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1일 오후 3시. 식당, 술집 등이 빼곡히 모여 있는 서울 논현동 영동시장 골목. 이 골목 끝에 위치한 고시원에서 전날 아침 8시15분께 정아무개(31)씨가 고시원의 자기 방에 불을 낸 뒤 방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흉기로 마구 찔렀다. 6명이 숨지고 3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끔찍한 일이 있은 뒤라 거리는 흉흉했다. 정씨가 2003년부터 6년째 생활해왔던 시장 골목에서 정씨에 대해 물었다. 날카로운 대답들이 돌아왔다.
10월23일 정아무개씨가 방화·살인을 저지른 서울 논현동 고시원 현장에서 현장검증을 하고 있다. 고시원 바깥에서는 피해자 가족들이 오열했다. 이런 ‘무차별 범죄’를 막기 위해 지역사회와 국가기관이 할 일을 고민해야 한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정씨가 주차요원으로 일했던 가게 맞은편 ㅇ찜닭 사장(51)은 “항상 그를 피했다”고 말했다. “사람과 눈을 잘 못 맞춰. 눈을 깔고 ‘장사 잘돼?’ 물어. 나이 차이가 몇 살이 나건 아무한테나 반말을 하는데 누가 좋아해?” 옆집 ㅅ갈비 지배인 김아무개(36)씨도 거들었다. “여기 가서 10분, 저기 가서 10분 그러다 누가 말 받아주면 엉겨붙어서 1시간 동안 떠들지. 누가 벤츠를 대잖아. 그럼 저게 얼마고, 왜 비싼지 말을 쏟아내. 여러 분야로 아는 건 많은데 말을 듣다 보면 앞뒤가 안 맞아. 질린다고 할까? ‘영업 방해 그만하라’고 핀잔을 주면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넋두리를 시작해. 친구? 걔 친구 없어.” 3년째 이 지역 식당들에 술을 납품하는 ㄱ업체 홍아무개(36)씨도 “형, 동생 하긴 했지만 안부를 묻는 말에도 거칠게 답하고 피해의식이 많아 보여 깊이 얘기 나눈 적은 없다”고 말했다.
주차관리, 24시간 밥집 배달 등 비정규직 일자리를 불규칙하게 오가던 정씨는 6개월 전부터는 배달일도 그만뒀다. 낮에는 내내 고시원에 있다가 밤이 되면 거리로 나왔다. 배회하다 새벽에 들어가는 생활을 반복했다. 추석·설 등 명절에도 한 번도 부모님이 사는 고향에 내려가지 않고 늘 고시원에 머물렀다. 발견된 일기장에는 가족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다. 6개월 전부터는 무직 상태였다. 민방위 훈련에 참석하지 않아 생긴 벌금 150만원, 연체된 고시원 방값과 휴대전화비 77만원 등 230여만원의 부채도 있었다. 20대의 절반을 보냈던 시장 골목에서 이웃들이 피하는 ‘외톨이’였던 정씨가 몸을 누이는 곳도 창문 없는 한 평 조금 넘는 고시원 방이었다.
광고
정씨와 같은 ‘외톨이’들이 세상을 향해 절제되지 않은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9월17일 경북 구미시. 김은미(26·여·가명)씨는 새벽 4시30분 집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슈퍼에 갔다. 김치라면 하나를 샀던 김씨는 가게를 나갔다가 되돌아와 다른 라면으로 바꿨다. 그러고는 다시 집으로 가서 흉기를 가져와 슈퍼 종업원 이아무개(56)씨를 열여덟 차례나 찔렀다. 이씨는 다행히 목숨을 잃지는 않았고 전치 6주 진단이 나왔다. ‘왜 그랬냐’는 질문에 김씨는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무시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누구라도 찔렀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건을 담당했던 경북 구미경찰서 김진구 경위는 “대인기피증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어쨌든 말이 거의 없고 조용한 성격”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대구의 한 보육원에서 자랐다. 일찍이 부모가 김씨를 버렸다. 19살 때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보육원에서 나와 부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다. 대구에서의 26년 생활을 뒤로하고 올해 2월 구미로 갔다. 5개월간 작은 공장에서 일하다가 7월 중순 일을 그만둔 뒤, 진평동 원룸에서 혼자 살았다. 이곳은 4~5년 전부터 원룸이 들어찬 원룸촌이다. 동네에서 김씨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김씨의 방에는 전화기도 없었고 휴대전화도 없었다. 김씨가 두 달 동안 대화를 나눈 것은 추측건대 텔레비전뿐이었다. 김씨를 면담한 경찰청 과학수사센터 권용일 경위는 “굉장히 고립돼 있는 상태였다”고 전했다.
