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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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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으리 지으리랏다, 흙집을 지으리랏다

등록 2007-03-23 00:00 수정 2020-05-03 04:24

흙으로 현대적인 공간을 만드는 젊은 건축가 신근식·이규봉씨

▣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2000년 광주 비엔날레. 전시관에 이르는 길 한가운데에 길쭉한 담이 세워졌다. 80m짜리 대형 흙담이었다. 콘크리트로 뒤덮인 세상에서 나고 자란 관람객들은 의아해했다. 시멘트로 벽을 세우고 황토를 바른 것이 아니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흙만으로 만든 담은 처음 보았으니까. 흙담은 전시회가 끝나고 해체됐다. 잘게 부서져 전시회장 주변에 뿌려졌다. 시멘트였다면 건축 폐기물이 되어 지금도 어딘가에 묻혀 있을 텐데 흙담에 쓰였던 흙은 다시 흙으로 돌아갔다.

시멘트나 철이 아닌 흙으로도 그에 못지않은 강도의 구조물이 가능하다면 흙으로 집을 짓지 못할 이유가 없다. 광주의 흙담을 세울 때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30대 중반의 젊은 건축가 신근식·이규봉씨는 이 점에 주목하면서 준비를 했다. 그리고 7년 뒤 ‘흙건축연구소 아키떼르’(www.architerre.org)를 열었다. 아키떼르는 건축(architecture)과 흙·땅(terra)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따왔으니 말 그대로 흙 건축이다.

시멘트에서 건강을 해치는 독성 물질이 나오고 흙으로 만든 집이 건강에 좋다는 것은 이젠 상식이 됐다. 흙건축연구소를 세운 두 사람이 혹시 ‘웰빙 바람’에 편승하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은, 두 사람이 최근 몇 년 사이 해온 작업과 이력을 보면서 대부분 걷혔다.

한양대 건축과 동기(90학번)인 이규봉·신근식 씨의 꿈은,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 건축으로 정평이 나 있는 기용건축 정기용 소장의 품에서 싹을 틔웠다. 광주 비엔날레의 흙담도 기용건축이 설계를 맡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기용건축에 몸을 담았던 두 사람이, 흙 건축에 관심이 많았던 정 소장의 영향을 받은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프랑스에서 발견한 흙 건축의 가능성

신씨는 기용건축에서 일하다 1997년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 그루노블 국립건축학교의 크라테흐 흙건축연구소에서 8년 동안 흙 건축을 공부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현대적인 흙 건축을 연구해오던 프랑스는 1985년 ‘일 다보’에 있는 집합주택단지를 개발하면서 임대주택 12동을 흙으로 지었다. 일 다보의 흙집에는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60여 가구가 살고 있고, 세계 곳곳에서 해마다 3만여 명이 다녀갈 정도로 살아 있는 흙 건축 전시장이 됐다. 신씨가 있던 크라테흐 연구소는 이 프로젝트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곳이었다. 신씨는 2004년 돌아와 무주 녹색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대학 부설 생태건축문화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했다.

프랑스와 독일 등 유럽과 남미에서 불기 시작한 흙 건축 바람은 고도 산업사회에 대한 자성에서 비롯됐다. 지구 온난화의 주범인 석탄과 석유 등 화석연료를 대체할 대안에너지를 연구하면서 화석연료 없이는 제조가 불가능한 건축자재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강도를 높이기 위해 흙의 고유한 성질을 포기한 시멘트도 언젠가는 고갈될 테고, 바닥이 보이기 시작할 즈음엔 지금처럼 싼 값을 유지할 수 없을 것으로 전망했다. 흙이 대안으로 떠올랐고 흙 건축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다짐벽·흙벽돌 보고 의구심 날려

이규봉씨는 기용건축의 무주 지역건축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건축에 대한 철학을 벼렸다. 정기용 소장은 이씨에게 “공공 건축가가 되라”는 주문을 반복했다. 의뢰인이 주는 돈으로 의뢰인이 원하는 집을 지어 파는 그러저러한 건축가는 되지 말라는 얘기였다. 이씨는 무주에서 관공서·복지시설·체육시설·주택 등을 짓는 30개의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건축가 정기용’을 배웠다.

“98년 무주군 안성면의 면사무소를 지을 때 일이에요. 이런 시설을 넣어달라고 결정되어 내려왔는데 소장님이 면사무소에 공중 목욕탕을 짓자고 거꾸로 제안을 했어요. 면 사람들을 만나니 주말이면 차를 대절해 큰 도시로 목욕하러 가는 게 불편하다고 했거든요. 결국 목욕탕이 있는 면사무소는 큰 성공을 거뒀고 공동체의 중심이 됐죠.” 이씨의 말이다.

