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형무소 보도연맹 집단학살 사건 증명에 나선 김기진 기자의 투쟁
남아있는 증거자료 없어 자비들여 미국 전역을 헤매며 진실을 캐냈건만…
▣ 부산= 글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옛 부산형무소 터에서 차로 10분쯤 달려 사하구 구평동 동매산 밑자락에 다다랐다. 차에서 내려 다시 등산로를 따라 10분쯤 걸어 올라갔을 때다. “바로 여깁니다.” 김기진 <부산일보> 기자가 손으로 타원형의 움푹 파인 곳을 가리켰다. 5년 만에 찾은 산비탈이지만 그는 헤매지 않았다. 등산객들이 다니는 오솔길에서 겨우 몇 발자국 떨어진 지점에 그가 섰다. 하얀 해골 그림과 함께 ‘위험’이란 경고 문구가 적힌 비닐이 마치 ‘이곳이 그곳입니다’라는 표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리를 틀고 앉았다. 1년 전 재선충병에 걸린 소나무를 잘라 덮어놓은 것이다.
“기록이 없으니 어떻게 할 수 없다”
지난 2001년 철쭉이 한창일 무렵인 5월 포클레인은 굉음을 내며 50년의 침묵을 걷어냈다. 이곳에서 40여 구의 유골이 쏟아져 나왔다. 발굴 장소에서 불과 몇 십 미터 떨어진 또 다른 두 곳엔 120구 이상의 주검이 아직 손을 타지 않은 채 묻혀 있다.
이곳은 한국전쟁(6·25) 발발 직후인 1950년 7~8월 부산형무소에 수감돼 있다가 집단학살을 당한 보도연맹원(좌익 계열) 3500명의 암매장 장소의 일부다. 당시 보도연맹원들에겐 대부분 국가보안법 위반 딱지가 붙었다. 김 기자는 순전히 개인 돈을 털어서 이곳을 발굴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김해 숯골 등 다른 2곳에서 발굴 작업을 더 벌였다. 그의 주도로 부산 지역에 피해자 유족회도 꾸려졌다. 사비를 털어 일본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부산에서 40km나 떨어진 대마도까지 집단학살 피해자들의 주검이 떠내려간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국방부 등 관계 기관은 “기록이 없으니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온갖 방법을 써가며 국가기록원, 국회 도서관, 경찰서 문서고, 형무소 등을 이 잡듯이 훑었지만 보도연맹원 집단학살 관련 문서는 단 한 장도 찾을 수 없었다. 피해 유가족과 목격자의 증언, 그의 발굴 노력은 정부를 한 치도 움직이지 못했다. 국내에서 아무런 문서를 찾아낼 수 없던 그는 미국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2003년 우여곡절 끝에 언론재단의 해외연수 지원을 받아냈다. 무작정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을 찾았다. 그의 작업은 국내에서 선례가 없었다. 이 때문에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했지만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NARA는 문서를 어떻게 찾는지가 논문으로 나올 정도로 방대한 자료의 홍수였다. 미국이 우방인 한국 정부군이나 미군이 저지른 전쟁범죄 관련 문서를 거의 모두 기밀로 묶어놓은 것은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NARA가 실수로 빠뜨린 것을 찾아내야만 하는 고된 작업이었다.
소련관련 문서로 분류됐을 줄이야…
“반년의 시간을 허비했어요. 국민보도연맹을 어떻게 영역하는지 알게 된 것도 6개월이 지나서였죠.” 국민보도연맹은 ‘National Guidance Alliance’로 영역돼 있었다. 당시 주한 미국 대사관의 참사관인 드럼라이트가 국무부에 보낸 장문의 보고서는 보도연맹에 대한 종합보고서였다. 보도연맹의 조직 체계, 운영 방식, 회비, 지방조직 등이 망라돼 있는 이 문건의 발굴은 보도연맹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문건이 단 한 장도 없는 상황에서 그에게 엄청난 수확이었다.
