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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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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가 그랬어, 3년이나 됐다고…

등록 2006-10-13 00:00 수정 2020-05-02 04:24

민주주의의 가치를 어린이 처지에서 담아온 의 의미있는 생존… 채무 고민으로 힘겨웠던 김규항 대표 “당신도 고래 이모·삼촌이 될 수 있어요”

▣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하루를 살펴봐. 먹을 것을 만드는 농부, 학교까지 데려다주는 버스 기사, 수업하는 교사, 점심밥 짓는 학교식당 노동자, 옷·가방·신발·학용품 만드는 공장 노동자. 이 사람들이 없다고 생각해봐. 이 사람들이 자기 일을 팽개쳐버린다면 어떻게 될지 잘 생각해봐.”

‘멸종 위기’와 싸웠던 3년

어린이 교양잡지 (발행인 김규항, 편집장 조대연)의 한 꼭지인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그림 박소림)이란 만화에 등장하는 대목이다. 만화를 처음부터 다시 따라가봤다. “을지문덕·강감찬·이순신처럼 옛날의 영웅은 주로 군인이다. 그런데 전쟁은 군인보다 더 많은 민간인을 희생시키는 만큼 군인이 영웅인 시대는 불행하다.

박찬호·박지성·이승엽은 요즘 나타난 스포츠 영웅들이다. 영웅은 시대를 상징한다. 돈이 최고인 요즘엔 돈 많이 버는 이를 최고의 영웅으로 친다. 그런데 실제로 영웅과 우리의 삶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황우석 아저씨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면 줄기세포로 해마다 33조원씩 벌어서 4800만 국민이 공평하게 68만원씩 나눠가질 수 있었을까. 우리의 삶과 직접 관련이 없는 사람들을 영웅으로 떠받들면서 헛된 꿈에 취하는 건 어리석은 일 아닐까. 우리의 진짜 영웅은 누굴까.”

‘노동·인권·환경·민주주의의 가치를 어린이의 처지에서 소박하게 담아내는 어린이 교양잡지’의 기치를 내걸고 2003년 10월 첫 호를 낸 (이하 )가 최근 2006호 10월호(36호)를 냄으로써 3주년을 맞았다. 9월27일 서울 망원동 사무실에서 만난 김규항 대표는 “의 생존을 위해 뛰어다니느라 3주년이 됐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다. 어떻게 꾸려왔는지 실감이 안 난다”며 웃었다.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이라는 만화 연재물은 창간 3주년을 맞아 민주노총과 함께 만드는 꼭지다. 김 대표는 “자본이 만드는 영웅밖에 없는 이 시대에 세상을 실제로 만들고 움직이는 노동자들, 다시 말하면 너희의 아빠·엄마·이모·삼촌들이 진짜 영웅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면서 “‘직업의 세계’의 고래판이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다음호부터는 실제 모델을 정해놓고 취재한 결과를 만화로 만든다. 만화라고는 하지만 그냥 만화가 아니다. 만화와 사진이 결합한, 독특한 장르다.

“첫 호가 발행된 뒤로 3년 동안 정상적인 발행을 위해 돈 걱정을 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책에 대한 고민보다 채무에 대한 고민이 더 많은 상황의 연속이었다”는 김 대표에게 그렇게 의 생존을 위해 기를 쓰는 이유를 물었다.

“요즘 진보운동이든 노동운동이든 모두 열세라고 하지만 그보다 더 크고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왔어요. 10년, 20년이 지나면 근본적으로 백기를 들게 될지 모릅니다. 그때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자본의 노예가 될 거라는 생각에 섬뜩해지는 때가 많아요. 물질적 풍요만을 행복으로 가르치고 소유욕과 경쟁의 가치만을 심어주는, 애 낳기가 겁나는 이 시대는 결국 우리가 만든 겁니다. 민주화가 실제로는 신자유주의화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우리 자신도 이 알 수 없는 고단함과 억압을 힘겨워하잖아요. 그런 면에서 품위와 위엄을 가진 인간을 추구하는 인권의 문제, 지구와 우주에서 사람이 자연과 어떻게 조화할 것인가를 묻는 환경과 생태의 문제, 노동이 세상을 만든다는 명제를 수사가 아닌 구체적 현실로 보여주는 노동의 문제를 아이들의 언어로 얘기하고 싶었어요. 이만하면 를 만드는 일이 이해받을 만하지 않은가요.”

