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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싼 아파트라고 싼 인생인가요”

등록 2006-12-08 00:00 수정 2020-05-03 04:24

저소득 독신 여성 근로자 300여 명의 살림터 구로 임대아파트를 아십니까…매각 반대를 계기로 제 목소리 내기 시작해 권위적 관리체제에 문제제기

▣ 글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서울시 금천구 가산동 구로 근로여성임대아파트에는 저소득 독신 여성근로자 300명이 방 2개짜리 13평 아파트 1세대에 3명씩 살고 있다. 2명이 쓰는 큰 방은 한 사람 당 보증금 3만1500원에 월 임대료 1만5천원, 1명이 쓰는 작은 방은 보증금 4만2천원에 월 임대료 2만1천원이다. 이 아파트 입주자들에게 지난 1년은 낯설다면 낯선 날들이었다. 지난해 11월 근로복지공단이 서울과 부산 등 전국 6개 근로여성임대아파트 운영규정을 개정하면서 문제는 시작됐다.

공단은 운영규정에 ‘아파트 매각계약 체결 후 점유 회복이 필요한 경우 계약 기간이 남아 있는 입주자의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는 부분을 넣었다. 이 아파트를 둘러싼 매각 관련 소문이 이 조항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에 전국 1800여 명의 입주자들은 매각 반대와 해당 규정 삭제, 민주적 아파트 관리·운영을 요구했고 지난 8월 공단은 이 조항을 삭제했다.

매각에 반대하고 관련 조항 삭제를 요청하면서 싼 보증금과 임대료, 관리비 때문에 아무 말 못하고 살아온 아파트 입주자들이 비로소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파트 부실 관리·운영 등 근로여성임대아파트 관련 문제들이 하나둘씩 수면 위로 떠올랐다. 공단이 아파트 관리를 위탁한 사단법인 근우회의 부적절한 회계 집행과 자치운영비 무단 사용 등이 입주자들의 민원과 공단의 자체 조사를 통해 밝혀지면서 사무국장 등 4명이 퇴사했고 3명이 징계 조처됐다. 아파트 내 성희롱이 있었다는 내용이 접수돼 공단이 성희롱 관련 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이런 조처와 조사는 아파트 관리에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게 한다.

“변한 게 하나도 없다”

지난 11월20일 밤 10시, 구로 근로여성임대아파트 자치회장 김은하(36)씨가 쓰는 작은 방에 아파트 입주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서울 곳곳의 회사 사무실과 공장에서 퇴근하고 밤늦게 집에 도착한 이들은 이 아파트에 살고 있는 입주자들이다. 옷걸이와 화장대가 놓여 있는 작은 방에 탁자를 놓고 10명이 앉으니 꽉 들어찼다. “변한 게 하나도 없다”는 말로 입주자들의 얘기는 시작됐다. 징계 조처 등에도 관리업체인 근우회의 부실 운영은 달라지지 않고 있으며 감시와 제재 위주의 관리는 여전하다는 것이다.

이 아파트에서 2년 조금 넘게 살고 있는 황진숙(가명)씨는 “여기 살면서 가장 힘든 것은 관리사무소와 공단이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입주자들을 낮춰 본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감시 위주의 관리로 대표적인 것은 출입증 관리다. 독신 여성근로자들만 살고 있는 이 아파트는 여성들만 살기 때문에 유독 출입 관리에 엄격하다. 입주자들의 안전을 위한다는 명목은 좋다. 입주자들 모두 출입증을 갖고 있다. 출입증에는 사진과 이름, 주소, 일하는 회사까지 적혀 있다. 문제는 아파트에서 나갈 때와 들어갈 때 항상 출입증을 내야 한다는 점이다.

