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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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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림길 KBS, 정치만의 계절


사원행동과 노조 출신의 네 후보가 각축 벌이는 노조 선거…
당선자가 제일 먼저 맞닥뜨릴 문제는 회사의 ‘보복 징계’
등록 2008-11-27 14:06 수정 2020-05-03 04:25

“뭐가 이렇게 많아. 이거 돈 낭비 아냐?”
11월19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국방송. 본관과 신관을 연결하는 20여m 길이의 복도 양쪽에 12대 한국방송 노조위원장을 뽑기 위한 선거 홍보물이 가득 널려 있는 것을 보고 지나가던 직원이 한마디 했다. 신관 로비 앞에도 각 후보의 공약과 결의를 담은 홍보물이 쌓여 시선을 사로잡는 가운데, 마침 각 진영에서 나온 선거 운동원들이 손팻말을 들고 열심히 선거운동전을 벌였다. 올해 들어 정연주 전 사장이 해임되고 이병순 사장 체제가 들어서는 과정에서 극심한 홍역을 치른 국내 최대 공영방송에 다시 ‘정치의 계절’이 찾아온 것이다.

11월20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국방송 신관 로비에 12대 노조 선거에 출마한 후보자들의 홍보물이 쌓여 있다. 이번 선거는 앞으로 2년간 이병순 사장 체제를 견제할 내부 세력을 뽑는다는 점에서 안팎의 주목을 받고 있다.

11월20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국방송 신관 로비에 12대 노조 선거에 출마한 후보자들의 홍보물이 쌓여 있다. 이번 선거는 앞으로 2년간 이병순 사장 체제를 견제할 내부 세력을 뽑는다는 점에서 안팎의 주목을 받고 있다.

노조 심판론 vs PD 심판론

정치는 기억과의 싸움이라는 명제가 있다. 네 팀이 출마한 이번 선거의 가장 큰 쟁점 역시 ‘심판론’이다. 두 팀이 그 대상으로 지목받는다. 우선 노조 부위원장 신분으로 출마한 기호 1번 강동구 후보 쪽이다. 새 사장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뒤 이에 반대한 개혁 성향의 ‘KBS사원행동’ 소속 기자·PD들에 대한 한밤중의 무더기 보복 인사, 뒤이은 간판 내리기 등 정치 보복이 횡행하고 제작 자율성이 침해될 때 노조 간부로서 무엇을 했느냐는 비판이 일고 있다. 나머지 세 후보 모두 강 후보의 이런 약점을 공격하고 있다. 강 후보는 후보들 가운데 유일하게 이병순 사장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어, 강 후보가 당선될 경우 앞으로 닥쳐올 방송 구조조정 국면에서 노조가 제 목소리를 낼 수 있겠느냐는 의구심도 일고 있다. 강 후보 쪽은 선거 홍보물에서 “이병순은 KBS 사장이다. 일단 인정하고 시작한다. 그와 협상과 투쟁을 할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강 후보는 과의 전화 통화에서 “(사원행동 쪽이) 노조라는 공식적인 틀을 깨고 나와서 행동한 게 잘못이라는 민심이 더 많다”며 “우리 쪽이 고용 안정, 수신료 등 문제를 가장 안정적으로 해결할 것이라는 점이 현장에서 어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위원장이 되면 현재 노조와는 또 달리 “내 소신과 주장을 갖고 할 것”이라고 밝혔다. 조직력이 장점이다.

또 다른 심판론의 대상은 ‘사원행동’을 대표하는 기호 4번 김영한 후보다. 그에게는 ‘PD 심판론’이 제기된다. 한국방송 노조는 ‘위원장-부위원장 러닝메이트’ 제도를 택하고 있는데, 그는 이번에 출마한 네 팀 후보 8명 가운데 유일한 PD인데다, 정 전 사장이 한국방송에 오던 9기 노조 때 사무처장이었다는 점이 이런 비판과 결부돼 있다. 여기에는 한국방송 내부의 뿌리 깊은 권력 투쟁 논의의 역사가 자리잡고 있다. 잘나가는 몇몇 텔레비전 PD들이 인사권 등 역대 한국방송 내부의 주요 권력을 쥐고 흔들어왔으며, 특히 정연주 사장 시절 그런 경향성이 두드러졌다는 게 PD 이외 직군에 퍼져 있는 시각이다. 이른바 ‘왕당파 PD’ 논쟁이다. 최근 한국방송 내부 게시판에도 “그들은 정연주의 5년을 위아래로 떠받치면서 조직을 사분오열 망가뜨리고, 지역방송을 황폐화했다. 경영을 창사 이래 최악으로 몰아넣고 그 결과 구조조정의 망령이 KBS를 맴돌게 만든 장본인이다”라고 비판하는 글이 올라 논란을 불렀다.

