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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용] 밤섬의 뱃노래, 목수는 기억한다

등록 2006-05-12 00:00 수정 2020-05-03 04:24

▣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이일용(70)씨의 고향은 한강 밤섬이다. 그곳에서 태어나 결혼하고 서른세 살 때까지 섬에서 배를 만들었다. 짐배, 쌀배, 소금배, 낚싯배, 놀잇배 등 하루에도 수십 척에서 수백 척의 배가 한강을 떠다니던 시절, 밤섬은 한강 배 문화의 중심지였다. 섬 전체가 배를 만들고 고치는 일과 무관하지 않았다. 뱃사람들이 잠시 머무르는 장소로도 애용됐다. ‘밤섬 배 목수’ 이씨가 섬에서 쫓겨나오다시피 한 것은 1968년이다. 그해 2월 여의도를 개발하려던 정부는 골재 채취를 위해 밤섬을 폭파했고, 주민 60여 가구 400여 명은 마포 와우산 중턱으로 강제 이주됐다.

폭파 전 밤섬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 밤섬의 돌산 높이는 와우산 중턱에 닿을 정도였다. 여의도 쪽은 강이라기보다는 백사장에 가까웠다. 주말이면 하얀 백사장에 까맣게 사람들이 몰려나와 수영을 하거나 소풍을 했다. 마포대교의 밤섬 전망대에서 기자를 만난 이씨는 “서강대교를 지날 때마다 그냥 놔뒀으면 더 멋졌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며 사라진 고향의 모습을 아쉬워했다.

밤섬의 배 짓기가 자취를 감춘 데는 외부적 요인이 절대적이었다. 휴전선이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한강 하류에 그어지면서 바다에서 서울로 들어오던 배의 행렬이 한국전쟁 이전보다 급격히 줄어들었다. 초고속 압축성장 이데올로기의 전형인 1·2차 한강 개발 이후 한강에 떠다니는 배는 유람선과 작업선뿐이었다. 그와 같은 처지에 빠진 배 목수들은 섬을 떠나 건축목수로 전업해야 했다. 이씨 역시 지금도 가끔씩 건축 현장에 나간다.

이씨는 “옛날 모습이 사라지기는 했지만, 우리 고향 땅은 더 늘어나고 있다”며 웃었다. 그의 말대로 밤섬의 면적은 60년대 말과 비교해 2만여 평이 늘어난 7만5천여 평(2002년 기준)이다. 환경 전문가들이 “자연은 가만히 두면 강력한 복원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밤섬이 보여주고 있다”고 말하는 이유다. 애초 모양새와는 달리 윗밤섬(마포 쪽)이 아랫밤섬(서강 쪽)보다 더 커진 것도 모래와 흙의 퇴적 때문이다.

“통일이 되면 한강 하류에 설치돼 있는 수중보도 터버려야 한다. 그래야 한강물이 깨끗해진다”는 그의 꿈은 온갖 배들이 떠다니는 한강을 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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