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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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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센 변협의 무력한 선거

권한은 막강한데 보수 후보만 나선 대한변호사협회장 선거… ‘집단 이익’ 담은 공약만 떠돌아
등록 2009-01-08 14:23 수정 2020-05-03 04:25

“일등 일꾼 기호 ○번 ×××!”
“다시 희망을 준비합니다. 기호 △번.”
요즘 서울 서초동 법조타운 변호사 사무실들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유인물이 배달되고 있다. 바로 선거 유인물이다. 2009년 2월 초로 예정된 대한변호사협회와 서울지방변호사회 지도부 교체를 앞두고 치열한 선거전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유인물뿐이 아니다. 각 후보와 후보 진영 변호사들은 팀을 이뤄 서울시내 로펌들을 돌아다니며 지지를 호소하느라 바쁘다.

후보들 정치적 야심 vs 유권자 무관심

후보로는 서울변호사회장의 경우 얼마 전까지 대한변협 공보이사와 사무총장으로 일한 윤상일(52·사법시험 19회) 변호사와 김현(52·사법시험 25회) 변호사가 나섰다. 대의원 간선으로 뽑는 대한변협 회장은 변호사 3분의 2 이상이 등록돼 있는 서울변호사회에서 추천한 후보가 차지하는데, 이 자리를 놓고 김평우(63·사법시험 8회) 변호사와 이준범(50·사법시험 22회) 변호사가 격돌하고 있는 상태다.

특검 후보 추천권 등 상당한 권한을 갖고 있는 대한변호사협회장 선거철이 다시 돌아왔다. 지난해 1월10일 삼성특검 현판식에서 조준웅(왼쪽 두 번째) 특검과 이진강 대한변협 회장이 악수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특검 후보 추천권 등 상당한 권한을 갖고 있는 대한변호사협회장 선거철이 다시 돌아왔다. 지난해 1월10일 삼성특검 현판식에서 조준웅(왼쪽 두 번째) 특검과 이진강 대한변협 회장이 악수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아무래도 관심은 대한변협 회장 선거로 모아진다. 이를 두고서는 ‘신구 대결’ ‘주류-비주류 대결’이란 말들이 나오고 있다. 경남 사천 출신인 김평우 변호사가 고시 14년 선배인데다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메이저’인 데 반해, 전남 장성 출신인 이준범 변호사는 검정고시와 한양대 출신인 ‘마이너’이기 때문이다.

실제 이 변호사는 비주류를 자임하는 선거 전략을 펴는 것으로 전해졌다. 최근 변호사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젊은 변호사들의 표심이 당락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만큼, 여기에 호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이준범 변호사의 성향은 보수우익에 가깝다는 평가다. 그는 2005~2006년 서울변호사회 회장 시절 ‘국정원 불법도청 사건’이 문제가 됐을 때 특별법을 제정해 모든 진실을 밝히자는 일각의 주장에 강력한 반대 의견을 냈다. 또 납북 동포 송환과 북한 인권 문제를 거론하며 거리로 나서기도 했다.

그런데 선거에 대한 대다수 변호사들의 반응은 미지근하다. 흡사 요즘 대학 총학생회 선거처럼 후보·선거운동원과 일반 유권자의 분위기가 딴판인 것이다. 특별한 이슈가 있는 것도 아닌데다, ‘나 먹고사는 것과 별 관련 없지 않냐’는 냉소적인 태도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서울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연말 모임들에 나가봐도 선거 얘기는 나오지도 않는다”며 “다들 먹고살기 어려운데 누가 그런 것에 관심을 기울이겠냐”고 말했다. 선거가 ‘보수 대 진보’가 아니라 ‘보수 대 보수’ 구도로 돼버린 것도 이같은 분위기를 굳히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대한변협 회장 자리는 대학 총학생회장과는 차원이 다르다. 우선 대한변협은 임의단체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한변협에서 변호사 등록을 안 받아주면 변호사 개업을 할 수 없으며, 모든 변호사는 회비를 납부해야 한다. 또 수임 내역도 대한변협에 보고하도록 법에 규정돼 있다. 로펌들의 수임 내역 등 민감한 정보가 대한변협에 모인다. 대외적인 권한도 적지 않다. 정부에서 무슨 위원회를 구성할 때 대한변협 회장에게 후보 추천 몫을 주는 경우가 꽤 있다. 언뜻 보면 명예직 같으면서도, 자세히 살펴보면 권한도 적지 않은 자리인 셈이다.

