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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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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를 뒤지는 학자

등록 2006-03-03 00:00 수정 2020-05-03 04:24

월간 <폐기물21> 펴내는 (주)순환자원 손영배 대표의 ‘쓰레기 연구 인생’
견문 넓히려 도쿄에서 미화원 생활… <한국의 쓰레기 2천년사>역작도 남겨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손영배(49) (주)순환자원 대표가 ‘쓰레기’에 홀딱 빠진 것은 일본 유학 시절이던 1986년 호세이대 사회학과 재학 중 장학금을 받아 동남아 지역 연구에 나선 게 계기였다. 그는 타이, 필리핀, 인도네시아, 홍콩 등지를 방문했을 때 가는 곳마다 쓰레기 처리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걸 보고서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어머니의 흔적을 찾아 일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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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대표는 당시 동남아 지역에서 보고 들은 일을 바탕으로 일본 잡지에 글을 기고했으며, 이는 나중에 <최근 아시아 쓰레기 사정>(일어판) 출간으로 이어진다. 그는 쓰레기 문제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 위해 도쿄에서 미화원(청소부)으로 일한 적도 있고, 일본 최대의 건축폐기물 처리 회사에 몸담은 동안에는 폐기물 처리와 관련한 방대한 자료를 수집해 ‘내공’을 쌓았다. 한국에 돌아온 해인 1997년 초엔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한국의 쓰레기 2천년사>(문지사 펴냄)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이 책에는 조선 세종·영조 시대의 환경 논쟁 같은 흥미로운 내용이 많이 담겨 있다.

손 대표는 지난 2000년 출판사인 (주)순환자원을 차려 월간 <폐기물21>을 발행하고 있으며, <일본 폐기물 비즈니스의 실체> <음식물 쓰레기 자원화 사업의 오늘과 내일> <폐플라스틱의 처리와 활용> 등 단행본도 꾸준히 내놓고 있다. 일본에서 쌓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발품을 판 결과물들이다. 그에겐 이제 부전공 격인 쓰레기 연구가 진짜 전공(와세다대학 정치학 박사)보다 더 중해졌다.

‘사회학도 → 일본 청소부 → 정치학 박사 → 환경전문 월간지 발행인’으로 이어지는 삶의 흔적에서 얼추 짐작할 수 있듯, 손 대표의 인생 역정은 순탄치 않았다. 그에게서 토막토막 전해들은 가족사나 고향(전북 순창)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간 계기,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사연 등은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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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대표에게 일본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주인공은 재일동포 2세인 어머니였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쯤엔가 일본에서 지내실 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 시절 일본에 머물고 있던 외할아버지께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는 걸 미리 간파하고선 한국으로 돌아오셨다고 하더군요. 어머니도 그때 따라 들어왔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그에게 “일본서 다니던 학교에 (자신의) 그림이 걸려 있다”는 얘기나, 일본의 발달상을 들려줬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1940년대에 이미 지하 3층 깊이에 전철이 다니고 있을 정도로 기술에서 앞서 있다는 얘기는 그에게 특히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일본 현지에 남아 있다는 어머니의 흔적을 찾아보고픈 막연한 감상과 아시아에서 가장 앞서 있는 나라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호기심은 일본어 독학으로 이어졌다. 일본에서 발간된 책이나 잡지를 달달 외우는 식으로 일본어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한국이 바깥 세상에 어떻게 비쳐지고 있는지, 세계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슴푸레하게나마 깨달은 바가 있었다. 때는 국내외 정보가 엄중하게 통제되던 1970년대여서 일본 잡지를 뒤적이다 ‘조총련’으로 오해받는 웃지 못할 일을 겪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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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닦이 대신 논문대회에 응시하다

손 대표가 일본에 유학갈 생각을 한 건 1980년대 초였는데, 그 이유가 걸작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부하고 싶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부하고 싶었던 이유는 그보다 더 걸작이다. ‘나라에서 왜 그렇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죽어라고 막는지’ 그게 궁금했단다. 단지 그 이유만으로 장남 처지에 고향 땅을 팔아 마련한 돈을 들고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게 언뜻 납득하기 힘들었지만, 워낙 정색하고 말하는 통에 더 이상 캐물을 수 없었다. 나중에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는 점에서 어쩌면 그럴 수 있겠다고 짐작할 뿐이었다.