자치회장 김은하씨는 “아파트 운영규정에는 출입증을 반드시 제시해야 한다는 원칙이 없다”며 “관리자들이 보여달라고 할 때 제시한다고만 적혀 있다. 외부인 출입을 막기 위해서 출입증을 관리한다면 외부인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에게 출입증을 보여달라고 하면 되는데 입주자들 대부분에게 아파트를 드나들 때마다 출입증을 내라고 하는 것이 문제”라고 밝혔다. 이 자리에 모인 입주자들은 “관리자들이 뻔히 얼굴과 이름, 몇 동 몇 호에 사는지도 다 알면서 요 앞 가게에 가려고 할 때도 이름을 부르면서 오라고 한 뒤 출입증 제시를 요구한다”며 “내가 뭘 잘못해서 불려지는 것 같기도 하고 내 사생활까지 관리된다는 생각에 기분이 나빠서 항의해도 ‘그냥 시키는 대로 하라’는 식”이라고 입을 모았다.

근처 가게 가는데도 출입증 요구

직접적인 아파트 관리가 엉망이라는 목소리도 나왔다. 김희정(가명)씨는 “이사를 오거나 나갈 때도 일정한 원칙이 없어서 사람들마다 내는 서류가 다르고 거치는 과정이 다르다”며 “또 20년이 다 된 아파트라 변기나 세면대 등이 자주 고장나는데 이런 아파트 시설 관리에서도 누구에게 얘기했느냐에 따라 조처가 다르다”고 설명했다. 입주한 지 2년이 지나서야 방 열쇠를 받은 입주자도 있고 비가 올 때마다 항상 같은 곳에서 물이 샌다는 입주자도 있다. “시설 관리에 대한 명확한 원칙이 있고 이런 원칙을 제대로 공지해 수시로 바뀌는 입주자들이 잘 알 수 있도록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이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요?”

현재 아파트 관리를 맡고 있는 근우회는 전직 근로복지공단 직원들의 모임이다. 근우회는 2004년 위탁관리 용역 입찰을 통해 위탁업체로 선정된 뒤 지금까지 관리를 맡고 있다. 2004년 이후 매년 계약을 1년 단위로 갱신해왔고 올해 계약은 연말까지다. 구로 아파트 자치회장 김은하씨는 “이미 공단의 자체 조사를 통해 근우회의 회계관리 등에서 문제가 드러났다”며 “공단 퇴직자들로 이뤄진 근우회가 임대아파트 관리에 적합한 단체인지, 전문성이 있는지가 의문”이라고 밝혔다. 김씨는 “근우회가 아닌 전문적인 업체와 계약을 해 제대로 된 복지 서비스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근우회 정주환 사무국장은 “직원들의 전문적인 교육과 규제보다 현장 중심의 관리지침 등을 통해 잘해나가려 노력하고 있다”며 “입주자들과 오해가 많아서 그런 것뿐”이라고 설명했다. 근로복지공단의 입장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공단 강관중 복지계획팀장은 “계약기간 만료를 앞두고 근우회의 관리실적에 대해 현재 종합검토를 하고 있다”며 “재계약과 관련해 아직 결정된 것은 없지만 구로 아파트의 경우 대기자들이 많고 나가야 하는 입주자들이 많아 유독 민원 등이 많은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강 팀장은 “징계 조처가 내려지기는 했지만 큰 문제라고 보기는 힘들다”며 “입주자들의 오해 등 지엽적인 사안보다 전체적인 검토를 통해 결정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근로복지공단은 “종합 검토 뒤 결정”

작은 방 한구석에 앉아 임대아파트의 불합리한 운영 등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전미정(가명)씨는 이렇게 말했다. “저임금을 받는 여성근로자들에게 임대아파트가 큰 힘이 되고 자립에 도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저희가 이 아파트에 얹혀 사는 건 아니잖아요. 매각 관련해서 목소리를 크게 낸 사람들은 그 일 이후 아파트 안에서 다른 입주자들과 얘기를 할 때도 눈치가 보여요. 왜 꼭 이렇게 감시당하는 기분이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싼 값에 이 집에 살고 있다고 해서 싼 인생은 아닌데…. 이런 게 복지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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