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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의 시대 ‘나는 누구인가’

성격검사 늘고 셀프북 잘 팔려… 치열한 경쟁사회가 부른 ‘신자유주의의 내면화’
등록 2009-02-26 18:16 수정 2020-05-03 04:25

휴대전화 회사에서 마케팅일을 하는 배아무개(30)씨. 입사 두 달째인 그는 요즘 고민에 빠졌다. 업무 특성상 외향적이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을 즐거워해야 하는데 배씨는 반대다. 앞에 두 사람 이상이 있으면 남몰래 손에 밴 땀을 닦아야 하는 성격이다. 성과를 토대로 한 평가도 잦아서 긴장도는 더 커졌다. ‘내가 이 일을 잘할 수 있을까.’ ‘나는 어떤 사람일까.’ 배씨의 고민은 그렇게 시작됐다. 온라인을 배회하던 배씨가 찾은 것은 성격검사. 사람의 성격을 16가지 유형으로 나눠 분석해주는 마이어브릭스 유형지표(MBTI·Myers-Briggs Type Indicator) 검사가 여러 블로그에 올라 있었다. 대학 시절 친구들이 하는 걸 보고도 무심코 지나쳤던 배씨는 이번엔 기꺼이 마우스를 클릭했다.

대학 상담센터 찾아 분석 의뢰

사회의 불확실성이 커지면 사람들은 성격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런 사회 분위기를 반영해 최근 성격검사, 심리분석과 관련한 책들도 많이 출판되고 있다.

사회의 불확실성이 커지면 사람들은 성격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런 사회 분위기를 반영해 최근 성격검사, 심리분석과 관련한 책들도 많이 출판되고 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은 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갖는, 그러나 가라앉아 있던 욕망이다. 최근 이 ‘자기분석 욕망’이 물 위로 떠오르고 있다. 사람들이 자신을 알기 위해 부쩍 성격검사나 심리검사를 찾아나서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심리를 분석하는 프로그램의 하루 이용권을 파는 한 온라인 쇼핑 사이트는 올해 들어 이용객이 급증했다. 지난해 1~2월 이용자 수가 2만6천 명이었던 데 비해, 올해 1~2월 이용자 수는 9만6300여 명으로 4배가량 늘었다. 상담 차원에서 무료로 성격·심리분석을 해주는 각 대학의 학생상담센터에서도 이를 의뢰하는 학생 수가 부쩍 많아졌다. 오윤자 경희대 학생상담센터 소장은 “2007년에 비해 2008년 자신의 성격분석을 의뢰하러 찾아온 학생 수가 20%가량 늘어났다”며 “대부분 지난해 9월 이후의 일”이라고 말했다. 한양대 한양상담센터에서도 성격분석을 의뢰한 학생 수가 2007년 990여 명에서 2008년 1400여 명으로 40% 정도 늘어났다.

2009년 2월. 사람들이 자신의 성격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뭘까? 황상민 연세대 교수(심리학)는 “사회적 불확실성이 커지면 사람들이 성격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며 “이것은 동서양 할 것 없이 공히 발생하는 현상”이라고 말한다. 지난해 9월, 미국발 경제위기에서 시작돼 이어져오고 있는 경제 불황, 용산 철거민 참사, 연쇄살인범 등장 등 예측 불가능한 사회경제적 상황을 중심으로 한국 사회의 불확실성은 커져왔다. 구직 단념자·청년 백수 등 실업자 수도 346만 명으로 역대 최고다. 좋은 학교 졸업장이 직업을 담보해주지 않고, 가진 돈도 언제 반토막 날지 모른다. 이미 직장에 들어갔어도 얼마나 다닐 수 있을지, 월급은 제때 나올지 불투명하다. 가족·직장·국가 등 공동체나 제도권에서 기댈 데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기 능력, 자기 성격에 관심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노명우 아주대 교수(사회학)는 “학생들이 MBTI 검사 등 각종 성격검사를 통해 자기분석을 하려는 욕망은 불안해진 사회에서 자기 능력에만 기대게 되는 신자유주의의 내면화”라고 말했다.