두 사람의 꿈이 영글기 시작한 것은 1999년 이씨가 프랑스를 방문해 신씨의 작업현장을 보면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흙으로 집이 될까 의구심을 가졌던 이씨는, 거푸집에 흙을 붓고 다지는 과정을 반복해 만든 다짐벽, 굽지 않은 점토로 만든 흙벽돌을 이용한 건축 등 다양한 흙 건축 연구 성과를 눈으로 확인했다. 둘은 “우리도 하자”고 ‘작당’을 했다. 그리고 2000년께부터 기용건축을 통해 흙집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시행착오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강원도 영월의 ‘구인헌’이라 불리게 된 주택을 시작으로 몇몇 프로젝트가 성공을 거두면서 흙 건축의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경남 산청 둔철마을에서 주택을, 충북 제천에 있는 ‘간디학교’의 생활관(기숙사)을 흙으로 짓게 됐다. 두 사람이 참여하고 있는 작업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 이후에 살 김해 자택도 포함된다. 정기용 소장이 설계를 했고 이 중 일부가 흙 다짐벽 방식으로 지어졌는데 이들이 설계와 시공 부분의 기술 자문을 하고 있다. 흙 건축에 자신감이 붙으면서 각각 기용건축과 녹색대학을 벗어나 서울 망원동에 새 둥지를 틀고 김해와 제천 등을 오가고 있다. 신씨는 아키테르의 대표로 기술 연구와 자문 분야에, 이씨는 연구소장으로 설계와 감리를 맡기로 역할을 나눴다.

“흙집을 짓는다고 하면 새마을운동 이후에 사라져버린 초가집이나 토담집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걸 다시 짓는다면 그냥 복원이겠죠. 우리가 하는 작업은 전통의 재해석입니다. 예전에 주로 쓰였지만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 흙이라는 재료로도 현대적인 공간을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흙만을 쓰자고 고집하는 것도 아니고 흙을 쓸 수 있는 데에는 흙을 쓰자는 것입니다.”

신 대표와 이 소장은 새로운 길을 만들면서 가려다 보니 여러 벽에 부딪치고 있다. 흙 건축에 대한 법이 없는 것도 그중 하나다. 100㎡가 넘는 건물은 건축법에 따라 관공서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지붕의 무게를 버티는 구조물에 관한 건축법 규정에 흙은 없다. 시멘트, 철, 나무 등은 구조물로 인정하고 있다. 강도 등에 관한 시험평가서를 가져오라고 하는데 이를 평가할 기관이나 권위자가 없다. 같은 공법으로 외국에서 3층 이상을 지은 사례를 제시하면 이런 답이 돌아온다. “거기는 외국이잖아요.” 그래서 제천 간디학교의 생활관인 흙다짐벽 건물에는 허가를 위해 철골 구조로 시공하면서 공사비가 대폭 늘어났다는 게 이 소장의 설명이다. 돈을 주고 버릴 흙을 사가겠다면 고마워하다가도 집 짓는 데 쓴다고 하면 턱없이 값을 올려부르는 통에 마음고생을 하기도 했다. 신 대표는 “김해에서 적당한 흙을 발견했는데 노 대통령 집에 쓰일 흙이라고 알렸으면 몇 배 더 들 뻔했다. 유럽에 비해 전문 인력과 표준화된 흙 재료 등 인프라가 부족한 점도 건축비 인상 요인이다”라고 말했다.

전문가 아니어도 보수할 수 있어

흙집이 좋기만 할까. 여름에 비가 많고 계절에 따라 온도차가 큰 우리나라 환경에 맞는지 궁금했다. 신 대표와 이 소장은 흙이 포용성이 있고 탄력적이라고 답했다. 흙은 살아 있는 재료여서 잘 관리하지 않으면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속성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있지만 전문가가 아니어도 손쉽게 보수할 수 있는 것이 흙 건축의 장점이라며 100년 이상 된 전통 민가들을 사례를 들었다.

흙에서 희망을 찾는 두 사람의 꿈은, 속도와 효율성을 최상의 가치로 떠받드는 세상에 대한 반역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럿이 꾸는 꿈은 종종 현실이 된다. 훗날 한국 건축 역사에 관한 책에 ‘미래의 대안적 가치로서의 흙 건축은 망원동의 한 작은 사무실에서 출발했다’고 쓰일 날이 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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