 대학의 문턱에 들어가려는 스무 살들을 대상으로 했다.
슬램(퍼포먼스의 한 형태), 무성영화, 즉흥공연 등 다양한 문화를 만들어내는 방법을 배우고 직접 해보는 워크숍에 더해 소설가 공지영, 영화감독 변영주, 인디밴드 ‘두 번째 달’의 리더 김현보 등 윗세대 문화생산자들의 강연을 마련했다. 불안한 시대에 위축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문화적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상상력을 기르자는 취지다.
20대에 갓 접어든 이들을 위해 이 캠프를 꾸린 건 누굴까? 어느 대학 입학처? 인권·교육 관련 시민단체? 캠프의 주체는 다름 아닌 같은 20대다. 20대 초반에서 후반에 걸쳐 있는 20여 명이 모인 ‘밤섬해적단’. 서울에서 거의 유일하게 야생이 살아 있는 공간 ‘밤섬’에서 제도에 짓눌리지 않는 ‘해적’ 같은 삶을 살고 싶은 이들이 모였다는 뜻이다. 의 저자 우석훈씨의 수업을 들은 연세대·성공회대 학생들이 주축이 된 밤섬해적단은 처음에는 ‘공부모임’이었다. 그러나 점차 20대가 처한 현실을 직시하고, 그 현실의 구조적 모순에 균열을 가할 ‘행동’을 모색하는 단체로 거듭났다.
최근 20대의 현실은 한층 더 가혹해졌다. 올해 1월 20대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61.8%로 21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지난해 청년 실업률은 8.3%로 전체 실업률 3%의 2배를 넘어섰다. 게다가 늘어나는 일자리는 온통 6개월 시한부의 단기 인턴직이다. 이병훈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이대로 가다가는 내년 청년 실업률은 14~15%로 뛰어오를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호황을 누리는 곳은 각종 아르바이트 중계 사이트. ‘알바천국’은 지난 2월 가입 회원의 34%가 대학 졸업생이었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9% 늘어난 수치다. 가장 높은 점유율을 보이는 아르바이트 중개 사이트 ‘알바몬’의 홍보담당자는 “아르바이트마저도 구직 공고는 계속 줄어드는데 이력서 제출 회원은 늘고 있다”고 말했다.
밤섬해적단의 서명선(22)씨는 “고등학교 때는 대학 말고 다른 길이 보이지 않았다. 대학에 왔더니 더 암담하다. 내가 갈 수 있는 어디든 입구가 너무 좁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 둥둥 떠다니는 해파리 같다”고 말했다. 박재용(26)씨는 “그런 현실 때문인지 20대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고 씁쓸해했다. 기업들이 일자리를 만들겠다며 제일 먼저 신입사원 초임을 최대 28%까지 삭감하는 정책을 내놓고 시한부 취업 자리인 인턴 채용만 늘리고 있는데도 20대가 딱히 연대해 목소리를 내지 않는 현실을 꼬집는 말이다. 박씨는 “지금 20대가 ‘실패의 경험’이라도 있으면 다행일 것 같은데, 움직이지 않아서 실패도 성공도 하지 않는 수동적인 세대라는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잡지·책 이어 공연 기획까지이를 극복하기 위해 밤섬해적단은 20대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새로운 장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정부 정책이나 학교의 등록금 정책 등을 비판하는 집회 위주의 운동 방식과 차별화를 꾀하는 것이다. 박재용씨는 “어차피 ‘짱돌’을 드는 사람은 제한적이다. 게다가 드는 사람들만 든다. 그렇다면 이제 무조건 짱돌을 들자고 선동하는 방식으로는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 그 짱돌을 들 수 있도록 공감대를 형성하는 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 첫 발걸음이 스무 살들을 향해 ‘자유롭게 상상하고 표현하자’고 제안하는 ‘문화생산자 캠프’였다. 두 번째 발걸음은 전국 곳곳에서 이미 무언가를 생산하고 있는 20대들을 한 데 묶는 것이다. 이들이 꺼내든 개념은 ‘문화생산자 생협’. 소비자이자 생산자인 ‘문화생산자’들이 모여 생활협동조합을 구성하는 것이다. 먹을거리 생협과 같은 개념이다. 생산해내는 문화에 대한 고정 소비층이 생기면, 존재의 존엄함을 위협받지 않을 수준의 수익도 보장될 수 있다.