1992년, 레이거노믹스(‘레이건’과 ‘이코노믹스’의 복합어)의 영향으로 인한 재정·무역 쌍둥이 적자로 미국 경제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사람의 성격 유형을 다섯 가지로 분류하는 버클리 성격검사가 과학잡지 에서 첫선을 보이며 하루 만에 100만 부 이상 팔려나간 것이 다름 아닌 이때다. 오윤자 소장은 “불황이 되면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할지 코치하는 ‘셀프북’이 호황을 이룬다”며 “성격검사 수요가 많아진 것도 그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기업 직무적성검사도 영향

성격검사의 대중화에는 각 기업이 신입사원을 뽑는 과정에서 실시하는 직무적성검사도 큰 영향을 미쳤다. 기업들이 각종 성격검사, 심리분석 도구를 신입사원 선발에 활용함에 따라 성격검사가 ‘취업 준비의 필수 코스’로 등장한 것이다. 취업준비생 우대영(28)씨는 2주 전 면접 스터디에서 동료 학생 15명과 함께 DISC 검사를 했다. DISC 검사는 성격을 크게 주도형(D), 사교형(I), 신중형(S), 안정형(C) 등 네 가지로 분류한다. 밖에서 보이는 자신과 실제 자신이 어떻게 다른지를 통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평가한다. 우씨의 성격은 DD형. 안팎이 다 주도적인 사람이라는 뜻이다. 우씨는 “가끔 제가 하는 말이 공격적이라는 지적을 받곤 하는데, 내가 주도적인 사람이라서 그렇다는 걸 알게 됐다”며 “좀더 부드러운 말투를 쓰라는 조언도 함께 들어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스트레스로 점철된 구직 과정에서 성격검사를 통해 작은 오아시스를 찾기도 한다. 학생들이 구직 활동을 위해 갖춰야 하는 다양한 종류의 ‘스펙’(조건)들은 대체로 학점·성적·영어점수 등 1등부터 꼴등까지 줄 세우기가 가능한 것들이다. 그러나 성격검사는 유형화는 될지언정 줄 세우기는 안 된다. 올해 대학 4학년인 박진욱(27)씨는 “나를 알게 됨으로써 좀더 자신 있게 면접 등에 임할 수 있다”고 말했다. 노명우 교수는 “성격을 유형화하는 도구들이 다양하게 발전한다는 것은 사회가 그만큼 작은 일자리 하나를 놓고서도 경쟁이 치열함을 나타내는 것”이라며 “더욱 무서운 것은, 개인의 성격을 직장이라는 공적 조직이 파악하는 내적 감시 시대가 본격화됨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자기중심적 사고가 늘어난 것, 자기 표현의 시대라는 점도 개인이 자신의 성격에 골몰하게 되는 또 하나의 요인이다.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르네상스 시대에 별자리 등 개인이 가진 조건에 따라 그 사람의 운명을 점치는 점성술이 발달했고, 이 점성술은 성격검사의 기원이기도 하다. 개인에 대한 관심이 큰 미국에서 성격분석이 발달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미화 한양대 한양상담센터 연구원(상담심리)은 “자신을 잘 표현하는 사람이 인정받고 주목받는 시대인 만큼, 자기 표현에 서투른 사람들이 자신은 원래 그런 것인지, 바뀔 수는 없는지 등의 의문을 갖고 상담센터를 찾아오는 경우도 많아졌다”며 “2~3년 전과 비교해서 달라진 대목”이라고 말했다.

“점집 가는 것과 비슷한 심정”

황상민 교수는 “한국에서 사람들이 성격분석을 하는 것은 연초나 연말, 또는 자신의 미래가 궁금할 때 사주팔자를 보러 점집에 가는 것과 비슷한 심리”라고 말했다. 성격분석은 자신의 내적 속성과 행동 패턴을 분석하고 유형화해 다음 행동을 예측하게 한다. 점집에 가서 “제가 무슨 일을 하면 좋을까요?” “누구와 결혼하게 될까요?”라고 묻는 것과, 성격분석을 통해 나에게 적절한 일을 찾고 나와 잘 맞는 사람을 찾는 것은 같은 원리라는 얘기다.

불안한 사회는 점점 사람들이 ‘자신’에게 집중하게 만든다. 험난한 세상에서 자신을 정확히 아는 것만이 생존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불확실성이 극단으로 치닫는 지금, 사람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제도적 대안 대신 내적 해결을 추구한다. 불안한 사회는 사람들을 그렇게 보수적으로 만든다.

글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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