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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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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막함의 끝에서 뛰어내리다

등록 2008-02-01 00:00 수정 2020-05-03 04:25

자살한 태안 주민 3명의 삶… 자원봉사의 기적 뒤엔 “살 희망이 없어진” 사람들의 고통이

▣ 태안=글 김경욱 기자dash@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우리 아들 한번 안아보자.” 지창환(55)씨는 지난 1월18일 아침 8시께 아들 지현규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현규씨가 막 아침식사를 마치고 출근하려던 순간이었다. 아버지는 30년이 넘도록 한 번도 아들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현규씨는 전날 장염으로 잠을 못 자 신경이 예민하기도 했지만 어색해서 아버지의 두 팔을 뿌리치고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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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오후 1시부터 충남 태안군 태안읍 동문리 태안군수산경영인회관 옆 도로에서는 태안 유류피해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대정부 결의대회’가 열렸다. 공무원인 현규씨는 집회에 앞서 현장을 둘러봤다. 그는 집회가 시작될 무렵 근무지인 태안 근흥면사무소로 돌아가기 위해 차를 돌렸다. 그 순간 집회장에 있던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는 거듭 “미안하다”고 했다. “왜 그러시냐”는 물음에 “그냥 미안하다”고만 했다.

아버지와 통화하고 1시간이 지났을 무렵 현규씨의 이모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위독하니 빨리 태안의료원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정신없이 병원으로 달려갔다. 온몸에 화상을 입은 아버지는 농약을 마신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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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을 위한 희생이 분신이었다니

지창환씨는 이날 오후 1시50분께 집회 현장에서 분신자살을 시도했다. 심상정 민주노동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연설을 막 시작할 때였다. 지씨는 집회 시작 때부터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주민들은 “무슨 술을 그렇게 마시냐”고 했다. 지씨는 1시47분께 비틀거리며 연단으로 올라갔다. 주민 문승국(44)씨는 “지씨가 연단에 올라가기 전에 물을 몸에 붓고, 파란색 음료수를 마시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연단 가운데로 발걸음을 옮기는 지씨를 제지했다. 그 순간 지씨는 라이터를 켰고 몸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지씨가 몸에 부은 것은 시너였고, 그가 마신 것은 그라목손이라는 농약이었다. 그의 겉옷 주머니에서는 시너와 농약이 들어 있던 생수병 2개가 발견됐다.

화상도 심했지만 농약을 마신 것이 치명적이었다. 세 차례의 위세척도 소용이 없었다. 밤 10시께 지현규씨는 병상에 누워 있는 아버지의 눈을 바라봤다. 간절히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농약을 마신 아버지는 입 안과 목에 상처가 깊었다. 아버지는 입을 움직였지만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다음날인 19일 아침 8시7분께 숨을 거두었다. 현규씨는 아버지를 안았다. 꼭 하루 전 아버지에게 안기지 못했던 것을 사죄라도 하듯.

고인이 된 지창환씨는 생전 태안읍 조석시장에서 횟집을 겸한 수산물 가게를 운영했다. ‘명화수산’이라는 상호는 부인 최명화(51)씨의 이름에서 따왔다. 지씨는 매일 아침 8시에 시장으로 나가 어항 물을 갈고 가게 문을 열었다. 20여 년간 운영한 터라 단골 손님이 많았다. 해마다 태안에 올 때면 꼭 찾아오는 손님들도 있었다. 그리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부족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지난해 12월7일 발생한 ‘허베이 스피리트호 기름 유출 사건’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사고 뒤 시장을 찾는 손님들의 발걸음은 뚝 끊겼다. 영업은 하고 있었지만 폐업과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지씨는 사고 뒤 매일 아침 횟집이 아닌 바다로 나갔다. 기름때를 닦아내기 위해서였다. 술을 마시는 날이 많아졌다. 부인 최명화씨는 “남편은 기름 유출 사고 뒤 잠을 잘 못 이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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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씨는 분신하기 나흘 전 태안군청 광장에서 군민장으로 엄수된 이영권(66)씨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날 저녁 그는 부인에게 보상 문제를 이야기하며 “나도 태안을 위해 뭔가 희생해야겠다”고 말했다. 그 희생이 목숨일 줄은 아무도 몰랐다.

