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작 중요한 사안에 제 목소리 못 내… 여성부 만들기만 하면 다 해결 되는가
‘관우의 청룡도로 파리를 잡는다.’
한 네티즌이 대통령직속여성특별위원회(위원장 백경남)를 질타한 말이다. 인터넷사이트 돈세상(www.donsesang.com)에 오른 이 글은 지난 10월 말 여성특위가 남녀차별 시정권고 사례로 발표한 ‘온천탕 수건 사건’을 보고 쓴 것이다. 여성특위가 발표한 사건은 이렇게 시작된다.
“서울시 강남구에 사는 신청인 H(52)는 지난 2월29일 가족들과 함께 경기도 포천 소재 I온천에 온천욕을 갔다. 남성과 동일한 온천료를 내고 들어갔으나 당연히 무상지급할 것이라고 기대한 수건을 지급하지 않아 사업주에게 항의하자 ‘원래 여성에게는 지급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해 그냥 돌아왔다. … 이에 여성특위는 강남과 강북의 목욕탕 각1곳을 선정해 2주간의 표본조사를 한 결과 여탕의 수건분실률이 남탕보다 높게 나타났다….” 여성특위는 반년이 넘는 검토과정 끝에 “여탕의 수건분실률이 남탕보다 높게 나타났지만 남탕에서도 수건이 분실되고 있음에도 여탕에서만 수건을 빌려주지 않는 것은… 여성 이용자 전원을 예비 절도자로 보는 행위로 시설이용 및 제공에서 명백한 남녀차별로 결정했다”고 발표한 뒤 해당 업주에게 시정권고를 내렸다.
답변에 절절매는 백 위원장
이 일이 알려지자마자 여성특위 홈페이지 게시판은 후끈 달아올랐다. 사사건건 여성특위를 비난하는 ‘단골남성’들의 주장이 아니라 여성주의적 시각을 가진 네티즌들의 의견이 많이 나왔다. 여성특위가 너무 사소한 문제에만 매달린 채 정작 중요한 문제를 놓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몇몇 네티즌은 9월 초 여성특위가 개최한 ‘공공건물의 남녀화장실 개선방안’에 대한 공청회를 꼬집으며 “비정규직 고용문제와 각종 인권문제가 산적한데 여성특위의 여성정책이 고작 화장실과 목욕탕에서의 남녀평등인가”하는 의문부호를 달기도 했다.
올 가을 정기국회에서 정부조직법 개정법률안이 통과되면 여성부가 신설된다. 직속기구의 여성특위에서 행정부처인 여성부로 전환되는 것은 김대중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밝힌 것처럼 국가의 중대한 정책과제이자 여성계의 오랜 숙원이었다. 이런 가운데 여성정책의 산파노릇을 했던 여성특위는 정치권 안팎의 비판을 받고 있다.
11월9일 국회의사당 501호 회의실. 한 여성이 답변석에 앉아 쩔쩔매고 있다. 이 자리는 국회 여성특별회가 대통령직속여성특별위원회의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 답변석에 앉은 이는 백경남 여성특위 위원장이었다. 한나라당 김정숙 의원 등은 호주제 폐지 문제, 군산 매매춘 화재참사 사건을 비롯해 최근 이정빈 외교통상부 장관의 발언에 이르기까지 굵직굵직한 여성문제에 대해 여성특위가 별다른 공식적인 대응을 하지 않은 것을 매섭게 질타했다.
