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관객들을 눈물나게 웃기는 <사이즈>의 한인배우들…첫 개별공연 기간 매진사례 뒤 앙코르 공연, 숨가쁘게 성공가도를 달리다
▣ 뉴욕=양지현/ <씨네21> 통신원 jihyunyang@msn.com
벽 전체를 차지하는 대형 거울, 발레 교습소에서나 볼 수 있는 나무 손잡이 레일, 차가운 느낌의 테이블과 의자…. 연기학교를 갓 졸업한 배우가 오디션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긴장한 나머지 셔츠는 물론 바지까지 땀으로 흠뻑 젖어 있다. 오디션에 들어가서도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의자에 붙은 껌 때문에 당황하고 주머니에서 좌르르 쏟아지는 동전 때문에 헛발질로 넘어진다.
광고
이를 지켜보는 관색들은 눈물을 흘려가며 웃고 있다. 연극 <사이즈>(Sides: The Fear is Real…)를 지켜보는 관객들은 눈물을 흘려가며 웃는다. 오디션에 대한 배우들의 공포감을 코미디로 승화시켜 평론가와 관객들의 인기를 얻고 있는 이 작품은 캐스팅 디렉터와 가학적인 안무가, 제정신이 아닌 듯한 작가들, 성공하겠다는 강박관념에 싸인 동료 등 배우들을 포위한 군상을 코믹하게 보여준다. 오프 브로드웨이 ‘컬처 프로젝트’ 극장에서 공연 중인 이 작품은 아시안 아메리칸 배우 6명으로 구성된 ‘미스터 미야기 시어터 컴퍼니’가 집필과 연기, 제작을 모두 담당했다. 그리고 이 중 제인 조와 폴 전, 피터 김, 훈 리 등 4명의 멤버가 한인 배우다.
현지언론들 “뉴욕시 톱5 앙상블”
오디션 경험을 친구와 가족들에게 보여주려는 소박한 목적으로 시작한 이 연극은 숨가쁜 줄 모르고 성공가도를 달렸다. 관객을 끄는 연극에 언론도 주목하기 마련.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공연된 연극을 보고 <월스트리트저널>은 “숨을 가다듬을 여유도 주지 않고 폭소를 선사한다…. 뉴욕시 톱5 앙상블”이라고 평했다. 깜짝 놀랄 만한 일은 이어졌다. <버라이어티>는 “오디션에서 창피함을 감수해야 했던 배우들을 위한 달콤한 복수”라며 극찬했고 <뉴욕타임스> <타임아웃뉴욕> <워싱턴 포스트> 등의 대표적인 미디어 평론가들이 <사이즈>의 코믹하고 재치 있는 내용과 출연진의 연기력과 팀워크에 대해 상찬을 아끼지 않았다.
광고
<사이즈>를 제작한 ‘미스터 미야기 시어터 컴퍼니’는 지난 2001년 마음 맞는 아시아 친구들끼리 창단한 극단이다. 그들이 모인 이유는 스스로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극단 이름은 영화 <베스트 키드>(The Karate Kid)에서 배우 팻 모리타가 연기하는 무술사범 미스터 케수케 미야기에서 따왔다. 그들은 아시아인이기 때문에 모인 건 아니지만 은연중에 아시아인임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사이즈>의 깜짝 성공까지는 아주 긴 무명의 역사가 자리잡고 있다. 연극에 출연한 단원 모두 10여년의 연기 경력이 있다.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제인 조와 피터 김은 예일대 스쿨 오브 드라마를 졸업했고, 폴 전은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UCSD)를, 훈 리는 하버드대를 졸업한 엘리트다. 이들 모두 여러 연극과 뮤지컬, TV 시리즈, 영화 등에 출연한 베테랑 배우들이다.
현재 할리우드에서 인종과 관계없이 일반 역에 캐스팅될 수 있는 아시아계 배우로는 루시 리우, 샌드라 오, B. D. 왕 등 손에 꼽힐 정도다. 브로드웨이에서는 아직도 꾸준히 특정 아시안 배역이 아닌 일반 배역에 캐스팅되는 경우는 드물다. 아시안 배우를 일반 배역에 넣으려면 반드시 이유가 필요하다는 고정관념도 있다. 아무리 좋은 대학을 나오고, 유명한 브로드웨이 작품에 출연해도 이들에게 주어지는 배역은 ‘미국 이민온 지 얼마 되지 않는 편의점 상인’ 등 스테레오타입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아직도 이들은 보이지 않는, 때로는 노골적인 인종차별을 받는다. <사이즈>에도 이와 관련된 장면이 포함돼 있다. 훈 리가 캐스팅 디렉터들 앞에서 편의점 상인을 완벽한 미국 액센트로 연기한다. 하지만 디렉터들은 “좀 더 화난 모습으로… 좀 더 인상을 쓰고… 그거 있잖아, 이 캐릭터는 음… 보트에서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런 사람? 이해 하겠지?”라고 요구한다.
광고
아이디어 생기면 바로 대본 수정
<사이즈>는 누구나 하는 클래식 작품도 아니었고, 아시안 아메리칸들만 관심을 가지는 이민 역사나 아시안 커뮤니티를 소재로 하지도 않았다. PS122 공연에는 아시안 아메리칸 관객이 주였지만 이번 ‘컬처 프로젝트’ 시어터 공연은 인종을 초월했다. <사이즈>는 ‘인종’이라는 정치적 포지션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훈 리의 말대로 “오디션에 갈 때 우리는 아시안 아메리칸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좋은 배역을 받으려는 한 배우로 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시안 아메리칸으로 구성된 극단 멤버들이 함께 작업했다는 것 자체가 ‘인종’에 대한 우회적 발언이 되었다.
<사이즈>의 공연 내용은 계속 수정된다. 배우들이 극본을 쓰고 제작, 연출까지 했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내용을 바꾼다.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있으면 극단 멤버들은 바닥을 구르며 웃는다. 그것으로 통과다. 이들은 이 변화하고 진화하는 <사이즈>를 미국 대학 순회 공연이나 다른 미디어로 옮길 수 있을지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과연 이들이 이러한 성공을 이어나갈 수 있을지는 지금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 그들에게 거는 기대는 어느 때보다도 높다. 무슨 이유에서건. 한국인이든 아시안이든 누구든 재능 있는 연극인에게 거는 기대 말이다.
광고
한겨레21 인기기사
광고
한겨레 인기기사
[단독] 나경원의 ‘태세 전환’, 윤 파면되니 “이런 결과 예상”
헌재, 윤석열의 ‘적대 정치’ 질타…야당엔 관용과 자제 촉구
파면된 윤석열 사과도 승복도 없이…“국힘, 대선 꼭 승리하길”
“금리 내려라” “못 내린다”…파월, 트럼프와 정면충돌
시진핑, 트럼프를 때리다…미·유럽 증시 패닉
“아이유 ‘탄핵 집회 선결제’는 혜안” 여연갤 성명문…팬덤 사칭 논란도
김동연 경기지사 “대한민국 파괴하려던 권력 국민 심판에 무너져”
“윤석열이 파면되이 와 이래 좋노∼” 대구·경북 시민들 축제
검찰독재정권 2022.05.10~2025.04.04 [그림판]
‘가시방석’ 떨쳐낸 대구 시민들 “묵은 체증 내려가…힘든 지형 체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