김 후보는 이런 프레임 설정 자체가 구시대적인 것이어서 부당하다고 본다. 라디오 PD인 그는 “텔레비전 쪽 왕당파니 이런 비판에서 자유롭게 살아왔는데 갑자기 덧씌우기가 돼 억울하다”면서도 “비판은 비판대로 받겠지만 이를 극복해낼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김 후보는 선거 홍보물 제목을 ‘한판 붙자 이병순’이라고 붙일 만큼, 이 사장 체제에 가장 날을 세워 맞설 후보라는 점에서는 확실한 자리매김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1천여 비정규직 논의 전혀 없어

기호 2번 박종원 후보와 3번 문철로 후보는 나머지 두 후보와는 달리 특정한 프레임에 얽매여 있지 않다. 박 후보는 김영한 후보와 함께 사원행동 쪽으로 분류되지만 김 후보보다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김 후보와 함께 젊고 개혁적인 조합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실제 사원행동 소속 조합원들 가운데 박 후보 캠프에서 일하는 이도 상당수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종원 후보와 함께 출마한 박정호 부위원장 후보는 “(우리가 4번에 비해) 덜 선명한 건 아니고 넓은 저변을 갖고 있으면서 오히려 전체 조합을 단결·통합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많다”고 말했다. 박 후보 쪽과 김 후보 쪽은 당선되면 각각 석 달, 여섯 달 뒤 전체 조합원을 대상으로 이 사장에 대한 신임투표를 실시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12대 한국방송 노조선거 후보들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12대 한국방송 노조선거 후보들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유일하게 경영직 출신인 문 후보의 경우는 한국방송 내부 권력관계에서 늘 약자인 하위 직급 조합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문 후보 캠프 쪽 인사는 “강 후보 쪽이 심판을 받지 않고 다시 당선된다면 노조를 탈퇴하는 조합원이 많을 것”이라며 “이병순씨처럼 땅굴 파고 들어온 사장으로는 공영방송이 될 수 없고, 우리는 많은 사람이 선출 과정에 참여하는 독일식 사장추천위원회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각 후보 진영은 11월26일 나오는 1차 투표 결과에서 한 후보가 50% 이상의 득표로 승부를 확정짓기는 어렵다는 데 동의하면서도 서로 결선 투표 진출을 자신하고 있다. 최종 당선자는 1·2위 득표자가 맞붙는 결선 투표(12월3일 발표)에서 확정될 전망이다. 당선자가 제일 먼저 맞닥뜨릴 과제로는 보복 인사에 이은 회사 쪽의 보복 징계 문제다. 한국방송은 노조 선거가 끝나는 대로 김현석 전 기자협회장과 양승동 전 PD협회장 등 사원행동 핵심 인사들에 대한 징계 작업에 착수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선거에서 핵심 변수는 역시 1300여 명으로 가장 많은 수의 조합원을 거느린 기술직군의 마음을 누가 사로잡느냐이다. 강동구·박종원 등 1·2번 위원장 후보와 한대희·김병국 등 3·4번 부위원장 후보가 모두 기술직인 까닭이다. 한국방송은 올해 900억원, 내년 1천억원 적자를 예상하고 있고 한나라당 쪽이 내년에 수신료 인상 등의 명분으로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요구할 게 확실시된다. 칼날은 우선 기술직군과 하위직을 향할 게 뻔해 이들의 신분 불안감은 다른 어느 직군보다 크다.

그럼에도 한국방송 노조가 ‘귀족 노조’ 비난을 받는 것은 선거 국면에서 1천여 명에 이르는 사내 비정규직에 대한 논의는 전혀 없는 탓이 크다. 조합원 자격이 없는 그들은 이처럼 중요한 국면에서 단 한 표만큼의 의미도 없다. 파견 용역직으로, 전기 등 건물 관리와 사무보조 업무 등을 하는 이들 비정규직이 보기에 이번 선거는 ‘그들만의 잔치’일 뿐이다.

“변화에 대한 인식 수준 보여주는 선거”

한편 한국방송의 한 기자는 이번 선거의 의미를 이렇게 평가했다. “얼마 전 현대차 노조가 (비정규직 노조 가입안을 부결하면서) 잘 사는 노조의 뻔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나. 한국방송을 보자. 방송시장 위기가 가속화하고 공영방송과는 반대 캐릭터의 정권이 들어서고, 노조는 최근 국면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이번 선거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물결 속에서 한국방송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 능력, 방송 환경 변화에 대한 인식 수준을 보여줄 것이다.”

글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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