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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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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더미 마을의 겨울나기

등록 2007-01-20 00:00 수정 2020-05-03 04:24

방화 뒤 집을 잃은 서울시 송파구 비닐하우스촌 주민들은 어디로 흩어졌을까…화훼마을은 갹출해 집짓고 장지마을은 컨테이너 집을 세워 함께 모여 있다네

▣글=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서울 지하철 8호선 복정역은 서울이 성남으로 이어지는 교통의 결절점에 터 잡고 있다. 복정역 앞으로는 탄천이 흐르고, 복정2교가 지나는 탄천의 작은 지류에 서울 도시 빈민들이 모여사는 비닐하우스촌 화훼마을이 있다. 마을에서 송파대로를 건너 잠실 쪽으로는 비닐하우스촌 장지마을이 (지난해 8월까지) 자리잡고 있었다. 화훼마을을 스치고 지나는 탄천의 작은 지류를 기준으로 마을 쪽은 서울, 개천 건너 저편은 경기도 성남시다.

1980년대 중반 서울 산동네 재개발 과정에서 밀려난 철거민들과,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의 주인공들과 그 아들딸들이 아직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서울의 끝자락에 자리잡았다.

“송파구 임대아파트를 달라”

장지마을에 대한 첫 ‘공격’이 시작된 것은 2006년 8월3일 오전 7시30분이었다. 이곳의 비닐하우스촌을 몰아내고 2008년 12월까지 ‘동남권 유통단지’를 만들어야 하는 SH공사(옛 서울시 도시개발공사)는 주민 11가구가 남아 투쟁을 벌이고 있던 장지마을을 강제 철거했다. 그때 은 철거된 장지마을 사람들의 사연을 소개하며 ‘장지마을의 마지막 여름’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주민들은 천주교 빈민사목위원회가 긴급 지원한 15평짜리 텐트 그늘에 숨어 찜통 같은 8월 더위를 받아내고 있었다. 김복수(72) 마을 부녀회장은 “철거 용역들이 갑작스레 닥쳐 갈아입을 옷을 챙기지 못했다”고 말했는데, 몸에서 나는 찌든 냄새가 역해 코를 막고 말았다. 앞서 마을에는 2004년 2월과 같은 해 6월 두 번 불이 나 13가구가 불에 타 사라졌다. 힘든 사연은 그뿐이 아니다. 주민들은 2001년엔 송파구와 법정에서 벌인 주소 찾기 투쟁 끝에 비닐하우스 터에 전입신고를 마칠 수 있었다.

두 달쯤 뒤인 2006년 10월7일엔 장지마을 맞은편 화훼마을이 다른 ‘공격’의 피해자가 됐다. 그날 새벽 3시50분께 불이 나 183가구 가운데 166가구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타버렸다. 10월7일은 추석 다음날이었다. 밤새 성남에 있는 다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돌아와 곯아떨어진 주민 천정수(67)씨는 “불이야”라는 소리에 깜짝 놀라 옷가지도 챙기지 못한 채 밖으로 뛰쳐나왔다. 화훼마을에서는 1990년 이후 지금까지 모두 네 번의 화재가 있었다. 1999년 1월19일 새벽 2시에 터진 불로 주민들의 비닐하우스 117채가 전소된 경험도 있다. 화훼마을 주민들은 적십자 긴급구호단이 지급한 회색 운동복을 단체 유니폼 맞춰입듯 차려입었고, 장지마을 주민들은 빈민사목위원회가 마련한 천막에 기대 “송파구에 있는 임대아파트를 달라”는 투쟁을 두 달 넘게 이어갔다. 압도적인 불행 앞에서 송파대로를 사이에 둔 두 비닐하우스촌 주민들의 삶은 서로 다른 듯 닮아 있었다.