고향 땅 657평을 처분해 받은 돈 300만원 가운데 동생들 학비 몫을 뗀 200만원을 갖고 일본으로 건너간 그에게 현실은 엄중했다. 무엇보다 물가가 너무 비쌌다. 한 달 지내고 나니 전 재산의 절반인 100만원이 흔적 없이 사라졌다. 호세이대 편입 시험 과정도 아찔했다. 영어, 논술 두 과목 중 문제는 논술이었다. 논술시험은 다섯 문항 가운데 두 개를 골라 기술하는 방식이었는데, 3번까지는 문제의 의도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때 혼쭐이 났기 때문인지 비교적 잘 써냈다는 4, 5번 문제의 내용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4번은 ‘1900~1910년에 아시아에서 일어난 큰 사건이 세계사에 미친 영향을 논하라’였는데, 손 대표는 ‘러일전쟁’을 소재로 삼아 논술을 완성했다고 한다. 5번 문항은 ‘종교의 세속화에 대해 논하라’였다.

가진 돈이 바닥을 보이는 터여서 여느 유학생들처럼 식당에서 접시를 닦아야 할 처지였지만, 그는 접시닦이 대신 현상 논문 대회에 응시하는 길을 택했다. 편입시험 때 본 논술시험에서 최고 수준의 점수를 받은 사실을 나중에 전해듣고선 자신감을 갖고 있던 터였다. 그는 학교 주최 현상논문 대회에서 편입 첫해 장려상을 받은 데 이어 2, 3년째에 각각 우수상, 최우수상을 받아 학비와 생활비로 요긴하게 쓸 수 있었다고 한다.

학교 밖에서 주최한 현상논문 대회에 나가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1989년 ‘아시아 3개국(한국, 타이, 필리핀) 수도의 청소사업과 자원화 활동 실태’로 이와나미 서점과 공해연구회 공동 주최의 하나야마상(華山賞)을 받은 게 한 예다. 학부 시절에 작성한 논문 중에는 ‘필리핀 신인민군(NPL) 군사전략 연구’(1985), ‘정치행위로 본 쿠데타의 한계- 타이 정치의 군부 세력과 권력투쟁 분석’(1986)도 있다. 이들 논문은 나중에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는 좋은 근거로 활용됐다.

그는 박사 과정을 마친 뒤 도쿄 지역에서 대학 교수 자리를 원했다가 여의치 않자 1996년 일본 최대의 건축폐기물 처리 회사인 ‘다케에이’에 취업한다. 다케에이에 근무하는 2년 동안 손 대표는 현장 경험을 쌓는 동시에 폐기물 처리와 관련한 방대하고 유용한 회사 자료를 복사하는 데 주력했다. 이는 1988~89년 중 6개월 동안 도쿄에서 청소부로 일한 경험과 함께 그에겐 쓰레기 문제와 자원 재활용에 대한 경험과 지식을 축적한 귀중한 바탕이었다.

“한국은행 돈이 다 내 건데…”

그가 한국에 귀국한 시기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가 터진 1997년 11월. 재벌 2세였던 한 친구가 외환위기에 빠진 한국의 처지를 들어 귀국을 만류했지만, 그에겐 도리어 기회로 보였단다. 전문가적 소양을 한국에서 펼쳐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한국의 실정을 본격적으로 공부해야겠다는 뜻도 있었다.

인터넷 이용 확산으로 종이 매체들 사이에 비명 소리가 들리는 한국 실정을 감안할 때 손 대표의 (주)순환자원이 월간지를 꾸준히 발행하는 자체가 용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정작 손 대표 자신은 태평스럽다.

“잡지 만드는 게 물론 돈은 안 되죠. ‘미친 놈’이라고 할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나한테는 하나도 이상할 게 없어요. 1997년에 귀국할 때 10년 동안 공부할 생각이었거든요. 잡지를 만들고 글을 쓰는 건 내 공부를 위해서입니다. 공부를 위해 수업료 내는 게 뭐가 이상합니까?” ‘그래도 일정한 수입을 올려야 잡지 발행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한국은행 돈이 다 내 건데 무슨 걱정이냐”는 알쏭달쏭한 답이 돌아왔다. 세월을 낚고 있는 ‘강태공’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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