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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의 침묵, 사찰 탓일까

“경찰이 스님들 뒤 캐고 있다” 소문… 불교계 “투쟁 방향 바꿨을 뿐” 해명
등록 2008-10-24 15:39 수정 2020-05-03 04:25

조용하다. 이명박 정부와 정면충돌 일보 직전까지 갔던 불교계에 목탁 소리만 말없이 흐르고 있다. 청와대의 개신교 편중 인사와 종교차별적 언행으로 끓어오른 불교계의 분노는 국토해양부의 인터넷 대중교통시스템에서 사찰 명칭이 빠지면서 증폭됐고, 7월29일 경찰이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 차량에 대한 과잉 검문을 시도하자 마침내 폭발했다.
8월27일 서울시청 앞에서 20만 명(경찰 추산 6만 명)의 스님과 불자가 모여 정부 규탄 범불교도대회를 연 불교계는 네 가지를 요구했다. △대통령의 공개 사과 △어청수 경찰청장 파면 △공직자 종교편향 금지입법 △시국 관련 국민대화합 조처 등이었다.
불교계가 봉기하자 9월9일 결국 이명박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종교편향 논란에 대해 ‘유감’을 표명한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의 유감 표명은 ‘사과’에 미치지 못했고, 나머지 세 가지 요구사항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

이명박 정부와 가파르게 대치했던 불교계가 최근 조용하다. 9월10일 대구 동화사를 방문해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을 만나려다 쫓겨나고 있는 어청수 경찰청장. 한겨레 신소영 기자

이명박 정부와 가파르게 대치했던 불교계가 최근 조용하다. 9월10일 대구 동화사를 방문해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을 만나려다 쫓겨나고 있는 어청수 경찰청장. 한겨레 신소영 기자

“어 청장이 비리 내사 지시” 제보

그리고 불교계는 침묵했다. 일부 언론은 9월 말 아예 불교계가 대통령의 ‘사과’를 사실상 수용했다고 보도했다. 불교계 내부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던 것일까.

#제보전화

10월9일 목요일 오전 10시30분 서울 한 사찰로 제보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현직 경찰관의 전화였다. 자신을 불자라고 소개한 40대 중반 경찰관의 목소리는 격앙돼 있었다. 그는 “어청수 청장이 해도 해도 너무한 것 같다”며 말을 꺼냈다.

“한 달 전에 대구 동화사에서 불교 대표자 간담회가 있었죠. 그때 경찰청장이 동화사를 찾아갔다가 못 들어가고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이틀 뒤 어 청장이 15명 남짓 되는 경무관급 간부들을 모아놓고 불교계 비리에 관한 내사를 지시했습니다. 이미 하급기관에도 구두 지시가 내려왔고요.”

제보자가 말한 간담회란 9월10일 동화사에서 열린 ‘헌법파괴종교편향 종식을 위한 대구경북지역 불교대표자 간담회’를 가리킨다. 어 청장은 이날 예고 없이 동화사를 찾았다가 스님들과 몸싸움까지 벌였다. 어 청장은 사과를 하기 위해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을 만나겠다고 했고, 스님과 신도들은 ‘기습 사과’는 받을 수 없다며 막았다. 결국 어 청장은 대웅전 앞마당에서 지관 스님을 만났지만 악수만 나누고 쫓기듯 돌아와야 했다.

경찰관의 제보전화를 직접 받은 사찰 관계자는 “전화가 두 차례 걸려왔는데, 내용이 구체적이어서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사찰에서는 내부 논의를 거쳐 제보 내용을 조계종 총무원과 시국법회추진위원회에 알렸다.

#사정설

제보를 전달받은 시국법회추진위 등 불교계에서는 고민에 빠졌다. 그렇잖아도 8월 범불교도대회 직후부터 불교계에서는 ‘경찰이 스님과 사찰의 뒤를 캐고 있다’는 이야기가 파다하게 번졌다. 어청수 경찰청장 등이 사과를 한다며 불교계를 찾아다니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정설’을 흘리면서 불교계를 압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계종 핵심 관계자의 증언이다.

“7월4일 시국법회와 8월27일 범불교도대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스님과 불자에 대한 경찰의 탐문 활동이 이미 시작됐고, 특히 대구·경북 지역 사찰들의 환경파괴 문제나 사찰 문화재 불사(佛事) 관련 업체들에 대한 경찰 조사 등이 있었던 것으로 우리는 확인하고 있습니다.”

