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5일 밤. 삼성그룹 내 정규직으로서는 최초로 공개적·집단적 노동조합 설립 시도를 하고 있다고 알려진 삼성SDI 부산공장 소속 노동자 17명과는 쉬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이들의 대표 격인 손철식씨와 통화가 연결된 것은 자정이 다 돼서였다. 손씨는 “목에 칼이 들어오는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 인생의 고빗길을 만났다. 더구나 오랫동안 암으로 투병하다 돌아가신 어머님의 기일인데, 누님 댁에서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는 길이라 마음이 더 착찹하다”고 했다.
대화 내내 손씨의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다. “노조 설립에 나선 분들 모두 20년 안팎을 근속해온 삼성맨들입니다. 회사의 사업 구조조정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고요. 회사가 대화의 문을 열어줬으면 여기까지 안 왔을 것이라는 생각, 전적(소속 옮기기)에 동의하면 고용 보장을 하겠다는 약속에 대한 불신, 노동조합 설립은 당연한 권리인데 이걸 막는구나 하는 반감 등이 겹쳐 있어요. 머리가 아픕니다.” 수화기를 타고 간간이 탄식인지 한숨인지 구별하기 힘든 숨소리가 건너왔다.
100% 고용 승계, 내용은 “올해 말까지”
지난 10월13일 삼성SDI 울산공장 노동자 17명이 민주노총 산하 전국금속노동조합 울산지부에 가입했다. 같은 날 서울 영등포 민주노총 사무실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들은 “회사의 일방적인 자회사 전적·전환배치에 반발해 금속노조에 가입했다”고 밝혔다. 17명의 인생과 더불어 여러 차례 노조 설립 시도를 무산시킨 삼성의 ‘무노조 신화’도 또 한 차례 고비를 맞는 순간이었다.
금속노조에 가입한 노동자들은 삼성SDI 모바일디스플레이(MD) 사업부 소속으로 부산 인근의 공장에서 13~21년씩 일했다. 이들의 ‘반란’은 지난 9월 초 회사 쪽이 ‘삼성모바일디스플레이’(SMD)라는 자회사를 세워 사업부를 이관하고, 소속 직원 1080명에게 전적 동의서 작성을 요구하면서 시작됐다. 고용 보장을 약속하는 책임 있는 답변을 듣지 못한데다, 전적을 강요받는 과정에서 자신들을 대표하고 권익을 보호해줄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절감했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전적 동의서는 왜 등장했고, 거기에는 어떤 내용이 담겼을까. 삼성SDI 홍보실 관계자는 “지난해 연간 5700억원 적자를 기록하는 최악의 시기를 보내면서 채산성이 없는 CRT(브라운관) 제조 라인을 중국으로 넘기고, OLED(유기발광다이오드)와 LCD(액정표시장치) 부문은 떼어내 삼성전자와 50 대 50으로 합작법인인 삼성모바일디스플레이를 만들게 됐다”고 말한다. 소속을 옮길 뿐 같은 공장에서 같은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회사 쪽은 신설 회사가 100% 고용을 승계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금속노조 신규 가입 노동자들은 “전적 동의서에는 올해 12월31일까지 고용을 보장한다는 내용만 담겨 있었다”고 반박한다. 한 노동자는 “새로운 회사가 출범하는 내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낀다”고 했다.
회사는 지난 9월 중순께까지 전적 동의서 작성을 거부하던 MD 사업부 소속 노동자 120여 명을 충남 천안공장으로 발령냈다. 전적이 싫다면 2차 전지 사업을 확대 개편할 천안공장으로 옮겨주겠다는 명목이었다. 원하는 사람은 3년 안에 다시 부산공장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는 언질도 건넸다. 고용 불안을 느낀 노동자들은 문서로 약속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이런 바람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런 과정에서 회사를 불신하게 된 노동자들 중 일부가 천안공장 발령을 거부하고 금속노조 가입을 선언하게 된 것이다. 21년째 근무해온 김동선씨는 “10~20년간 부산에서 삶의 터전을 닦아온 사람들에게 갑자기 천안으로 옮기라고 하면 어떡하나. 더구나 나는 어머니가 항암 치료 중이어서 천안에 갈 수 없는 형편”이라고 호소했다.
