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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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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스트에 폭풍은 없었다

등록 2005-03-31 00:00 수정 2020-05-03 04:24

안팎 의견수렵 통해 절충안 마련한 로플린 총장… 독자적 재정 ‘굿 머니’ 확보 등 실행안 성공할까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그것은 카이스트(KAIST·한국과학기술원) 총장으로 취임해 끊임없이 한국의 현실을 모른다는 푸념을 들어야 했던 로버트 로플린 총장이 또다시 부닥친 난관이었다. 그는 지난 3월18일 서울 메리어트호텔 3층 회의실에 모인 취재진들에게 ‘카이스트 비전안’을 설명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한 대학 이사회(이사장 임관·삼성종합기술원 회장) 자리에 수십명의 취재진이 몰린 이유는 카이스트의 미래가 결정될 수 있다는 사회적 관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날 이사회가 마무리될 즈음 카이스트 관계자들은 미리 배포한 회견문을 급히 수거할 수밖에 없었다. 일부 이사진이 카이스트 비전안을 검토할 시간과 실행방법을 추가할 것을 요구한 탓이었다.

이사회 보고는 미뤄져

이날 카이스트 이사회는 비전안에 대한 의결권을 행사하는 자리는 아니었다. 당연히 비전안에 대한 대학쪽의 보고에 대해 의견을 개진하는 수준이었다. 발단은 카이스트 기획예산팀에서 비전안을 이사진에게 빨리 보내지 않은 것이었다. 이는 카이스트 비전안이 이런저런 진통과 수정을 거듭한 대가였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카이스트 비전안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못했기에 로플린 총장으로선 체면을 구겼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로플린 총장은 “이사회에서 비전안을 무시하고 다른 의견을 내지는 않을 것”이라며 “오해의 소지가 있는 단어를 수정하라는 요구가 있었다”고 덧붙였다.

어쩌면 로플린 총장은 이사회에 대해 형식적 절차로 여길 법도 했다. 애당초 지난해 12월14일 카이스트 창의학습관 터만홀에서 열린 ‘비전 워크숍’에서 300여명의 교직원 앞에서 카이스트 투자전략 제안서를 발표할 때만 해도 그의 목표는 명확했다. “카이스트의 예산자율권을 확보하고 정부로부터 독립적으로 학교를 운영하기 위해 사립화를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으로는 ‘학부생 정원 2만명으로 증원, 연간 등록금 600여만원 징수’ 등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 방안은 비전안에 단 한줄도 거론되지 않았다. 그가 대학 안팎의 거센 반발로 재정 자립을 위한 해법을 거둬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관련기사 제544호 표지이야기 ‘카이스트 폭풍에 휩싸이다’).

한때 로플린 총장은 ‘고집불통’의 이방인으로 여겨져 ‘왕따’ 분위기도 있었다. 그의 총장 취임 과정에 깊숙이 관여한 교수를 비전 워크숍 뒤 보직에서 해임하는 ‘충격요법’을 꺼내들고, 학내 교수들의 반발에 대해 시장의 요구를 외면하는 처사로 여기기도 했다. 동시에 평교수 21명으로 구성된 ‘비전 임시위원회’를 꾸리면서 대화를 통한 해법 찾기에 골몰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교수협의회(회장 김경웅)가 전체 교수를 상대로 벌인 설문조사에서 ‘사립화’와 ‘의·법대 예비반’ 등의 항목이 80% 안팎의 반대에 부닥치고, 주무부처인 과학기술부도 재정자립화 방안에 미온적 태도를 보였다. 그는 일정한 타협책을 마련해야 했다.

이번에 마련한 카이스트 비전안은 대학 안팎에서 제기한 문제를 최소화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로플린 총장은 지난 설 연휴 동안 장순홍 기획처장 등과 함께 투자전략 제안서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실행 아이템을 담은 ‘카이스트 세계화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이것을 비전 임시위원회 교수들에게 전달해 의견을 수렴해 내용을 보완하는 과정을 거쳤다. 비전 임시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최병규 교수(산업공학)는 “임시위원회는 여러 차례 논의를 거쳐 마련한 ‘결과보고서’를 지난 2월 말 총장에게 제출하는 것으로 활동을 마무리했다. 이 안이 어떻게 적용됐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학부·대학원 모두에 비지니스 마인드