8월27일 범불교도대회 직후 불교계에 대한 사정설이 널리 퍼졌다.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차관(가운데)과 만나 담소를 나누는 지관 스님(사진 오른쪽). 연합

8월27일 범불교도대회 직후 불교계에 대한 사정설이 널리 퍼졌다.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차관(가운데)과 만나 담소를 나누는 지관 스님(사진 오른쪽). 연합

지원금 사용내역 등 아킬레스건

불사란 주로 절을 짓고 불상을 조성하는 사업을 말한다. 현재 국가지정문화재의 35% 정도가 불교 문화재다. 정부는 이같은 불교 문화재의 유지·보수비 명목으로 매년 약 260억원을 불교계에 지원하고 있다. 전통사찰 지원금도 있다. 이는 1988년 제정된 전통사찰보존법에 따라 매년 70억원 안팎의 전통사찰 보수·정비 지원금을 전국 각 사찰에 나눠주는 것이다.

불교계에서는 스스로 정부 지원금 사용 내역을 ‘아킬레스건’으로 꼽고 있다. 아무래도 스님들이 전문적 행정이나 회계에 취약하다 보니 정부의 지원 취지에 맞지 않게 사용하는 경우가 발생하곤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불교계에서는 최근까지도 대형 사찰의 전·현직 주지스님들이 연루된 교부금 유용 사건들이 잇따랐다.

경찰이 지난여름 시국법회와 범불교도대회를 주도했던 몇몇 스님들의 주변을 내사하고 있다는 복수의 제보도 ‘헌법파괴종교편향 종식 범불교대책위원회’(범불교대책위)에 접수됐다. 진보 성향의 불교단체인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전 의장인 ㅊ스님의 경우 불교회관 건립을 위해 사업부지를 매입할 때 자신의 명의를 빌려준 것이 문제가 됐고, ㅈ스님은 사생활 문제로, ㅅ스님은 개인 비리로 경찰이 내사 중이라는 ‘소문’이었다.

8월27일 범불교도대회 전후 교구본사와 대형 사찰을 중심으로 경찰 관계자들이 집중적으로 ‘사과’ 방문을 한 것도 개운치 않은 뒷말을 낳고 있다. 단순히 사과만을 위해 방문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서울 봉은사 황찬익 종무실장은 “범불교도대회를 이틀 앞두고 관할 강남경찰서장이 명진 스님을 찾아뵙겠다고 요청해왔다”며 “명진 스님이 대회 전에는 안 만나는 편이 좋겠다며 정중히 거절했는데도 두세 차례 계속 면담을 요청했던 적이 있다”고 밝혔다. 명진 스님은 봉은사의 주지스님으로, 2006년 12월 천일기도에 들어간 뒤 아직까지 절 밖으로 나온 적이 없다.

가뜩이나 경찰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던 상황에서 현직 경찰관의 구체적 제보까지 이어지자 시국법회추진위는 10월9일 성명을 내기에 이르렀다. 제보 사실을 소개하며 경찰의 해명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시국법회추진위에는 실천불교전국승가회와 불교환경연대, 참여불교재가연대 등 진보적인 불교단체들이 참여하고 있다.

시국법회추진위는 성명을 통해 “최근 일부 총무원 집행부 및 일부 교구본사 주지 등의 내부 혼란 행위와 미심쩍은 행보가 이런 사정당국의 움직임과 연관된 것이 아닌지에 대해서도 주의와 동시에 경고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기류변화
조계사에서 농성 중인 박원석 광우병국민대책회의 상황실장 등 촛불 수배자들 모습.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조계사에서 농성 중인 박원석 광우병국민대책회의 상황실장 등 촛불 수배자들 모습.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시국법회추진위의 경고가 경찰과 불교계 일각 두 곳을 향한 셈이다. 특히 불교계 내부, 즉 ‘일부 총무원 집행부와 교구본사 주지’에 대한 경고는 충분히 의미심장한 대목이었다. 최근 불교계의 기류 변화를 설명해줄 수 있는 열쇳말이기 때문이다.

정우식 시국법회 상황실장은 이에 대해 “정부에 대한 불교계의 태도가 변했다면 여러 가지 이유와 한계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스님과 불자들의 마음에 달려 있다”며 “현실에 대한 각성이 뚜렷하지 않다면 조그만 바람에도 쉽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바람이란 ‘사정설’을 가리킨다.

