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시대 때 이전됐다가 박정희 때 제자리로 돌아온 슬픈 역사…군사정권이 콘크리트로 밀어붙인 복원 사업, 지금 또 해체 공사 중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역사학자 홍순민씨는 1999년 펴낸 에서 “경복궁 답사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작하는 게 좋다”고 적었다. 네거리에서 눈을 들어 북쪽을 보면 홍예문이 셋 뚫린 높은 석축에 2층짜리 우진각 지붕을 단 광화문이 위풍당당하고, 그 너머 우뚝 솟은 백악과 저 멀리 북한산 보현봉의 푸른 기운이 가슴속에 파고든다.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이고, 500년 동안 계속된 조선왕조의 얼굴이다.
그렇지만 광화문의 역사는 수난의 기록이다. 구한말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이 맨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근현대사의 비극을 압축해 담고 있다. 1395년 새 왕조와 함께 처음 만들어진 광화문은 200년 뒤 임진왜란(1592) 때 완전히 불타 사라졌고 그 뒤 270년 동안 중건되지 못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광화문을 다시 불러낸 것은 고종의 등극과 함께 대원군의 자리에 오른 흥선군 이하응이었다. 새 광화문은 1865년 경복궁의 재건과 함께 새 삶을 찾았고, 머잖아 다가온 왕조의 몰락과 함께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1912년께부터 일제는 경복궁을 허물고 그 터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만들 계획을 세웠고, 4년쯤 시간이 흐른 1916년 6월25일부터 삽질에 들어갔다.
저문 왕조의 상징, 이전 반대 여론 확산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1996년에 써낸 에서 “왕궁의 해체 작업은 심궁비원(深宮秘苑) 내에서 이뤄져 주민들의 눈에 띄지 않았지만 광화문만은 그렇게 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광화문은 여전히 저문 왕조의 상징이었다. 3·1 운동이 터진 것은 고종이 (독살 의혹과 함께) 숨진 직후였고, 6·10 만세운동이 터진 것은 순종이 숨진 뒤다. 는 광화문 철거 계획이 드러난 1921년께부터 해체 이전 공사가 끝난 1927년 9월15일까지 광화문 이전과 관련된 속보를 쏟아내며 억눌린 식민지 조선인들의 울분을 전했다.
“광화문을 헐어 없애면 안 된다”는 여론이 힘을 받기 시작한 것은 일본의 민속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잡지 의 1922년 9월치에 ‘없애버려지려고 하는 한 조선 건축을 위하여’라는 글을 발표한 뒤다. “역사를 위해서, 도시를 위해서, 특히 그 민족을 위해서 저 경복궁을 건져 일으켜라. 그것이 우리의 우의가 해야 할 정당한 행위가 아니겠는가.” 글을 읽은 사이토 총독은 ‘류’(柳)라는 성을 보고 분명 조선인일 것이라 생각하고 뒷조사를 시켰는데, 틀림없는 일본 사람임이 확인되자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는 1922년 8월24일부터 28일까지 글의 전문을 1면에 다섯 차례에 걸쳐 나눠 싣는 성의를 보였고, 광화문 철거는 총독부가 함부로 결정 내릴 수 없는 민감한 정치 문제로 변하고 만다.
총독부 청사 건립이 마무리되는 1926년이 다가오자 광화문 이전 문제는 다시 한 번 식민지 반도인들을 흥분시키는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다. 설왕설래하는 사이 철거 작업은 1926년 8월 초에 단행됐다. 총독부는 공사가 시작된 사실을 기자들에게 알리지 않았던 듯 1926년 8월9일치는 ‘광화문 해체, 수일 전 착수’라는 급박한 목소리의 단신을 보도하고 있다. 총독부는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의 북편담(현 국립민속박물관 입구)을 헐어 그 터에 광화문을 동향으로 이전 복원했다. 공사를 담당한 회사는 궁천조(宮川組)로, 연 인원 2만1천 명을 동원해 1927년 9월15일 공사를 마무리했다. 는 1927년 9월18일치에서 ‘남면에서 동향에 뼈와 살만 부활’이라는 제목의 기사와 함께 새로 이전 복원된 광화문의 사진을 애통한 어조로 전하고 있다. “집웅에 입힌 백회가 허얀 것이 늙은 얼골에 분칠을 한 것 가터 매우 서글퍼 보힌다.” 18년 뒤 조선은 해방을 맞았고, 5년이 지나 6·25가 터졌다. 대문은 전쟁으로 폭격을 맞아 문루가 불타 없어졌는데, 전쟁이 끝났는데도 대문은 흉물로 방치됐고, 서서히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갔다.