‘조준웅 삼성특검’ 추천을 기억하나

대한변협 회장의 이같은 ‘권한’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경우로는 삼성특검을 들 수 있다. 특검법에서 대한변협 회장이 특별검사 후보를 추천하도록 했는데, 이진강 대한변협 회장은 △정홍원 전 법무연수원장 △조준웅 전 인천지검장 △고영주 전 서울남부지검장을 후보로 추천했다. 지배권 불법 승계와 불법 비자금 조성 의혹과 함께 검찰 등 권력기관에 대한 로비가 주요한 수사 대상이었는데,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검찰 공안, 특수 분야 고위직 출신들만을 후보로 추천한 것이다. 결국 조준웅 특검은 검찰이든 경찰이든 계좌추적만 제대로 하면 확인할 수 있는 차명 주식과 비자금 일부만 밝혀냈을 뿐, 경영권 불법 승계와 임채진 검찰총장 등을 비롯한 ‘떡값 검사’ 의혹에 대해서는 면죄부를 내줬다. 이진강 대한변협 회장이 특검 후보를 추천하는 순간, 특검의 결론은 결정돼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또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대다수 변호사들의 무관심 또는 방관 속에서, 정치적인 야심이 있는 인사가 후보로 출마하고, 변호사 집단의 이익에 더 충실하며 더 조직력을 갖춘 인사가 대한변협 회장에 당선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적 공기로서의 변호사와 대한변협의 역할에 대한 고민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실제, 후보들이 내놓은 공약집을 살펴보면(2008년 12월26일 현재) △사이버 법률대학 설립 △법관 평가제 실시 △변호사 선임 강제주의 도입 △준법감시인 입법화 등 직업적 이익 수호에 관한 내용은 무성하지만, 퇴보하고 있는 인권 상황에 대한 지적이나 고민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변호사협회도 이제 의사협회처럼 돼가고 있다. 직업적 이익단체일 뿐, 어떤 사회적인 역할을 기대할 수 없게 되는 것 같다. 진보 쪽에서는 후보조차 내놓지 못했다. 씁쓸하지만, 현실이 그렇다.” 이번 선거를 바라보는 한 변호사의 씁쓸한 독백이다.


민주성을 잃은 대한변협 운영
‘촛불 성명’은 누구 마음대로?


변호사들은 대한변협의 가장 큰 문제점 가운데 하나로 비민주적 운영을 들고 있다. 대한변협이 얼마나 변호사들의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고, 그 바람과 이해를 대변하고 있냐는 것이다. 최근에는 촛불정국 때 보인 대한변협의 행보를 두고 이런 논란이 일었다.
촛불이 한창 힘을 얻어가던 2008년 6월5일, 대한변협은 ‘민심 수습을 위한 대한변호사협회의 제언’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대한변협은 여기에서 “걷잡을 수 없이 동요하는 현 사태를 방관하는 것은 사회정의를 실현코자 하는 변호사의 사명을 소홀히 하는 것이라는 판단 아래, 각 지방변호사회장단, 대한변협 자문위원회, 이사회의 의견을 수렴했다”며 이명박 대통령에게 △국민의 목소리 경청 뒤 국민적인 합의 도출 △미국과의 쇠고기 협상 과정 및 내용 일체에 대한 투명한 공개 △내각 및 청와대 참모진 인사 쇄신과 인식 변환 등을 주문했다. “‘고소영’ ‘강부자’ 내각 비판이 끊이지 않는 만큼, 과감하게 국민의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실력 위주의 인사를 실현해야” 한다거나 “정치적·이념적 요소가 적은 영역에서의 정책 변경이나 인적 쇄신은 신중히 함으로써 기존 질서를 수용하는 화합과 안정의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지적도 포함됐다.
그런데 약 한 달 뒤인 7월3일, 대한변협은 ‘흔들리는 촛불 넘어 길 잃은 법치주의를 우려한다’는 제목의 두 번째 성명을 발표했다. “정부 당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련의 혼란 사태는 수그러지지 않았다… 현행 집시법상 허가 없는 일몰 후 야간집회는 그 자체로서 이미 불법이다”라는, 정부의 강경 진압을 시종일관 옹호하는 내용이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 대해서도 “일부 종교인들마저 종교행사라는 이름으로 이에 합류함으로써 선량한 국민의 불안을 증폭시키고 있다”며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이런 180도 태도 변화에 대한 회원들의 반발이 터져나왔다. 1차 성명에서 지적한 이명박 대통령의 근본 인식이나 정부 태도는 그대로인데, 이를 바라보는 시각만 뒤바뀌었기 때문이다. 상당수 변호사들은 “회원들 의사는 묻지도 않고 누구 마음대로 그런 성명을 내놓냐”는 항의 전자우편을 대한변협에 보냈다. 대한변협의 한 회원은 “상식적으로 최대한 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초안을 회람하고 응답자의 3분의 2가량은 찬성해야 변협 명의로 성명을 내놓을 수 있는 것 아니겠냐”며 “당시 대한변협 이사회에서는 회원들의 항의 사태를 논의하더니 ‘문제를 제기한 변호사들의 이름은 회의록에 남기지 않겠다’는 황당한 결론만 내리고 일을 마무리지었다”고 말했다.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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