컨테이너 밖에는 공사가 내던진 세간살이가…

해가 바뀌고 1월3일 찾아간 장지마을은 흔적이 깨끗이 지워져 있었다. 지난 여름 기사 제목은 그렇게 현실이 되고 말았다. 주민들의 간이천막이 서 있던 서울 송파구 장지동 708 일대에는 ‘동남권 유통단지’ 조성을 위해 굉음을 내뿜고 있는 포클레인만 가득했다. SH공사는 2006년 11월17일 주민들의 천막을 다시 한 번 강제 철거하고 주민들의 짐을 모아 서울외곽순환도로 고가도로 밑에 내팽개쳤다. 주민 이주남(61)씨는 “그놈들이 언제 들어온다 예고도 안 하고 쳐들어왔다”고 말했다. 행정대집행을 진행하려면 집행 책임자의 이름과 함께 철거 진행 날짜와 그에 들어가는 예상 견적액을 담은 대집행 영장을 미리 주민에게 보내야 한다. 이번 행정대집행은 엄연한 행정대집행법 위반이다. SH공사 관계자는 “날짜를 미리 공개하면 학생들이나 시민단체들이 모여들 것을 염려했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어디로 흩어졌을까. 그들은 흩어지지 않았다. 그들의 새 보금자리는 SH공사가 고용한 철거용역들이 짐을 내던진 서울외곽순환 고가도로 밑이었다. 주민들은 가락시장, 오금동, 일원동의 찜질방에서 밤을 지새면서 그해 11월28일부터 컨테이너로 집을 지었다. 그 와중에 2가구가 떨어져나가 남은 사람들은 7가구 9명이다. 천주교 빈민사목위원회가 500만원을 지원했고, 남은 7가구에서 100만원씩 갹출했다. 주민들의 컨테이너 밖에는 SH공사가 내던진 주민들의 냉장고·옷·가구·그릇 등 크고작은 세간살이들이 뒹굴고 있었다. 컨테이너에는 수돗물이 나오지 않아 주민들은 옆에 있는 마음씨 좋은 고물상 주인의 수도를 같이 쓴다. 빨래는 근처 빨래방에서 한 번씩 해오는데, 전화순(70)씨는 “한 번 다녀오는 데 1만3천원”이라고 했다. SH공사 박기철씨는 “건설교통부와 송파구에서 주민들의 컨테이너를 다시 철거하라는 요구가 빗발치고 있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대부분은 가락시장에서 하루 일해 하루 벌어먹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송파구 내에 임대아파트를 달라”고 주장하는 데 견줘, SH공사는 “임대아파트 입주권은 줄 계획이지만, 송파구에는 물량이 없다”며 맞서고 있다.

다시 찻길 건너 화훼마을에서는 화재 복구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주민들은 불에 탄 잿더미를 깨끗이 치우고 각자 돈을 내 다시 집을 지었다. 한때 땅 주인(화훼마을 터는 사유지다)들이 서울시와 한국전력에 물과 전기를 넣지 말라는 요구를 했지만, 주민들의 반발에 밀려 물러서고 말았다.

400만원을 들여 6개 화재 경보기 설치

지난 석 달 동안 화훼마을 주민들은 끔찍한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마을의 두 번째 고령인 최효심(사망 당시 90살) 할머니가 화재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숨졌고, 최고령인 천성남(102) 할머니는 치매가 더 심해졌다. 그는 자다가 깜짝깜짝 일어나 “불이야”를 외친다고 한다. 채 쉰이 되지 않은 노도길씨는 시멘트 위에 여름 텐트를 치고 자다 건강이 악화돼 12월6일 일터 화장실에서 갑작스레 쓰러져 숨졌다. 그는 마을 부녀회장에게 “요새 추운 바닥에서 자서 그런지 몸이 아프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고 한다. 기자가 찾은 화훼마을에서 주민들은 원자룡(42)씨의 비닐하우스 집에 쓸 시멘트에 모래를 섞고 있었다. 주민들은 갑작스런 불이 날 것에 대비해 400만원을 들여 마을 곳곳에 6개의 화재 경보기를 설치했다. 주민들은 충격에서 벗어나 다시 살아볼 용기를 내고 있었는데, 합법과 불법의 가장자리에 위태롭게 걸려 있는 그들에게 국가는 아득하고 멀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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