전배 뒤 ‘신설 합작법인으로 가라’는 지시받아그렇다면 노동자들이 고용 보장이 된다는 회사의 구두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한 노동자는 “부산사업장 공장장이 고용보장에 대한 담화문을 발표했다지만, 2000년대 들어서 오랜 구조조정 과정을 겪다 보니 회사를 신뢰하기 어렵게 됐다”고 말한다. 김동선씨의 사례를 보자. 지난해 CRT 부문이 정리되면서 회사는 직원들에게 명예퇴직, 관계사 전출, 다른 품목 사업장으로의 전배 등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게 했다. 어머니가 암 선고를 받은 상태였던 김씨는 MD 부문으로의 전배를 신청했고, 한국폴리텍대학(옛 기능대학)에서 3개월 교육을 마친 뒤 지난 4월 현장에 배치됐다. 그리고 다섯 달 뒤 ‘무조건 신설 합작법인으로 가라’는 일방적 지시를 받게 되니 ‘장기 근속자 물갈이’의 희생양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는 것이다.
CRT 부문 정리에 따라 사내 하청업체들이 계약 해지된 지난해 2월 이후 부산사업장 인근에서 항의집회를 이어가는 현실은 고용 불안이 남의 일이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다. 과거 삼성SDI의 정규직 사원이었던 이들 중 상당수가 외환위기 이후 소사장제 형태의 사내 기업으로 옮겨갔는데, 이 사내 기업들이 계약 해지되거나 폐업 처리되면서 졸지에 일자리를 잃었다. 익명을 요청한 삼성SDI의 한 노동자는 “처음엔 그분들도 55살까지 고용이 보장된다는 공장장의 서명·약속을 받고 보상금을 받은 뒤 외주로 전환됐다”면서 “이분들의 투쟁 과정을 봐왔기 때문에 대표이사 직인이 있는 고용 보장 문서 약속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대개 사내 하청업체들 직원의 평균 월급여는 140만~150만원 수준으로, 삼성SDI 정규직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노동자들에게 주어진 ‘양자택일’의 다른 한쪽 패를 들여다보자. 삼성SDI 관계자는 “삼성모바일디스플레이로의 전적이 싫다면 천안공장으로 옮겨가면 그만인데, 오로지 부산사업장 근무를 고집하는 걸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노조 설립에 나선 노동자들은 “삼성의 경영이념이 정도경영과 사원존중이라면서, 전적이 불합리하다고 항의하는 직원들을 단 2주일의 시간만 준 채 천안공장으로 발령한 것은 횡포”라고 말한다. 이 10여 명 대부분이 노부모를 병수발하는 중년 가장들인데, 대책을 세울 시간도 안 준 것은 일종의 ‘보복이자 횡포’라는 것이다. 이런 반박의 배경에는 여기저기 떠밀려 옮겨다니다가 명예퇴직 대상으로 내몰릴 것이라는 우려도 짙게 깔려 있다.
비판의 목소리를 용납하지 않고 곧장 ‘징계’를 들먹이는 노무관리 방식에 대한 실망감과 배신감을 털어놓는 목소리도 나온다. 회사는 천안행을 거부한 MD 사업부 소속 노동자들을 격리시키고 ‘압박’과 ‘회유’에 들어갔다. 한 노동자는 “회사에서 법적 검토가 끝났고 불응시 징계·해고까지 갈 수 있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가 하면, 간부들과 동료들이 설득 전화를 쉴 새 없이 걸어온다”면서 “노조 설립을 추진하는 분들의 모임 자리에 한 간부가 찾아와 ‘무슨 얘기를 했냐’며 동향을 파악하러 다니는 모습도 봤다”고 주장했다. 또 “직원들의 권익을 보호해야 할 사원대표협의회에 도움을 요청했더니, ‘회사 쪽 방침을 따르라’는 주장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고 그는 덧붙였다.