전태일을 다르게 보다

그렇다고 가 훈계조의 진보를 추구하지는 않는다. 세상 모든 일을 ‘삐딱한’ 시각으로 보기를 강요하지도 않는다. 있는 그대로를 자연스럽게 보는 과정을 통해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재료를 주는 정도다. 예를 들어 전태일 열사의 일생을 다룬 만화전기인 ‘태일이’도 그렇다. 만화는 ‘열사’ 전태일보다는 ‘인간’ 전태일의 뒤를 좇는다. “전태일은 우리 사회의 진보를 가능케 한 인물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뒷짐 지고 역사를 생각하는 이는 아니었어요. 어릴 때 얘기를 들어보면 개구쟁이였습니다. 따뜻하고 여린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역사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합니다. 어른인 우리는 그를 ‘분신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으로만 느끼고 ‘비장함’과 ‘비범함’만을 보려고 하지만, 는 다르게 보려고 합니다.”

어른의 시각에서 어린이를 예단하거나 재단하는 관습에서 벗어나려는 의식적인 노력은 토론 꼭지에서도 엿보인다. 이번호 토론 주제는 ‘게임에 빠지는 진짜 이유를 알아요?’다. 토론에 개입해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의 주독자층인 초등학교 4~6학년 학생들이 참여하는 토론은 그들 스스로의 생생한 목소리로 이뤄진다. 아이들은 “컴퓨터 게임을 반복적으로 오래 하면 뇌가 치매에 걸린 사람처럼 된다는 사실을 잘 알 만큼 게임의 부작용은 잘 알고 있지만, 우리도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리고 각자의 가정에서 하고 있는 여러 ‘대안’들이 소개된다. 그리고 끝이다. 굳이 정답을 제시하려고 하지 않는다.

‘고민 있어요’ 코너 역시 마찬가지다. “술만 취하면 완전히 괴물로 변하는 아빠를 죽이고 싶어요”라거나 “밤에 오줌 누러 갔다가 엄마·아빠가 섹스하는 걸 우연히 봤어요”와 같은 가공하지 않은 고민들이 등장한다. 그러면 는 “아빠가 그렇게 미워도 너를 낳아준 분이란다”고 답하지 않는다. 도덕 교과서를 반복하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폭력을 그냥 눈감아주어서는 안 되며 병원에서 꼭 치료를 받아보시라고 아빠에게 말하라” “정말 아끼고 사랑하면 안아보고 싶고, 더 나아가 성관계를 갖고 싶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신뢰와 배려를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는 답한다.

의 콘텐츠는 다양한 분야와 장르에 걸쳐 있다. 과학·수학·역사·전기를 동화·극화·만화로 꾸민다. 인권운동사랑방과 함께 연재했던 인권만화 시리즈는 지난해 초 라는 책으로 묶여 나왔다. 흑인 아빠와 한국인 엄마 사이에 태어난 미나의 개학 첫날 얘기를 통해 차이와 차별을 얘기하고, 나만의 비밀을 쓰는 일기와 검사를 받기 위해 쓰는 일기를 따로 갖고 있는 민수의 얘기로 프라이버시권을 소개하는 이 책은 ‘2005년 대한민국 만화대상’를 받아 스테디셀러가 됐다. 가 내세웠던 철학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셈이다.

재단 만들어 무료로 보내주기 계속

는 창간 초기 무료 구독제를 실시했다. 그러나 무료구독을 원하는 이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정상 발행을 하기 어려울 만큼 사정이 어려워지자 재단 형태의 ‘고래동무’가 만들어졌다. 이은 MK픽처스 대표, 안상수 홍익대 교수, 김동원 푸른영상 대표, 가수 안치환씨 등이 고래이모·고래삼촌이 되어 농어촌과 도시 서민 지역 도서관과 공부방에 를 무료로 보내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지금도 7500원을 내면 한 계좌를 만들 수 있다.

비이성적인 마구잡이 때문에 사라져가는 자연의 고래처럼 첨단의 자본주의에 포위된 역시 멸종 위기에 처할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이 가을 자연의 고래가 주는 신비함을 꼭 빼닮은 를 아이들의 독서목록에 포함시키는 것도 괜찮은 일일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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