여성차별 관련 소송은 한 건도 없어
백 위원장은 이정빈 장관 실언에 대해서는 “명백한 남녀차별이라고 보는 법적인 검토가 이뤄지지 않았고, 피해자의 신고가 없었기 때문에 직권조사 등을 할 수 없었다”고 피해나갔다. 또 대부분의 사안에 대해 “관련부처와 협의하겠다” “시정하겠다” “검토해보겠다”는 등의 일반론으로 일관했다. 그러자 일부 의원들은 “여성 한명의 무게는 지구의 무게보다 무겁다는 지론을 펼치는 여성정책전담기구의 수장이 그렇게 소극적으로 여성문제를 대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동안 여성특위가 남녀차별, 성희롱 예방과 교육을 중점사업으로 벌여온 것에 비춰보면 너무 안이한 태도가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대통령직속기구인 여성특위는 남녀차별금지및구제에관한법률과 여성발전기본법에 따라 여성정책을 종합적으로 기획·조정하고 남녀차별 사례를 조사·시정하며 여성발전기본정책과 남녀평등정책을 개발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 올해 여성특위가 추진한 중점사업을 보면 정부 각 위원회의 여성참여율 신장과 공직부문 여성참여 확대 권고, 남녀차별 및 성희롱 예방을 위한 교육·홍보 강화, 각종 남녀평등상 시상, 여성부 신설 추진 등이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업무에도 불구하고 여성특위는 외양에만 신경썼지 내실이 약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단적인 사례로 여성특위는 여성발전기금으로 지원할 수 있는 여성차별 관련 소송을 단 한건도 하지 않았다. 이날 업무보고 자리에서 한명숙 의원(민주당)이 “얼마 전 결혼과 함께 해고당한 한 여성노동자가 해고무효소송을 진행했다. 1심에서 이기고도 항소심에서 돈이 없어 변호사 없이 재판에 들어갔다가 결국 소송에서 진 일이 있다”며 남녀차별 소송지원 활성화 방안에 대해 묻자 백 위원장은 “여성특위에 신청된 사건 중 시정권고를 내려도 해결되지 않은 사건에 한해서만 소송비를 지원할 수 있다”고 해명해 빈축을 샀다.
이와 함께 부천축협의 여성노동자 임금차별 문제를 시정명령권이 있는 노동부로 이관하지 않고 시정권고만 내린 점, 여성공직자 진출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129개 1∼3급 개방형 임용직에 여성이 단 한명 임용돼 있는 점, 남녀차별에 대한 직권조사를 단 한 차례 발동한 점 등도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부천축협의 임금차별이 문제가 된 이유는 만약 이 문제를 여성특위의 의견을 달아 노동부로 이관했을 경우 노동부는 임금차액을 지불하도록 강제할 수 있어 피해자 구제가 훨씬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국회에서 지적된 사안은 여성특위가 주어진 권한마저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게 아니냐는 여성계의 우려를 뒷받침한다.
여성특위로서는 억울함도 없지 않다. 이상덕 여성특위 정책조정관은 “인력과 예산부족에 시달리는데다 무엇보다 집행력 없이 법적 테두리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의 한계가 있다”고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주어진 권한 안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성특위 위원장은 장관급이지만 국무회의 의결권이나 법안발의권이 없는 상태이다.
하지만 여성특위의 사정을 잘 아는 한 정치권 인사는 “여러 한계는 인정하지만 위원장이 반년이 넘는 재임기간 동안 단 한 차례도 대통령을 독대하지 못했는데 더 말해 무엇하겠느냐”고 여성특위의 소극적인 활동을 지적했다. 국회 사무처의 한 관계자는 호주제 폐지문제에 관한 공청회를 법무부에서 연 것을 두고 “여성지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이슈인 이 문제를 여성정책의 수장이 있는 여성특위가 아닌 법무부의 가정정책심의관이 준비해 시행한 것은 아이러니”라고 꼬집었다. 여성특위는 호주제 폐지문제와 관련해 실태조사만 했을 뿐 공식적인 입장은 내놓지 않은 상태이다. 군산 매매춘 화재참사 사건의 경우도 여성특위는 여성단체들의 강력한 진상조사 요구를 받았지만 장·차관회의 자리에서 단 한 차례도 발언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성부 앞두고 ‘차려진 밥상’에 안주
여성노동단체로 오면 여성특위에 대한 불만의 강도는 더 커진다. 전국여성노동조합(위원장 최상림)에서는 ‘골프장 캐디’의 40살 조기정년 문제를 남녀차별이라고 여성특위에 시정신청했다가 신청 자체를 취하한 일이 있다. 노동부에서 골프장 캐디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니라고 하자 여성특위는 처리하기가 애매하다는 이유로 취하를 종용한 것이다.
서울여성노조(위원장 정양희)에서는 여성특위 조사관의 태도를 문제삼아 여성특위에 항의성 질의서를 보낸 일도 있다. 한 공기업에서 성희롱을 당한 피해여성이 여성특위에 시정신청을 냈으나 조사관으로부터 도리어 모욕을 당했다는 주장이다. 질의서에 따르면 조사관이 피해자 앞에서 “결국 돈이죠? 돈 달라는 거죠?”, “회사가 되레 당신에게 소송을 걸면 어떡하죠?”,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게 어떻게 성희롱일 수 있는지” 등의 말을 하며 조사관의 임무를 방기했다는 것이다. 이 질의에 대해 여성특위는 조사관의 업무와 교육과정에 대한 일반론을 담은 답변서를 보내왔을 뿐이다.