그렇다면 카이스트의 개혁은 어떻게 이뤄지는 것일까. 카이스트 비전안은 이달 말이나 4월 초에 임시이사회를 열거나 서면 동의 절차 등을 통해 확정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르면 카이스트는 세계를 선도하는 연구 중심 대학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핵심 개념은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을 기본 모델로 카이스트의 역량과 위상, 재정을 점진적으로 강화하고 제도와 시설 인프라를 혁신적으로 개선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학부 프로그램을 학부모들이 원하는 시장의 수요에 부응할 수 있도록 재조정하고 대학원 과정에 대한 국제적 위상과 수익성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렇듯 카이스트 비전은 시장의 수요를 충족하려는 실행안을 주요 내용으로 삼고 있다. 카이스트에 지원하는 학생들이 기술자보다는 과학기술 마인드를 체득해 기술의 혁신적 사용자로서 삶을 영위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학부모와 학생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전략이라 할 수 있다. 과학영재라 불리는 학생들을 일반적인 기술적 환경 속에 ‘붙잡아’(capture) 특정 전공에 구속되지 않으면서 다른 직업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터주겠다는 발상이다. 예컨대 학부에 의·법대 예비반 과정을 두지 않더라도 관련 강좌를 개설해 앞으로 관련 대학원에 진학하려는 학생을 돕고 예술·문화, 경영·경제 분야를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과학자나 공학자가 되려고 카이스트를 찾는 학생들에 대한 지원책도 주요 관심사다. 이는 대학원 프로그램의 혁신적 변화를 전제로 한다. 산업계 흐름에 발빠르게 대응하기 위해 ‘수익이 나게’(profitable) 하는 프로그램으로 현금 유동성을 확보해 학생들을 지원하려는 것이다. 이런 프로그램을 운용하기 위해서는 최고 수준의 교수진 확보가 급선무일 수밖에 없다. 어쩌면 카이스트 교수 사회에 칼바람이 몰아칠 수도 있다. 세계적인 연구성과가 있거나 2개 국어 교육이 가능한 교수에게 충분한 보상을 제공하고, 이에 따르지 못하면 교수의 퇴출도 예상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 교원의 15%를 외국인 교수로 충원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이처럼 카이스트에 적지 않은 변화를 예상케 하는 비전안은 학부·대학원 모두에 비즈니스 마인드가 한결같이 흐른다. 하지만 비즈니스 마인드가 작동하는 게 마음에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로플린 총장의 고민도 여기에 있다. 구체적인 실행 아이템을 진행하는 데 적지 않은 예산이 소요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올해 카이스트 예산은 모두 2700억원. 이 가운데 정부 지원금은 926억원이다. 이 정도의 정부 지원금은 특정 목적에 사용되는 자금으로 총장의 재량권이 작동할 여지가 없다. 그가 염두에 두는 것은 총장이 재량껏 사용할 수 있는 200억원 이상의 ‘굿 머니’(good money)의 확보다.

그동안 국민의 세금으로 엘리트 교육을 담당하던 카이스트에서 독자적인 재정 권한은 없었던 게 사실이다. 굿 머니에 대한 발상은 이방인 총장이 아니라면 생각조차 하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로플린 총장이 제안한 굿 머니는 ‘등록금 징수’를 거둬들이면서 선택한 불가피한 산물인지 모른다. 유능한 교수에게 파격적인 지원을 하고, 신임교수 정착금제 등을 시행하는 데 경제적인 재량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카이스트 장순홍 기획처장은 “대학이 원하는 방향으로 예산을 집행할 수 있어야 한다. 안정적인 정부 지원금이 집행되지 않으면 등록금을 징수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라고 되물었다.

과기부, 재정지원 할 방침

이번 카이스트 비전안은 과학기술부와 나름의 조율을 거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 만큼 재정적 지원이 따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실제로 과학기술부 과학기술인육성과 김재식 과장은 “신뢰할 만한 용도가 제시되면 굿 머니도 내년 예산안에 포함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과학계의 히딩크로 불리는 로플린 총장이 나름대로 작전을 풀어나갈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지난해 7월 부임한 로플린 총장은 적지 않게 기가 꺾였을 게 틀림없다. 무엇이든 ‘꼬리표’가 달리는 상황에서 의욕마저 ‘자기 검열’을 거쳤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승리’로 이어지는 ‘작전’을 세웠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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