구조조정이 ‘노조 수요’의 홍수 불러이에 대해 삼성SDI 관계자는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삼성모바일디스플레이를 설립했고, 100% 고용 승계까지 해주겠다는데 직원 10여 명의 목소리에 끌려갈 수는 없는 일”이라며 “회사 방침을 따르는 직원들과의 형평성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노동계에서는 이번 사안이 삼성·포스코 등 무노조 경영 방침을 가진 기업들의 아성을 깨뜨리는 결정적 국면이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권순만 금속노조 부위원장은 “삼성 정규직 노동자가 10명이 넘게 스스로 찾아와 금속노조에 직접 가입한 것은 삼성 무노조 경영에 파열구가 났다는 뜻”이라며 “조만간 금속노조 산하에 삼성 관련 지회를 설립하는 방안 등을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민주노총은 오래전부터 ‘삼성 재벌 사업장 노조 조직화’를 주요 전략사업으로 설정하고, 조직가를 취업시키는 등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왔다. 삼성특검을 전후해 등장한 대리·과장 등 관리자급 중심의 모임 ‘삼역모’, 오랜 원직 복직 싸움을 통해 재고용을 보장받은 삼성SDI 부산공장 협력업체 하이비트의 여성노동자 17명, 그리고 이번에 노조 설립에 나선 정규직 출신들과 연대할 것으로 전망되는 ‘삼성SDI 사내해고 복직투쟁위원회’ 등은 삼성이 노조 설립을 더 이상 막아내기 힘들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특히 그동안 성장만을 거듭하던 삼성전자 사업장 내부에서 구조조정의 바람이 불고 고용 불안이 가시화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관리’의 벽을 훌쩍 뛰어넘어버리는 ‘노조 수요’의 홍수가 밀려올 수 있기 때문이다.
반론도 만만찮다. 삼성전자 인사부장 출신인 한 벤처기업 임원은 “삼성은 개인별 성과와 조직의 성과를 아울러 보상해주는 인사 시스템을 갖추고 있고, 구조조정을 하더라도 위로금을 다른 기업보다 후하게 주는 특성이 있다”면서 “이번 노조 설립 움직임도 결국 삼성의 능력이 잘 처리해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만 지난 연말 이후 (삼성특검 등으로) 스타일을 구기는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정도·정의 같은 걸 바로잡자고 나서는 회사 내 세력이 있다면 젊은 사원들의 동조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한국노동연구원의 조성재 박사는 “삼성 출신의 금속노조 직접 가입자가 생기고 2010년부터 복수 노조가 허용돼 이른바 ‘비노조’ 경영이 깨지더라도 노동운동이 삼성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며 “삼성은 성과보상 체계 등 인사관리 모델이 잘 돼있기 때문에, 금속노조가 계급적 관점에서 전투적 형태로 돌파하는 방식으로는 삼성 노동자들 속으로 파고들기 힘들다”고 분석했다.
개별 가입과 동시에 교섭권 가져10월16일 오전 현재 금속노조 가입 노동자들은 11명으로 줄었다. 그 사이 6명이 회사에 설득돼 천안공장으로 옮기기로 했기 때문이다. 지난 10월13일부터 이들을 무단결근 처리한 삼성SDI는 다음주 초 징계위원회를 열겠다는 통보까지 마친 상태다. 금속노조는 산별노조이다. 노동자들이 직접 가입하면 노조설립 절차 없이도 금속노조가 사용자인 삼성SDI에 단체교섭 등을 요구할 수 있다. 앞으로 조합원 11명의 금속노조 삼성SDI지회까지 만들어져 삼성 최초의 노조가 생겨날지, 아니면 삼성 쪽에서 그동안 그래왔듯 노동자들을 완벽하게 ‘설득’(?)해낼지 아직은 안갯속이다.
임주환 기자 eyeli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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