여성특위가 남녀차별신고센터를 운영하며 올해 1월부터 10월 말까지 신고받은 사례는 총 1325건(전화·인터넷상담 1140건 포함). 그 중 시정권고는 27건에 그친다(표 참조). 서울여성노조 정양희 위원장은 “여성특위에 신청한 사건들은 대부분 명백한 입증자료가 있거나 피해자의 의지가 분명한 사례인 걸로 알고 있다. 그런 점에서 민간 여성단체에서 조사하고 처리하는 수준에 훨씬 못 미친다”고 지적했다. 한 여성단체 활동가는 최근 여성특위가 벌인 ‘공회전 절제’ 에너지절약 캠페인을 예로 들며 “그동안 사회이슈가 된 여성문제에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은 여성특위가 이런 전시행정에 매진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벌써부터 여성의 시각보다는 공무원의 시각을 앞세우는 여성특위가 여성부를 어떻게 준비할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많은 이들이 우려하는 본질적인 문제는 여성특위의 ‘의지’이다. 무엇보다 여성부 신설을 앞두고 여성특위가 너무 ‘차려진 밥상’에 안주한다는 우려가 높다. 여성부의 권한과 위상은 여성특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진다. 하지만 이런 권한은 거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남녀차별 사례에 대한 지금까지의 시정권고가 시정명령으로 힘을 가지려면 현행 남녀차별금지및구제에관한법률에 시정명령권이 포함돼야 한다. 그러나 여성특위의 의견을 참고로 정부가 제출한 개정법안에는 시정명령권이 빠져 있다. 또 정부조직법 개정안에는 전문성이 요구되는 여성부의 남녀차별개선위원회의 상임위원을 여성부 직원이 겸직할 수 있도록 돼 있다. 한 국회 관계자는 “법안대로 가면 상임 전문위원을 위촉하기가 어려워진다. 가능한 한 전문인력을 확보해야 할 여성특위가 행자부에서 기초한 기구와 인원직제표에 원칙없이 몸을 맞춘 모양처럼 보인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비판에 대해 백경남 여성특위 위원장은 과의 인터뷰에서 “일단 여성부를 만들고 차차 법안 정비를 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여성부 신설을 둘러싸고 여성특위가 제몫을 못한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 여성부 신설에 관한 준비는 제궤도에 올라 있다. 정치나 행정도 결국 사람이 하는 건데, 신뢰관계에 기초해서 봐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제라도 비판에 귀기울여라
여성부 신설을 앞두고 여성계와 정치권이 우려하는 것은 여성특위가 업무의 ‘집중과 분산’을 분명히 할 수 있는 준비를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여성특위에서 추진한 일을 보면 성희롱 예방사업 외에는 다른 부처와의 업무중복을 피해 외곽을 맴도는 경향이 많다”고 평가하며 “보수적인 공직사회에서는 너무 나서면 제동이 걸리지만 너무 뒤처져도 도태된다. 신설 여성부에서는 실현가능한 정책을 중심으로 확실하게 업무를 추진했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서울시의 한 여성공무원은 “일선에 있다보니 당면한 여성정책은 인권문제와 고용문제임을 느낀다. 가정폭력·성폭력, 매매춘 관련 여성인권 업무는 반쪽의 업무다. 제대로 집행하기 위해서는 업무가 오면 하겠다고 손놓고 기다릴 게 아니라 명확한 실태조사부터 서둘러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 여성단체 활동가는 “지금까지 여성특위는 비판보다는 배려를 더 많이 받았다. 지금이라도 관료화를 우려하는 안팎의 비판에 적극적으로 귀를 기울였으면 한다”고 말했다.
건강한 여성부를 낳기 위해서는 섣부른 재왕절개보다는 산고가 크더라도 자연분만을 해달라는 여성특위에 대한 바람은 비단 국회의원이나 공무원, 여성단체 활동가들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여성특위 남녀차별 신고센터 신고사례 처리현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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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희 기자so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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