행운은 우연히 찾아왔다. 한국전쟁 목록 문서들을 낱낱이 살폈지만 보도연맹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NARA의 한 직원이 “공산주의 목록을 찾아봐라”고 무심코 던진 말이 실마리였다. 소련 관련 문서들 가운데 ‘동북아 공산주의자’ 기록을 검색하다가 보도연맹을 찾아낸 것이다. NARA에서 보도연맹을 공산주의자 기록으로 취급해 소련 관련 문서에 갖다 붙인 것이다. “한편으로는 허탈하기도 했어요.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의 비극이잖아요. 우리 역사를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하는데 외국에 와서 도대체 우리 역사가 어떻게 된 건지 알아보고 있으니…. 한 미국 전문가는 대놓고 ‘너희는 왜 만날 여기 와서 너희 역사를 찾냐’는 하더라고요.”
그는 부산형무소 보도연맹원 집단학살 사건에 대한 문서도 여러 건 찾아냈다. 국군 3사단 군사고문단원 에머리치 중령이 쓴 ‘1950년 한국전쟁 초기의 역사’란 비망록에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미 군사고문단은 한국 정부의 부산형무소 재소자 3500명 집단학살 계획을 미리 알고도 “인민군이 부산 외곽에 이를 경우 형무소 문을 열고 기관총으로 모두 사살하도록 허락하겠다”고 밝혔다. 미군이 집단학살을 방조한 것이다. 그는 또 미군 25 CIC(한국의 기무사)의 활동 보고서 등을 통해 1950년 7월1일 보도연맹에 대한 한국 정부의 집단학살 지시가 있었다는 것을 최초로 확인했다.
미군은 집단학살의 방조자 이상이었다. 때론 협력하고 때론 가혹한 가해자였다. 그는 미 태평양 함대 소속 구축함 헤이븐호의 1950년 9월1일 포항시 북구 여남동(현 환호동) 송골해변의 피란민 포격 일지를 찾아냈다. 당시 생존자들은 100여명이 죽거나 다쳤다고 증언하고 있다. 죽음의 불로 불리는 네이팜탄에 의한 민간인 피해 관련 기록들도 발굴했다. 그는 1951년 1월19일 경북 예천군 산성리에 투하된 네이팜탄으로 64명이 숨지고 72명이 중경상을 입었다는 미 8군·제5공군 합동조사 보고서를 확인했다. 오폭인 줄 알고 조사한 이 보고서엔 “마을에 있는 민간인들이 북한 사람인지 한국 사람인지, 아니면 게릴라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고 쓰여 있다. 새롭게 찾아낸 문서들은 모두 6천 쪽에 이른다. 그가 지난 12월30일 발행한 <미국 기밀문서의 최초 증언: 한국전쟁과 집단학살> 단행본에 상세하게 나와 있다.
문서 발굴을 위해 그는 메릴랜드주 NARA뿐 아니라 워싱턴 D.C의 해군역사관, 펜실베니아주 카라일 바락스 육군역사연구소, 의회도서관, 스위스 제네바 국제적십자 문서보관소 등 기록이 있는 곳은 어디든 찾아다녔다. 메릴랜드주를 떠나 이뤄진 모든 작업에서는 그의 개인 비용이 들었다. 지난 5~6년 동안 집단학살에 매달리느라 기자생활을 하면서 모았던 수천만원을 모두 까먹었다.
그가 안타까워하는 것은 돈을 모으지 못한 것도 노근리 양민 학살을 보도해 AP처럼 세계적인 주목을 받지 못한 것도 아니다. “생존자든 목격자든 가해자든 진실을 말해줄 사람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고 있어요.” 집단학살 매장지들은 골프장이나 도로로 계속 덮이고 있다. 그는 집단학살 문제를 이념의 잣대로 몰아 딴지를 거는 것에 몹시 불편해했다. “뼈들이 50년째 그대로 묻혀 있어요. 이건 좌우 이념 대립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리하고 가야 할 문제입니다.”
증언해줄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고 있다
자신의 한계도 말한다. “제가 찾아낸 문서들은 미국의 눈을 통해 본 학살 사건의 진상일 뿐입니다. 어느 정도 각색되거나 걸러졌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그는 아직 확실한 답을 얻은 게 아니라고 했다. 보도연맹원 집단학살 명령이 어떻게 나왔는지 구체적인 의사결정 과정을 밝혀내는 게 그의 새로운 욕심이다. 그의 취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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