아들 현규씨는 1월21일 아버지의 영결식을 태안의료원 장례식장에서 가족장으로 치렀다. 이웃들은 유류피해 특별법과 보상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일 수 있게 군민장으로 치르자고 했다. 현규씨는 그들에게 “평소 아버지의 삶처럼 조용하게 보내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몇몇 사람들은 “삼성에서 돈 받은 게 아니냐”고 비아냥거렸다. 영결식 뒤 장지로 향하기 전 영구차를 명화수산 앞에 세웠다. 노제를 지내기 위해서였다. 현규씨는 소주와 동치미를 올렸다. 아버지는 평소 소주를 마실 때면 꼭 동치미를 안주로 삼았다. 조석시장 상인들은 애도의 뜻으로 지씨가 사망한 날부터 닷새 동안 모든 상점 문을 닫았다.

기름 유출 사고는 태안 주민들의 생계와 삶의 터전뿐만 아니라 목숨까지 앗아갔다. 언제부턴가 ‘사람의 아픔’은 잊혀졌다. 그 자리를 ‘바다의 아픔’과 ‘자원봉사자들의 기적’이 대신했다. 지씨가 분신하기 전 장례를 치른 이영권씨는 이번 사고로 처지를 비관해 자살한 첫 번째 주민이다.

“무허가 굴 양식은 보상 받을 수 없다”

이영권씨는 태안군 소원면 의항2리에서 나고 자랐다. 1957년 모항국민학교(현 모항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바다로 나가 한평생 굴을 땄다. 굴양식을 하기 전에는 맨손으로 바다에서 굴과 조개를 캤다. 양은 많지 않았다. 이씨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주민들은 생활고에 허덕였다. 주민 김조순(64)씨는 “굴양식을 하기 전에는 빚이 없는 주민이 없었다”고 말했다.

1980년 굴양식을 하면서 의항2리의 형편은 나아지기 시작했다. 이영권씨는 갯벌에 참나무를 박고 각 참나무를 줄로 엮은 뒤 홍합 껍데기의 구멍을 내 그 줄에 꿰었다. 참나무를 쓴 것은 일반 나무와 달리 바닷물에 잘 썩지 않아서였다. 홍합 껍데기에는 어린 굴을 붙였다. 이렇게 붙인 굴은 3개월이 지나면 수확이 가능했다. 이씨는 부인 가재분(61)씨와 함께 굴을 따 팔았다. 그렇게 해마다 3천여만원 정도를 벌어 삼남매를 키웠다. 그러나 삶의 터전은 기름 유출 사고로 만신창이가 됐다. 하루아침에 수입이 끊겼다. 바다가 다시 깨끗해질 때까지 생계를 꾸려나갈 방법이 없었다.

이씨는 지난해 12월28일 태안문화원 광장에서 열린 해양수산부 주최 주민설명회에 참석했다. 피해 보상이 궁금해서였다. 이씨는 그곳에서 “무허가 지역에서 굴을 양식한 주민은 보상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의항리 주민들은 허가 지역보다 무허가 지역에서 굴을 많이 키웠다. 허가 지역은 그리 넓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씨의 친구인 김상선(67)씨는 “영권이가 설명회 이후 ‘이제 살 희망이 없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1월10일 아침 8시10분께 자신의 집 안방에서 농약을 마시고 저녁 7시50분께 사망했다. 봄이 오면 결혼식을 올려주겠다는 막내아들과의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태안군 근흥면 마금리의 김용진(73)씨도 이번 사고로 인한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마금리를 찾은 1월22일 매봉산 입구에 차를 세웠다. 눈이 내려 차량 진입이 불가능했다. 차에서 내려 염전 방향으로 50여 분을 걸어 들어가니 김씨의 집이 보였다. 하우스 옆에 허름하게 세워진 집은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좁은 마당에는 녹슨 낫과 해진 빗자루, 까맣게 때가 낀 농약통 등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곤궁한 살림이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김씨는 지난 40여 년간 갯벌에서 바지락을 캐며 생계를 이어왔다. 주민 송영산(77)씨는 태안 갯벌을 “황금어장”이라고 말했다. 양식을 하지 않아도 1년 중 물이 빠질 때는 언제나 자연산 바지락을 캘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매달 14일 정도 갯벌로 나가 바지락을 캤다. 가격이 좋은 날에는 100kg에 10만원을 받을 때도 있었다. 보통 주민들은 하루에 100kg을 캤지만 근력이 약한 김씨는 40kg도 캐지 못했다. 한 달에 손에 쥐는 돈은 40만원이 안 됐다. 그것으로 허리와 무릎이 아픈 부인 함영자(72)씨의 병원비를 대고 약을 샀다.