안정배(29)씨는 “우선은 전국 여기저기 흩어져 각자의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는 20대들을 모으는 것이 관건”이라며 “이를 위해 20대의 목소리를 폼나게 담는 잡지·책 출판하기는 물론 발칙한 20대 생산자들을 소개하는 공연 기획까지 여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올해 상반기에 문화생산자 생협을 실현하려고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20대 15명으로 구성된 ‘맥놀이’는 밤섬해적단이 찾아헤매는 20대 문화생산자 중 하나다. 국민대 졸업생들이 뭉친 인권모임 맥놀이는 지난 3월13~15일 서울 대학로 피카소극장에서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로서 연극 (Modern effect)를 공연했다. 연극은 동성애자 권투선수 박해리의 이야기를 통해 ‘소수자를 함부로 배려하는 대신, 동등한 시민으로 봐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맥놀이 구성원들은 학원 강사, 시민단체 간사, 대학원생 등의 직업을 갖고 있다. 백수도 있다. 연극이라고는 두어 명이 대학 시절 잠깐 해본 게 전부다. 이들이 직접 쓴 극본으로, 쌈짓돈을 모아 직접 대관한 공연장에서 생계를 위한 돈벌이를 잠시 밀어내고 하루 8시간씩 연습한 결과물이 다.
애초 이들도 공부모임이었다. 베트남 문학을 읽으며 동아시아 역사를 고민하고, 를 읽으며 노동 문제를 공부하고, 동성애자 문제를 토론하다 단체로 ‘게이 문화에 나타난 권리 제한 연구’라는 논문까지 써냈다. 그런 이들이 연극을 한 건 왜일까? 맥놀이에서 공연 기획을 담당한 조은호(25)씨는 “우리가 공부한 것들을 현실로 끌어내고 싶었고, 인권을 이야기하면서도 즐겁게 놀고 싶어 연극을 생각했다”고 말했다.
생산인구가 되는 데뷔의 플랫폼이들에게 연극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닌 ‘함께 하는 것’이다. 이번 연극에서 주인공 해리를 사랑하는 전 애인 역을 맡은 권현욱(28)씨는 “연극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하고 도움을 주는, 손잡고 하는 활동입니다. 그리고 재밌잖아요. 우리가 인권을 이야기하는 것도 서로 손잡고 재밌게 사는 세상을 꿈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연극’의 형태는 이들이 처한 ‘88만원 세대’의 비참함을 해소해주는 하나의 방식이기도 하다. 졸업과 동시에 배운 것과 무관한 일로 돈벌이를 해야 하는 졸업 이후의 삶에 대해 고민하던 권씨는 4학년 때 맥놀이를 만났고, 인권을 공부하고 연극을 하면서 “즐겁게 사는 법을 배워서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공연 때 또래 친구가 와서 ‘재미있냐’고 묻는데 왠지 어깨가 쓸쓸해 보였다”며 “사회구조적인 이유로 경쟁의 한가운데 있는 친구들이 ‘다른 삶’에도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물론 현실은 녹록지 않다. 조은호씨는 “공연을 준비하는 동안 학원 강사, 아르바이트 등 돈 버는 일을 제대로 못해 다들 주머니가 텅 비었을 것”이라며 웃었다. 그러나 조씨는 “미국·유럽엔 대학에서 출발해 사회적 공헌도 하고 생계도 해결하는 단체로 발전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우리도 인권을 고민하면서 생계의 존엄함도 위협받지 않고 즐겁게 살 수 있기 위해 그 방법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밤섬해적단이나 맥놀이가 스스로의 문제를 ‘문화’와 ‘연대’로 풀어내면서 ‘경제적 자립’을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다면, 이 문제 해결의 열쇠를 ‘사회적 기업’에서 찾는 20대 당사자도 있다. 올해 1년째로 접어드는 희망청이 그들이다.
