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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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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유해 특별법을 만들자”

726호 ‘갈 곳 없는 학살 유해’ 보도 뒤
국회 행정안전위 소속 의원24명 설문조사, 절반이 특별법 동의
등록 2008-09-25 18:28 수정 2020-05-02 04:25

1950년 10월 이유 없이 끌려가 경찰 등의 총에 맞아 숨진 고양시 금정굴 160여 구의 유해, ‘보도연맹’ 사건으로 총에 맞아 그대로 흙 속에 묻혀 있던 충북 분터골의 110여 구의 유해 등 모두 990여 구의 민간인 학살 유해들이 발굴된 뒤에도 갈 곳이 없는 상태다. 이들 유해는 서울대 시신보관실, 충북대 유해발굴센터 등에 나눠져 안치돼 있다. 은 지난 726호(2008년 9월1일치)에서 ‘학살 유해 990구 갈 곳이 없다’는 기사를 통해 이들 유해의 현황을 보도한 바 있다. 이들 유해가 갈 곳을 찾을 수 있을까.

1950년 10월 고양경찰서 경찰관들에게 끌려가 학살당한 뒤, 1995년 유족의 주도로 발굴된 160구의 유골이 마땅히 보관할 곳을 찾지 못해 서울대 시신보관실에 방치돼 있다.

1950년 10월 고양경찰서 경찰관들에게 끌려가 학살당한 뒤, 1995년 유족의 주도로 발굴된 160구의 유골이 마땅히 보관할 곳을 찾지 못해 서울대 시신보관실에 방치돼 있다.

24명 중 19명 “국가적 차원 대책 필요”

관련 법안을 심사할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의원 24명에게 ‘발굴 유해 처리’에 대해 물었다. 24명 중 19명의 의원이 “국가적 차원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했다. ‘입법 또는 법 개정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가장 많았다. 11명의 의원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을 개정하거나 ‘6·25 전사자 유해 발굴 등에 관한 법률’처럼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 및 처리를 정하는 별도의 특별법을 만들어 유해 처리 주체와 처리 방법 등을 법으로 뒷받침해야 한다”고 답했다. 5명의 의원은 “문제를 국방부로 이관해서 처리해야 한다”고 답했고 2명의 의원은 “과거사 연구재단 등 기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에서 정하는 후속 대책에 대한 논의를 진전시켜서 해결해야 한다”고 답했다. 기타 의견으로 유정현 의원(한나라당)은 국방부로 이관해서 처리하되 장기적으로 입법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은 과거사 연구재단을 설립해 △위령사업 및 사료관 운영·관리 △추가 진상조사사업 지원 등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지만 ‘의무조항’이 아니어서 법 통과 이후 논의가 이루어진 적이 한 번도 없다. 이때문에 다수의 의원이 문제해결에 적극적인 의지를 표현한 것은 고무적이다.

조진형 행정안전위원회 위원장(한나라당)은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에서 고통을 당한 유족들이 엄연히 살아 있고, 이들 유족의 유해가 발굴됐음에도 따로 처리되지 않은 것은 가슴 아픈 일”이라며 “과거사 문제가 아니라 유가족이 뼈아프게 느끼고 있는 현실, 즉 당대의 문제인 만큼 이에 대해서 입법을 하든 법 개정을 하든 시급한 대책이 필요하다”며 문제 해결에 대한 강한 의지도 표명했다.

