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등 일꾼 기호 ○번 ×××!”
“다시 희망을 준비합니다. 기호 △번.”
요즘 서울 서초동 법조타운 변호사 사무실들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유인물이 배달되고 있다. 바로 선거 유인물이다. 2009년 2월 초로 예정된 대한변호사협회와 서울지방변호사회 지도부 교체를 앞두고 치열한 선거전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유인물뿐이 아니다. 각 후보와 후보 진영 변호사들은 팀을 이뤄 서울시내 로펌들을 돌아다니며 지지를 호소하느라 바쁘다.
후보들 정치적 야심 vs 유권자 무관심
후보로는 서울변호사회장의 경우 얼마 전까지 대한변협 공보이사와 사무총장으로 일한 윤상일(52·사법시험 19회) 변호사와 김현(52·사법시험 25회) 변호사가 나섰다. 대의원 간선으로 뽑는 대한변협 회장은 변호사 3분의 2 이상이 등록돼 있는 서울변호사회에서 추천한 후보가 차지하는데, 이 자리를 놓고 김평우(63·사법시험 8회) 변호사와 이준범(50·사법시험 22회) 변호사가 격돌하고 있는 상태다.
아무래도 관심은 대한변협 회장 선거로 모아진다. 이를 두고서는 ‘신구 대결’ ‘주류-비주류 대결’이란 말들이 나오고 있다. 경남 사천 출신인 김평우 변호사가 고시 14년 선배인데다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메이저’인 데 반해, 전남 장성 출신인 이준범 변호사는 검정고시와 한양대 출신인 ‘마이너’이기 때문이다.
실제 이 변호사는 비주류를 자임하는 선거 전략을 펴는 것으로 전해졌다. 최근 변호사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젊은 변호사들의 표심이 당락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만큼, 여기에 호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이준범 변호사의 성향은 보수우익에 가깝다는 평가다. 그는 2005~2006년 서울변호사회 회장 시절 ‘국정원 불법도청 사건’이 문제가 됐을 때 특별법을 제정해 모든 진실을 밝히자는 일각의 주장에 강력한 반대 의견을 냈다. 또 납북 동포 송환과 북한 인권 문제를 거론하며 거리로 나서기도 했다.
그런데 선거에 대한 대다수 변호사들의 반응은 미지근하다. 흡사 요즘 대학 총학생회 선거처럼 후보·선거운동원과 일반 유권자의 분위기가 딴판인 것이다. 특별한 이슈가 있는 것도 아닌데다, ‘나 먹고사는 것과 별 관련 없지 않냐’는 냉소적인 태도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서울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연말 모임들에 나가봐도 선거 얘기는 나오지도 않는다”며 “다들 먹고살기 어려운데 누가 그런 것에 관심을 기울이겠냐”고 말했다. 선거가 ‘보수 대 진보’가 아니라 ‘보수 대 보수’ 구도로 돼버린 것도 이같은 분위기를 굳히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대한변협 회장 자리는 대학 총학생회장과는 차원이 다르다. 우선 대한변협은 임의단체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한변협에서 변호사 등록을 안 받아주면 변호사 개업을 할 수 없으며, 모든 변호사는 회비를 납부해야 한다. 또 수임 내역도 대한변협에 보고하도록 법에 규정돼 있다. 로펌들의 수임 내역 등 민감한 정보가 대한변협에 모인다. 대외적인 권한도 적지 않다. 정부에서 무슨 위원회를 구성할 때 대한변협 회장에게 후보 추천 몫을 주는 경우가 꽤 있다. 언뜻 보면 명예직 같으면서도, 자세히 살펴보면 권한도 적지 않은 자리인 셈이다.
‘조준웅 삼성특검’ 추천을 기억하나대한변협 회장의 이같은 ‘권한’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경우로는 삼성특검을 들 수 있다. 특검법에서 대한변협 회장이 특별검사 후보를 추천하도록 했는데, 이진강 대한변협 회장은 △정홍원 전 법무연수원장 △조준웅 전 인천지검장 △고영주 전 서울남부지검장을 후보로 추천했다. 지배권 불법 승계와 불법 비자금 조성 의혹과 함께 검찰 등 권력기관에 대한 로비가 주요한 수사 대상이었는데,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검찰 공안, 특수 분야 고위직 출신들만을 후보로 추천한 것이다. 결국 조준웅 특검은 검찰이든 경찰이든 계좌추적만 제대로 하면 확인할 수 있는 차명 주식과 비자금 일부만 밝혀냈을 뿐, 경영권 불법 승계와 임채진 검찰총장 등을 비롯한 ‘떡값 검사’ 의혹에 대해서는 면죄부를 내줬다. 이진강 대한변협 회장이 특검 후보를 추천하는 순간, 특검의 결론은 결정돼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또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대다수 변호사들의 무관심 또는 방관 속에서, 정치적인 야심이 있는 인사가 후보로 출마하고, 변호사 집단의 이익에 더 충실하며 더 조직력을 갖춘 인사가 대한변협 회장에 당선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적 공기로서의 변호사와 대한변협의 역할에 대한 고민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실제, 후보들이 내놓은 공약집을 살펴보면(2008년 12월26일 현재) △사이버 법률대학 설립 △법관 평가제 실시 △변호사 선임 강제주의 도입 △준법감시인 입법화 등 직업적 이익 수호에 관한 내용은 무성하지만, 퇴보하고 있는 인권 상황에 대한 지적이나 고민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변호사협회도 이제 의사협회처럼 돼가고 있다. 직업적 이익단체일 뿐, 어떤 사회적인 역할을 기대할 수 없게 되는 것 같다. 진보 쪽에서는 후보조차 내놓지 못했다. 씁쓸하지만, 현실이 그렇다.” 이번 선거를 바라보는 한 변호사의 씁쓸한 독백이다.
| |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소방청장 “이상민, 계엄 때 한겨레 단전·단수 지시” [영상]
법조계 “경호처 지휘부, 윤석열 영장 막다 부상자 나오면 최고 35년”
헌재, 윤석열 쪽 주장 반박…“재판 중 내란 수사기록 요청 문제없다”
“북한군 ‘우크라 사람들 좋나요’”…젤렌스키, 한국어로 포로 교환 제안
군 검찰, 박정훈 대령 무죄에 불복…항소장 제출
[단독] 한덕수 “탄핵 정족수 151명 위법”…소추 사유 모두 반박
윤 대통령 쪽 “경호처 직원 변론 돕겠다”…기소 가능성 인정
억지 ‘결사항전’…남북이 동병상련 [그림판]
[단독] ‘윤석열 탄핵심판’ 속도 내는 국회…1차 증인 5명만 골랐다
‘군인연금 월500’ 김용현, 체포 직전 퇴직급여 신청…일반퇴직 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