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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보민영화에 뿔난 분들 오세요

등록 2008-05-02 00:00 수정 2020-05-03 04:25

상영회 연 인터넷카페 ‘저지 연대’의 엄마·아빠들, “스스로 겪은 것이기에 너무 절실합니다”

▣ 글·사진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때이른 봄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4월19일 오후 1시께, 서울 대학로에 위치한 녹색교육센터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여기가 혹시 …, 맞죠?” 또는 “저, 영화 보러 왔는데요”라며 사무실 문을 밀고 들어온 이들은 대개 갓난아기를 안고 있거나 대여섯살짜리 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서로가 초면인 듯 어색한 인사가 오갔다.

시위하다 ‘선거법 위반’ 조사받기도

“안녕하세요. 저는 ○○○라고 합니다.”

“아, 예, 반갑습니다. 저는 ○○○입니다.”

이들은 인터넷 카페 ‘의료보험 민영화 저지 연대’(http://cafe.daum.net/minyengbande) 회원들이었다. 정부가 건강보험 당연지정제 폐지와 의료기관 영리법인화 허용 등을 검토 중인 가운데, 민영 의료보험을 중심으로 의료산업화가 진행된 미국의 현실을 들춰낸 다큐멘터리 영화 를 함께 보러 모인 것이다. 20명가량의 참석자 모두 심각한 표정으로 2시간 동안 영화를 봤으며, 때로는 한숨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이날 상영회를 준비한 이는 ‘저지 연대’ 카페지기인 문광덕(33)씨. 문씨는 정부가 추진 중인 보건의료 정책의 문제점을 알리기 위해 퇴근 뒤 잠깐씩 짬을 내어 1인 시위에 나서기도 했다(704호 사람이야기 ‘의료보험 민영화, 아빠가 뿔났다’). 평범한 직장인인 그는 심장병을 앓고 있는 아들 건희(5) 때문에 병원을 자주 드나들며 자연스레 새 보건의료 정책의 문제점을 깨닫고 ‘행동’에 나서게 됐다고 한다.

문씨는 “사실 1인 시위를 하다가 ‘총선에 영향을 준다’는 이유로 종로경찰서에 연행돼 선거법 위반 혐의로 조사까지 받았다”며 “그래도 활동을 멈출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그의 고민은 “좀더 많은 사람들과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더 적극적으로 뭔가를 해보자”는 쪽으로 옮겨갔고, 그 결과 지난 4월1일 ‘저지 연대’ 카페가 개설됐다. 4월24일 현재 회원 수가 970명을 넘어섰다.

만들어진 지 한 달도 채 안 된 ‘저지 연대’ 카페가 첫 번째 오프라인 활동으로 상영회를 열기까지는 ‘건희 아빠’ 문씨 말고도 ‘영빈 아빠’ 오승훈(28)씨와 ‘재현맘’ 신근정(35)씨가 큰 구실을 했다. 이 세 사람은 영화 상영회에 앞서 4월17일 저녁에 모여 머리를 맞대고 앞으로의 활동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고 한다. 문씨가 여러 시민단체와 정당 등에 상영회 소식을 알리는 등 주무를 맡고, 오씨는 사용자제작콘텐츠(UCC)를 비롯한 미디어 쪽 활동을 담당하기로 했다. 녹색연합 상근 활동가로 육아휴직 중인 신씨는 단체활동 경험을 살려 구체적인 카페 운영의 길라잡이 구실을 하기로 했다. 신씨는 또 상영회가 열리는 장소로 녹색연합 부설 기관인 녹색교육센터를 빌릴 수 있도록 다리를 놨으며, 오씨는 UCC 제작을 위해 상영회 날 캠코더를 들고 다니며 서로 대화를 나누는 이들을 영상에 담았다.

이렇듯 “건강보험 민영화를 막아내자”며 의기투합한 세 명의 공통점은 모두 병을 앓는 아이들의 엄마·아빠라는 점이다. ‘영빈 아빠’ 오씨에게는 문씨와 마찬가지로 선천성 심장기형을 앓고 있는 생후 5개월 된 아들이 있다. 태어난 뒤 지금까지 병원에 낸 본인부담금만 2천만원가량에 이른다는 오씨는 “건강보험 적용이 안 됐다면 1억원에 가까운 돈을 부담했을 것”이라며 “(건강보험 혜택을) 스스로 겪은 것이기에 너무 절실했고, 그래서 (이런 활동에)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활동 앞장 선 세 명의 공통점

‘재현맘’ 신근정씨의 사정도 비슷하다. 9개월 된 재현이는 심장의 심실 사이 벽에 구멍이 난 심신중격결손증을 앓고 있다. 아이가 커가면서 구멍이 저절로 메워질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수백만원이 드는 수술을 해야 한다.

