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마티(카자흐스탄)=글·사진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5월14일 카자흐스탄 알마티. 푹푹 찌는 하루였다. 겨울이 지나면 바로 여름이라는 이곳에선 이미 한여름을 맞은 듯했다. 이날 온도는 섭씨 30도를 넘어 40도까지 치솟았다.
알마티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먼지가 풀풀거리는 비포장도로를 20~30분쯤 달려가니 덩그러니 공장 하나가 있었다. ‘신-라인’이라는 아이스크림 회사의 공장. 고려인 3세인 안드레이 신이 사장이다. 그는 직접 공장을 소개해줬다. 자긍심에 가득 찬 모습이었다.
처음 들어간 곳은 아이스크림과 빙과 등을 만든 뒤 저장해놓는 냉동실. 바깥 온도는 40도를 육박하고 있었지만, 냉동실 안은 영하 25도의 한겨울이었다. 1분도 안 돼 오들오들 살이 떨렸다. 카자흐스탄은 제조업이 발달돼 있지 않아, 빙과를 만들고 우유를 저장하는 주요 설비를 독일과 스웨덴 등 유럽에서 수입해 쓰고 있었다.
현재 많은 카자흐스탄의 부자들은 부동산이 폭등한 덕에 떼돈을 벌었다. 일부는 자원사업과 금융으로 돈을 모으고 있다. 하지만 제조업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그런 가운데 신 사장은 우직하니 제조업에 열정을 쏟아붓고 있다.
공장 소개를 마친 뒤,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같이 먹었다. 신 사장은 찬물을 시키더니 그 물에 밥을 쓱쓱 말아서 먹었다. 고려인들은 이를 ‘밥이물이’라고 불렀다. 단어에 조사가 붙은 채로 하나의 새 단어를 형성한 셈이다. 1937년 10월 연해주에서 이곳까지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이 그동안 고국과 교류가 단절된 상황에서도 이어온 음식 문화요, 우리말의 흔적이었다.
한국말도 잘 모르는 그가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 또한 빙과였다. 그는 2006년 한국을 방문해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가 연 식품박람회에 참가했다. 이곳에서 한 행사 도우미가 건네준 빙그레의 ‘더위사냥’이라는 빙과를 처음으로 봤다. 우유로 만든 아이스크림이 주종인 카자흐스탄에선 빙과가 별로 없다. 반으로 부러뜨려 나눠먹는 것도 신기했다. 그는 “이거다 싶었다”고 했다.
신 사장은 카자흐스탄 투자자문업체 리타 등의 도움을 얻어 빙그레와 기술제휴를 맺고 더위사냥을 카자흐스탄에서 팔고 있다. 제품 이름은 러시아말로 폭탄이라는 뜻의 ‘봄바’로 지었다. 카자흐스탄의 아이스크림 시장 규모는 1억2천만달러(약 1200억원)에 이른다. 신 사장 회사의 시장점유율은 30% 정도다.
신 사장은 “카자흐스탄에는 카자흐, 러시안 등 많은 인종이 살고 있는데 고려인들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하지만 사업을 열심히 한다는 평판을 듣는다. 일 잘하고 근면하기 때문이다. 고려인인 것이 자랑스럽다”며 웃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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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9일 한겨레 그림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