명확한 반대 입장을 밝힌 의원은 없었고, 24명 중 나머지 5명은 응답을 하지 않거나 “사안을 잘 모른다”고 답했다. 신지호(한나라당), 안경률(한나라당), 이인기(한나라당), 이용삼(민주당) 등 4명의 의원은 답을 하지 않았고 권경석 의원(한나라당)은 “아직 업무보고를 받지 못해 사안을 잘 모르며 그에 대한 입장이 정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단지 발굴된 유해의 처리를 넘어 민간인 학살 유해를 새롭게 발굴하기 위해 별도로 법을 만들거나 법을 개정해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을 법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였다. 응답한 19명의 의원 중 절반이 넘는 12명의 의원이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기본법’을 개정하거나 ‘6·25 전사자 유해의 발굴 등에 관한 법률’처럼 민간인 학살 유해를 발굴할 수 있도록 별도의 특별법을 만들어 민간인 유해 발굴을 원활하게 추진해야 한다”고 밝혔다. 현재 민간인 유해를 발굴을 뒷받침 하는 법률이 없어 관련 입법이 돼야 억울하게 땅속에 묻힌 유골이 빛을 볼 수 있다. ‘과거사 연구재단 설립 논의 본격화’(2명) 등 다른 대안을 내놓거나 “좀더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4명)도 있었다. 민간인 유해 발굴에 대한 입법을 반대한 의원은 김성조 의원(한나라당) 1명이다. 김 의원은 “이미 발굴된 유해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논의는 시급한 일”이지만 “추가로 ‘보도연맹 사건’ 등 특정 집단에 의해 저질러진 과거사와 관련한 유해 발굴만 특정해서 하는 것은 ‘국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와는 거리가 먼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추가 발굴을 법적으로나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데 부정적 입장을 표명했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의원 설문조사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의원 설문조사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김성조 의원만 유해 발굴 입법 반대

그간 우리 사회는 진상 규명 차원에서만 과거사를 논의했다. 책임자 처벌이나 국가의 배상, 보상, 피해 유족의 명예 회복 등은 ‘법적으로 뒷받침하지 않은 채 사안마다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지는 데 그쳐 과거사 정리가 완결되지 않았다.

등을 쓴 역사학자 이용우씨는 “과거 청산이란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첫째, 암울했던 과거와 그 시기의 범죄 행위에 대해 확실하게 진상을 규명하기, 둘째 가해자 혹은 책임자를 처벌하기, 셋째 피해자 혹은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하고 배상(또는 보상)하기, 넷째 그러한 과거가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기념사업을 벌이거나 올바른 역사 교육을 행하기로 나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지금 첫 번째 ‘진상 규명’만 어설프게 얘기하다가 ‘가해자 처벌 논의’는 금기가 된 채로 세 번째, 네 번째 단계로 논의가 나아가지 못하고 멈췄다”라고 말했다. 이씨는 “그만큼 얕은 역사 인식과 사회의 과거사 정리에 대한 철학 부재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안병욱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위원회 위원장은 “우리 사회가 과거사를 정리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주장은 해왔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과거사를 정리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역량이 축적돼 있지 않아서 유해들이 방치되는 안타까운 현실이 벌어졌다”며 “ 조사를 통해 18대 국회에서 당을 불문하고 ‘민간인 유해 처리와 발굴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이 나왔다니 다행으로 생각한다”며 더 구체적이고 빠른 국회의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그러나 여전히 논란이 될 수 있는 부분은 ‘과거사 정리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의 차원이다. 14개 과거사 위원회 통폐합은 이명박 정부 인수위 시절 “14개 과거사 위원회를 통폐합한다”는 발표가 있은 뒤 논란의 핵심이 돼왔다. 그러나 이번 조사 결과 ‘모든 위원회를 통폐합해 하나의 기관에서 과거사 문제를 정리해야 한다’고 답한 의원은 7명에 불과했다. 11명의 의원들이 “필요한 위원회들에 한해 기간을 연장해 충분히 사업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한다”(8명), 또는 “종료 시한을 보장해 현재 진행 중인 과거사 정리 사업을 마무리하도록 한다”(3명)고 답했다. 한 민주당 의원은 “과거사 위원회 통폐합은 관련 유족들이 반대하고 각 지역구 의원들이 관련 유족을 외면할 수 없어 호락호락하게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며 ‘과거사 위원회 통합’이 관철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과거사 위원회 통폐합은 어려울 것”

이영호 인하대 교수(한국사)는 “과거사를 정리하는 것은 ‘효율’이나 ‘정권의 이념’에 따라 결정될 문제가 아니”라며 “정권을 떠나 원칙을 만들어야 하고, 이번 국회에서 그런 원칙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과거사 정리가 ‘진상 규명’ 차원을 넘어서서 유족의 아픔을 달래고 재발을 방지하는 진정한 ‘화해와 정리’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까.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의원들의 답변이 ‘허언’이 되지 않길 기대한다.

글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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