광화문으로 총독부 건물을 가려라
버려진 광화문에 다시 한 번 생명을 불어넣은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1968년 광화문 복원 설계를 담당했던 국보건설단의 광화문 설계팀장으로 일했던 최승일(64)씨는 “광화문 복원 계획은 박정희 대통령의 아이디어였다”고 말했다. “외국에서 귀빈들이 오면 꼭 중앙청 앞을 지나게 되잖아요. 사람들이 중앙청 건물을 보고 ‘저 훌륭한 건물은 뭐냐’고 자꾸 묻는데, 그럼 일제 시기부터 꺼내기 싫은 얘기를 해야 하는데, 박 대통령이 그걸 무지 싫어했어요.” 묘안으로 떠오른 것은 건춘문 옆에 파괴된 채 버려진 광화문이었다. 중앙청 앞에 문을 복원하면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고, 총독부 건물을 가릴 수도 있었다. “일본 사람들은 총독부 건물을 잘 보이게 하려고 광화문을 옮겼고, 박 대통령은 총독부 건물을 가리기 위해 광화문을 옮긴 거죠. 재미있지 않습니까.”
광화문의 복원 논의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66년 12월28일이었다. 그날치 는 문화재관리국발로 “광화문을 복원키로 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문제는 어떤 부재를 사용할 것인가였다. 애초 국보건설단 쪽은 당연히 석축 위의 나무 누각을 목조로 복원할 계획이였다. 문제는 돈이었다. 군사정권에는 돈이 없었다. 국보건설단의 강봉진 사장이 1967년 2월14일 문교부 장관에게 보낸 ‘광화문 복원 설계서 작성에 수반하는 질의’라는 제목의 공문을 보면 “건축 구조를 목조로 복원하는지 또는 철근 콘크리트로 복원하는지 여부”를 회신해달라고 묻고 있다. 결론은 “‘백년대계를 생각해’ 철근 콘크리트로 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언론들은 “광화문을 콘크리트로 만든다는 것을 어불성설”( 1967년 11월9일치)이라며 흥분했지만, 서슬 퍼렇던 시절 군사정권의 결정은 바뀌지 않았다. 당시 광화문 설계안을 최종 검수해야 했던 김동현(현 문화재위원, 한국전통문화학교 석좌교수)·신영훈(현 문화재 전문위원) 지도위원은 “콘크리트로 된 복원 설계는 인정할 수 없다”며 끝까지 서명을 거부했다. “그때는 군사정권 시절이니까 우리가 반대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두 분이 서명을 안 해주니까 설계비 예산 집행이 안 돼 애를 많이 먹었지.” 최승일씨의 말이다. 콘크리트였지만 광화문 복원이 감격스러웠는지 박 대통령은 1968년 12월12일 오전 10시 광화문 앞에서 열린 준공 기념식에서 한글로 ‘광화문’이라고 직접 쓴 현판을 가져다 달았다. “그분이 그렇게 하고 싶으셨는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기 글씨로 현판을 만들어 달더라구.” 최씨가 말했다. 박 대통령의 현판은 ‘콘크리트’ 광화문의 유일한 나무 재료다.
너비 27m짜리 광화문 광장 만들기로
12월28일 찾은 광화문에서 문화재청은 “2009년까지 대문을 제 모습대로 돌려놓겠다”며 문 앞에 대형 가림막을 세워놓고 해체 공사를 벌이고 있었다. 고통스런 변화를 겪으면서 가슴 아팠던 것은 광화문이었을까, 광화문을 만들고 파괴해온 사람들이었을까. 1995년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역사를 바로 세운다”며 옛 총독부 건물을 해체했고, 사람들은 죽은 대통령의 한글 현판을 바꾸느냐 마느냐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같은 날 서울시는 기자회견을 열어 세종로 너비를 줄이고 중앙에 너비 27m짜리 ‘광화문 광장’을 만들기로 했다. 도심의 모습은 다시 한 번 크게 변할 것으로 보이는데, 그 변화는 반갑기보다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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