시국법회추진위는 ‘일부 총무원 집행부’ 가운데 한 명으로 총무원 호법부장 정만 스님을 지목하고 있다. 호법부는 조계종 내부 검찰의 기능을 하는 곳이다. 정만 스님은 9월19일 와의 인터뷰에서 어청수 경찰청장을 옹호해 물의를 빚었다. 에 따르면 당시 정만 스님은 “조계종 여러 부장 스님과 직원 스님들이 (9월)17일 ‘더 이상 어청수 경찰청장의 진퇴에 대해 얘기하지 말자’는 말씀들을 나눴다”고 말했다. 정만 스님은 와의 인터뷰 직후 대한불교청년회, 불교환경연대, 참여불교재가연대 등 범불교대책위에 소속된 단체들로부터 거세게 사퇴 압력을 받았다.

시국법회추진위, 총무원 일부에 경고

10월9일 치러진 ‘비상시국회의’의 총무원 건물 사용 요청을 조계종 총무원이 돌연 거절한 것도 궁금증을 자아냈다. 비상시국회의에는 이명박 정부의 독주에 반대하는 450여 개 사회단체와 정당이 소속돼 있다. 비상시국회의는 애초 조계종 총무원 2층 국제회의장을 빌려 ‘민주주의와 민생 위기에 대응하는 비상시국회의’ 기자회견을 열려고 했으나 조계종이 행사 하루 전인 8일 오후 일방적으로 대관을 취소했다.

그런가 하면 조계사에 머물고 있는 촛불 수배자들의 거취와 관련해서도 조계사의 태도에 변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몇몇 인터넷 언론에서 조계사 관계자들이 수배자들에게 퇴거를 요구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보도 직후 조계사와 수배자 양쪽에서는 관련 사실을 부인하고 있지만 농성 100일을 넘기면서 천막을 둘러싼 분위기가 초기와 다른 것은 사실이다.

박원석 광우병국민대책회의 상황실장은 10월14일 “조계사 쪽에서 직접적으로 나가라고 한 적은 없고, 다만 최근 촛불 수배자들의 진로를 물어온 적은 있었다”며 “일단 자진 출두 계획은 없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말했다. 촛불 수배자들은 10월11일 조계종 교육원장 청화 스님으로부터 전원 법명을 받았다. 박원석 상황실장이 ‘진경’,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은 ‘진표’다.

물론 정부에 대한 불교계의 태도 변화를 한마디로, 특히 ‘불교계 사정설’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9월9일 어쨌든 이명박 대통령의 ‘유감’ 표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불교계가 일부 보수 개신교 세력처럼 정치적 훈련을 거친 집단이 아니라는 사실도 살펴봐야 한다. 조계종 총무원 기획실 박정규 홍보팀장은 “이 대통령의 유감 표명이 흡족하다기보다는 종교단체 특성상 장기간 반정부 투쟁에 나서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쪽이 있다”며 “이런 분들은 대정부 4대 요구 가운데 대통령 공개 사과와 어청수 경찰청장 파면 요구는 한발 양보하는 대신 종교차별 금지입법과 국민대화합 조처를 확실하게 얻어내자는 주장을 펴고 있다”고 말했다.

다음달 범불교대회 수위 촉각

사정의 주체로 지목되고 있는 경찰도 10월10일 내사설을 공식적으로 부인하고 나섰다. 경찰은 이날 대변인 명의의 해명자료를 통해 “불교계 등 어떤 단체나 개인에게도 보복성 표적 내사나 수사를 하지 않고 있다”며 “불교계와 경찰의 화합을 저해하고 경찰의 명예를 훼손할 수 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신중을 기해달라”고 주문했다.

#대구대회

주목해야 할 행사는 11월1일 대구에서 열리는 대구경북 범불교도대회다. 애초 불교계에서는 이번 대회를 정부 규탄대회 성격으로 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최근 그보다 강도가 낮은 결의대회로 수정했다. 주요 의제도 어청수 청장 사퇴 등이 아니라 각종 사회갈등 해소와 종교차별 금지입법 제정으로 ‘톤다운’됐다. 개혁 성향인 시국법회추진위에서는 여전히 종교차별과 우리 사회의 대립과 분열을 조장하는 정부를 꾸짖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이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반영될지는 미지수다.

특별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11월1일 대구 대회는 이명박 정부와 불교계가 벌인 갈등에 마침표를 찍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마침표가 그다지 개운하지는 않을 것 같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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