이들 말고도 이날 행사에 참석한 이들 상당수는 가족 중에 환자가 있었다. 김태형(38)씨는 “어머니는 당뇨를 앓으시고 아버지는 암에 걸려 다음주에 수술을 받으실 예정인데, 지금은 진료받고 약을 지어도 몇천원만 내면 되지만 정부 계획대로 제도가 바뀌면 이런 것은 꿈도 못 꿀 것”이라며 “국민 생존권에 영향을 미치는 이런 움직임을 가만히 둬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이 자리에 오게 됐다”고 말했다.

현재 정부는 건강보험과 관련한 종합적인 정책 방향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민영 의료보험 강화 쪽으로 가닥을 잡아나가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 대통령직인수위는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모든 의료기관에서 정당한 사유 없이 건강보험을 거절할 수 없도록 하는 제도) 완화 방침을 밝혔다가 국민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또 기획재정부는 지난 3월10일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민간보험 활성화와 영리의료법인 도입 등에 대해 검토하고 세부안을 마련해 올해 안에 관련 법개정까지 마치겠다고 보고했다. 법제처 또한 3월25일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영리의료법인 허용의 전단계로 의료채권 발행에 관한 법률을 6월 정기국회에서 처리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런 정부 방침에 대한 회원들의 태도는 완강했다. 상영회를 마친 뒤 열린 앞으로의 활동을 논의하는 자리에서는 “민영화 정책 반대 UCC를 최대한 많은 곳에 살포하자”, “한국판 를 만들어보자”, “축제에 맞춰 대학에서 상영회를 열자”, “건강보험 정책에 반대하는 내용을 담은 배지를 만들어 팔자” 등 다양한 아이디어를 쏟아졌다. 문씨를 소개한 기사 제목인 ‘아빠가 뿔났다’를 본떠 “월드컵 응원전에 등장한 바 있는 빨간색 뿔이 달린 머리띠를 매고 거리행진을 하자”는 재밌는 제안도 나왔다.

결국 이 자리에서는 상영회를 계속 이어나가고, 정부 보건의료 정책에 반대하는 활동을 꾸준히 해나가자는 결론이 내려졌다. 영화 상영회는 서울 수서종합복지관으로 자리를 옮겨 진행하기로 했다. 문씨는 “최대한 많은 사람의 참여가 중요한 것 같다. 각 정당과 사회단체들에도 이런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알려나가겠다”고 말했다. 참여연대와 보건의료노조 등 100여 개 단체가 진행 중인 ‘함께 봐요 ’ 캠페인과는 ‘따로 또 같이’ 진행되는 ‘ 보기 운동’이 시작된 셈이다.

‘새로운 집회 방식’ 공모 중

5~6월 서울 시내에서 의료보험 민영화 반대 집회도 열 계획이다. 문씨는 “환우(병을 가진 이)들과 시민들이 최대한 많이 참석할 수 있도록 하자”고 말했다. ‘집회 경험자’ 대운하반대시민연합 관계자들은 집회 허가와 장소 선정 등 구체적인 ‘노하우’를 제공하기로 했다. ‘저지 연대’ 카페 게시판에도 시민들과 함께할 수 있는 ‘새로운 집회 방식’을 공모하는 글이 띄워졌다.

평범한 사람들의 이런 자발적인 움직임에 기존 시민단체 등에서도 적극적인 동조의 뜻을 나타냈다. 상영회에 참석한 건강세상네트워크 이정례 건강보건팀장은 “의료보건 단체들의 연합체인 건강연대 차원에서 보기 운동을 추진 중이며, 전 국민을 상대로 한 캠페인과 건강보험 민영화에 따른 피해 사례 발표회를 준비 중”이라며 “이렇게 자발적인 움직임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앞으로 어떻게 함께 해나갈지 고민해야겠다”고 말했다. 자리를 함께 한 진보신당 최은희 조직팀장도 “적극 찬성한다. 지역 조직별로 보기 운동에 나설 계획이며, 건강보험 지킴이 운동을 어떻게 해나갈지도 고민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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