사회적 기업은 수익을 창출하되 그 이윤을 사회 취약계층을 위해 제공함으로써 전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도모한다. 예를 들면 신발 한 켤레를 살 때마다 아프리카의 신발 없는 어린이에게 신발을 기증하는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미국의 톰스슈즈, 장애인들이 쿠키를 만드는 한국의 위캔, 디자인 기획을 해주고 수익금으로 청년 지원 활동에 나서는 일본의 아소봇 등이 있다. 희망청은 지난해 이런 사회적 기업의 창업 또는 취업을 고민하는 20대에게 관련 교육을 제공하는 ‘체인지메이커 아카데미’를 개설했다.
희망청은 지난해 2월23일 20대 6명이 주축이 돼 “20대의 생활권을 확보하고, 이들이 생산인구가 되기 위한 데뷔의 플랫폼이 될 것”이라며 닻을 올렸다. 희망청 원년멤버 송지현(25)씨는 출판사에서 일하다가 를 읽고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행동에 뛰어들었다. 책에서 주문한 ‘짱돌’을 든 셈이다. 희망청 창립멤버 박광철(29)씨도 같은 경우다. “20대의 현실을 해결하는 문제를 ‘남의 손’에 맡길 것이 아니라, ‘내 손’으로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현실의 법칙을 바꾸는 연대
올해 희망청은 한 달에 한 번 ‘하이잭 회의’를 열어 더 많은 20대들을 끌어들일 생각이다. 하이잭 회의는 불만을 이야기하고 그 불만을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 일자리를 만들어낸다는 개념에 바탕한다. 쓰레기 매립지가 불만이라면 이를 공원으로 만드는 아이디어를 내고, 이런 아이디어가 정책으로 채택되면 공원화 과정에서 일자리가 얻어지는 식이다. 희망청은 20대의 상상력으로 빚어낸 아이디어들이 이들의 창업·취업으로 연결되도록 지원할 생각이다. 박광철씨는 “희망청을 통해 우리 스스로가 ‘행복한 생산자’로 거듭나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밤섬해적단, 맥놀이 그리고 희망청. 셋은 모두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풀어낸다는 ‘당사자 운동’의 성격을 띤다. 정부 정책들을 구체적으로 비판하며 항의집회를 하는 기존의 운동 방식이 아니다. 이들은 다른 가능성을 끊임없이 모색하고, 같은 상황에 있는 사람들과 연대하려 한다. 상상력과 네트워크, 이 두 가지를 통해 20대가 처한 경쟁의 고리를 끊고, 지속 가능성 혹은 생존 가능성을 모색하는 모양새다.
물론 한계도 있다. 다종다양한 20대를 모두 대변할 수 없다. 대학을 졸업한 20대에게 쏠리는 경향도 있다. 밤섬해적단의 이윤주(25)씨는 이런 한계에 대해 “우리가 20대 모두를 대변하려는 것은 아니다. 당사자 운동은 여러 가지 형태로 계속해서 나와야 한다. 그러되 서로 연대하면 된다. 다만 더 많은 당사자들이 그들 존재를 비참하게 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고, 그런 상황을 끝낼 수 있는 여러 가지 가능성들을 고민하면 된다”고 말했다.
희망청의 박광철씨는 “더 많은 사람들이 대안적 삶에 주목하면, 그것이 대안이 아니라 주류가 될 수 있다”며 “20대들이 점점 더 세게 목을 죄어오는 현실 속에서 웅크리거나 비명만 지르지 말고 그 현실의 법칙을 바꾸기 위해 다른 20대와 손잡았으면 좋겠다”고 주문했다.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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