바지락 죽자 부인 약값 대기도 힘들어

거동이 불편한 함씨는 김씨가 바지락을 캐러 나가면 지팡이를 짚고 따라나섰다. 직접 바지락을 캘 수는 없었지만 남편이 캐온 바지락을 크기별로 고르는 일은 할 수 있었다. 부부는 남들보다 먼저 갯벌로 나갔다. 부인이 빨리 걸을 수 없어서였다. 이씨가 갯벌에서 바지락을 캐면 부인은 먼발치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봤다. 기름 유출 사고가 터지자 김씨는 더 이상 바지락을 캘 수 없게 됐다.

김씨는 사고 뒤 주민들과 기름때를 제거했다. 작업에 참여한 남자 주민은 7만원, 여자 주민은 6만원의 인건비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인건비는 방제작업에 주민을 동원한 방제업체나 태안군이 사고 선박의 보험사인 영국 P&I에 청구한 뒤 주민들에게 지급한다고 했다. 사고 발생 40여 일이 지났지만 인건비는 지급되지 않았다. 수입이 없어진 김씨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장 송기필(67)씨를 찾아가 국민기초생활보장수급권자 신청을 도와달라고 했다. 1월12일 부인 함씨는 근흥면사무소에서 신청서를 작성했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15일 저녁 7시30분께 김씨는 자신의 집에서 농약을 마셨다. 주민 송아무개(45)씨는 “수입이 없어진 김씨가 부인의 병원비와 당장의 생계비를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민 세 명을 잃은 태안에는 “무한책임 무한보상 삼성그룹 책임져라” “바다는 통곡하고 있는데 정부는 뭐하고 있나” 등의 플래카드가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사고 뒤 50여 일이 다 돼가도록 주민들은 지원금 한 푼 받지 못했다. 태안의 분노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1월21일 기름 유출 사고를 수사한 검찰은 삼성중공업 예인선과 유조선 양쪽에 모두 과실이 있다고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주민들은 “삼성 봐주기식 수사”라고 반발하며 23일 서울역 앞에서 집회를 벌였다. 서울 태평로 삼성 본관 앞에는 기름에 우염된 굴과 우럭을 뿌렸다. “이건희 일가는 미술품을 팔아서라도 보상하라”는 절규에는 날이 서 있었다.

기름 유출 사고는 인재다. 사람이 불러일으킨 재앙에 자연이 파괴됐고 그것이 다시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굴과 조개가 입을 벌린 바다와 사람이 죽은 마을에는 적막감이 흘렀다. “벌써 세 명이 죽었어.” 1월22일 의항리에서 만난 70대 할머니는 겁에 질려 있었다. 이날 기름으로 오염된 검은 바다에는 하얀 눈이 내렸다.



검찰의 삼성 봐주기 논란

‘쌍방 과실’로 규정되면서 사고 책임 명확히 가리기 힘들어

서해안 기름 유출 사고에 대한 검찰의 중간수사 결과가 발표된 1월21일. 사고 원인과 책임 규명을 기대했던 태안 주민들은 허탈감을 감추지 못했다. 문승국(44) 태안유류피해 투쟁위원회 사무처장은 “대한민국 검찰인지 삼성 법무팀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날 검찰은 기름 유출 사고를 삼성중공업 해상크레인 예인선단과 유조선 허베이 스피리트호의 ‘쌍방 과실’로 규정하고 양쪽 항해 관련자 5명을 업무상 과실과 해양오염방지법 등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그러나 핵심 사항에 대한 의혹은 해결되지 않았고, 사고 책임이 명확하게 가려지지 않아 보상 문제는 따지기 어려워졌다.
예인선은 사고 당일인 지난해 12월7일 악천후 속에서도 운항을 강행했다. 대산 해양청 관제센터의 무선 호출에도 응하지 않았다. 삼성중공업 상부의 무리한 운항 지시가 있었는지가 의혹의 핵심이다. 검찰은 선박 운항 책임부서인 해운부와 예인선단의 운항 일지, 통화 내역 등을 조사한 뒤 “운항 강행 지시는 없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수사 대상이 실무자 선에 그쳐, ‘삼성 봐주기’ 논란에 불을 지폈다.
태안 주민들은 사고 직후부터 삼성중공업의 중과실을 주장해왔다. 현행 상법은 고의 또는 무모한 행위로 인한 중과실이 입증되면 피해 규모가 3천억원이 넘더라도 무한 책임을 지도록 하고 있다. 검찰은 중간수사 발표에서 중과실 여부에 대한 판단은 보류하고, 예인선과 유조선의 ‘업무상 과실’만 인정했다. 중과실 여부를 민사소송에서 다루게 되면 피해 주민들은 지루하고 긴 시간을 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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