두 달 동안 TV만… “날 비웃는 것 같다”세상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자신과 직접 관계가 없는 사람을 향해 흉기를 휘둘러 사람을 숨지게 한 일이 올해만 네 번째다. ‘이상동기범죄’ 혹은 ‘무동기범죄’라고 불린다. 강원 동해시청에서 36살의 무직 남성이 “여기 있는 사람이 공무원이냐” 한마디를 내뱉고 흉기를 휘둘러 시청 공무원 한 명을 숨지게 했다. 강원 양구시 하천에서는 역시 36살 남성이 운동하는 여고생을 찔러 죽였다. 지난 7월에는 서울 홍제동 인왕초등학교 앞에서 26살 남성이 지나가는 사람을 찔렀다. 모두 ‘무차별적인 살인’이다. 이상동기범죄를 저지른 피의자들과 면담을 해서 이들의 심리적 특징, 성장환경 등을 분석해서 정리하는 권용일 경위는 “아직 통계로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세상에 대한 불만을 품고 충동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최근 3~4년간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직업이 없고 고립 상태가 오래 지속된 사회적 약자층이 저지르는 범죄는 피해자도 같은 계층인 경우가 많다. 권용일 경위는 “이런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화 정도가 낮아서 낯선 지역보다 자기가 사는 곳 근처에서 범행을 저지른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그와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 공공장소나 교통수단을 같이 이용하는 사람들이 범죄의 주 타깃이 된다.
광고
이런 범죄는 왜 일어날까. 2006년 1월부터 2007년 6월까지 1년6개월 동안 300여 건의 살인 사건을 분석한 이진숙 인천경찰청 과학수사계 범죄수사관은 “살인범들을 직접 면담해보면 사회적 지지세력이 없는 사람들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 많다”며 “이들을 지지해주는 공적 서비스가 조금만 있다면 이런 범죄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안타까움이 들 때가 많다”고 말했다.
허경미 계명대 교수(범죄학)도 “이 사람들을 이런 상황까지 몰고 간 사회적 요인을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허 교수는 “가족이나 직장·지역 공동체 등 조직에 사회적으로 결속돼 있다는 결속감, 자신을 지지해주는 사람과의 관계는 사람이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것을 막아주는 브레이크 구실을 한다”고 말했다. 고시원에 불을 지른 정씨, 갑자기 슈퍼마켓 종업원에게 칼을 휘두른 김씨 등은 모두 이런 ‘관계’라는 브레이크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브레이크 없이 내면에 차곡차곡 쌓여가던 세상에 대한 분노와 불만이 폭발한 셈이다. 경찰청이 집계한 우발적 범죄는 2005년 35만9966건에서 지난해 38만6442건으로 매년 늘어나고 있다.
해법은 뭘까. 파편화된 사회를 보듬는 정책이 필요하다. 올해 통계청 발표를 보면 서울시 다섯 가구 중 한 가구가 1인 가구다. 양극화도 심해져 전체 자산에서 하위 40%가 점유하는 비율을 상위 20%의 점유율로 나눈 ‘10분위 배율’이 1999년 0.130에서 2004년 0.099로 낮아졌다. 결국 관계의 결핍과 경제적 결핍, 두 가지 결핍을 모두 겪는 사람들을 제어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달동네’ 이웃의 역할, 누가 해줄까신연희 성결대 교수(교정복지)는 “양극화가 극심해지면서 절대빈곤 못지않게 상대적인 박탈감, 심리적 황폐감이 범죄의 큰 원인이 되고 있기 때문에, 직업이 없어 사회적 관계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직업기회 교육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치유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 버지니아주의 재소자 재활단체(OAR·Opportunities, Alternatives and Resources)는 재소자와 재소자 가족, 보호관찰 대상자와 그의 가족에게 제공하던 직업·정서 교육 서비스를 각 지역사회의 무직업 은둔형 생활자들로 확대하고 있다. 신 교수는 “이런 사례가 하나의 본보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허경미 교수는 “미국에서는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지만 말할 상대가 없는 사람들이 언제든 전화할 수 있는 24시간 핫라인이 있다”고 소개했다. 이진숙 범죄수사관은 “사람들이 친숙하게 찾을 수 있는 주민자치센터(동사무소)에서 심리적·경제적 결핍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찾고, 이들에게 직업을 가질 기회를 제공하고 정신상담도 하는 종합 서비스를 마련하는 게 가장 직접적인 대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광고
과거 ‘달동네’에서 저소득층 가정들이 모여 살던 시절 가족과 이웃이 해주던 역할을 이제는 ‘누가’ 할 것인지 사회가 고민해야 한다. 제2, 제3의 논현동 고시원 방화 사건을 겪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광고
한겨레21 인기기사
광고
한겨레 인기기사
서울 강동구 싱크홀 매몰자 17시간 만에 숨진 채 발견
전한길 자살 못 하게 잡은 절친 “쓰레기…잘못 말해주는 게 친구”
울산 언양에도 산불, 헬기 3대 진화중…등산객 실화 추정
한덕수처럼, 윤석열 탄핵 심판도? [3월25일 뉴스뷰리핑]
명일동 대형 싱크홀에 빠진 오토바이 실종자…안엔 토사·물 2천톤
한국인 모녀·자매 3명 그랜드캐니언 여행 중 실종…10일째 연락두절
미 해군 전문가 “군함 확보 시급, 한국이 미국 내 조선소에 투자하면…”
‘의성 산불’ 역대 3번째 큰불…서울 면적 5분의 1 태웠다
삼성전자 TV사업 이끈 한종희 부회장 별세…향년 63
공수처 “신규 검사 임명 반년 미뤄져…한덕수 대행, 임명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