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값 하락으로 세입자들이 전세보증금을 잃을 위험에 처한 이른바 ‘역전세·깡통전세’ 현상이 확산하면서 정부 책임론도 커지고 있다. 정부가 서민 주거안정 수단을 명분으로 무분별하게 전세시장을 키우는 바람에 역전세·깡통전세 같은 사회적 재난의 토양을 깔았다는 것이다. ‘역전세’는 주택가격이 내려가면서 전세 시세가 계약 당시보다 하락해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돌려주기 어려워진 상황을 말한다. 집값이 전세보증금보다 낮아져 집주인이 집을 팔아도 보증금을 다 돌려주지 못하는 상황을 ‘깡통전세’라고 한다. 모두 주택 경기 침체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지난 2년간 이어진 금리인상으로 경기가 가라앉으면서 역전세·깡통전세난이 심화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23년 4월 기준 전체 전세 가구 가운데 역전세 가구 비중은 52.4%(102만6천 가구), 깡통전세 비중은 8.3%(16만3천 가구)로 나타났다. 현재 역전세 가구 가운데 2023년 하반기와 2024년 상반기에 계약 만기가 도래하는 비중은 각각 28.3%와 30.8%이고, 깡통전세 만기 도래 비중은 각각 36.7%와 36.2%이다. 부동산 애플리케이션(앱) ‘직방’의 분석 결과 향후 1년간 전세계약이 만료되는 보증금은 302조원에 이른다.
정부는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임대인에게 전세보증금 반환에 필요한 자금을 대출받을 수 있도록 규제를 풀어주는 방안을 추진한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2023년 6월18일 한국방송(KBS) <일요진단 라이브>에 출연해 “집주인이 전세금 차액을 반환하는 부분에 한해 대출규제를 완화해 자금을 유통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마련 중”이라고 말했다. 현재 대출자의 상환능력을 따져 대출한도를 제한하는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가 시행 중인데, 전세보증금 반환을 위한 대출을 신청할 때는 이 규제를 적용받지 않게 ‘특혜’를 주는 방식이다.
집을 팔거나 자산을 처분하는 등 집주인 스스로 마련해 세입자에게 돌려줘야 할 보증금을 빌려주겠다는 점에서 도덕적 해이 등 여러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애초 집값 상승을 기대하고 위험을 감수하면서 갭투자(집값과 전세보증금 차액만 갖고 집을 사는 것)한 집주인에게 집값이 떨어져 투자 손실이 나자 정부가 갭투자를 유지하게끔 도와주는 게 타당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참여연대 정책자문위원장인 김남근 변호사는 “임대인이 세입자에게 진 빚을 (다른) 빚을 내서 해결하라는 것인데 결국은 또 갭투기 세력에게 대출로 부동산 투자를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게 된다. 새로 들어오는 세입자는 선순위 근저당을 잡은 금융기관에 밀려 후순위가 되기 때문에 보증금을 잃을 위험이 커진다. 4명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인천 미추홀구의 후순위 임차인들이 겪는 고통이 반복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전세보증금은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돈을 빌리는 개인 간 금융이다. 전세보증금 규모는 2017년 770조9천억원에서 2022년 1058조3천억원으로 5년 새 287조4천억원(37.3%) 증가한 것으로 추정된다.(한국경제연구원 분석) 본질적으로 빚이지만 국내 가계부채 통계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105.8%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1개국 가운데 네 번째로 많다. 여기에 전세보증금을 포함하면 이 비율이 156.8%로 늘어 현재 1위인 스위스(131.6%)를 제치고 세계 1위가 된다.
역대 정부는 서민 주거안정 정책으로 공공임대주택을 확보하기보다는 세입자가 전세보증금을 은행에서 대출받도록 보증을 서는 손쉬운 방법을 썼다. 2004년 설립된 한국주택금융공사는 전세자금 보증한도를 6천만원으로 운영하다가 2023년 현재는 4억원까지 늘렸다. 은행 처지에선 정부가 보증을 서니 떼일 염려 없는 ‘무위험 대출’이 됐고 대출심사를 제대로 하지 않고 내줬다. 저금리 상황에서 이자 부담도 줄어드니 대출 수요는 폭발했고, 전세자금대출은 2017년 48조6천억원에서 2022년(10월 기준) 171조9천억원으로 3.5배 증가했다.(2022년 12월 ‘한국은행 금융안정보고서’)
전세자금대출은 전세가격을 떠받치고 집값을 끌어올리는 구실을 했다. 세입자는 전세자금의 80% 정도는 대출로 조달할 수 있으니 집주인이 전셋값을 올려 받아도 기꺼이 돈을 내게 된다. 집을 사려는 사람도 전세를 끼고 사면 본인이 낼 투자비용은 적어지니 갭투자 수요도 부추긴다. 예컨대 시가 5억원 집을 살 때 전세보증금이 3억5천만원이면 본인 돈 1억5천만원이 필요하다. 하지만 전셋값이 올라 4억5천만원이 되면 자부담 5천만원으로 5억원 집을 살 수 있다. 집값이 하락하면 집주인은 본인 투자금 안에서만 손실을 보면 되지만 세입자는 막대한 전세보증금을 잃을 수 있다.
2023년 들어 대규모 피해가 나타나는 전세사기는 이런 무분별한 전세 정책에서 파생된 범죄다. 사기범들은 집값 시세가 불투명한 빌라를 짓거나 매입해, 세입자에게 전세보증금을 집값보다 높게 받아 차익을 가로챘다. 자기 돈 한 푼 들이지 않는 무자본 투기인데, 집값 하락기에 세입자에게 돌려줄 돈이 없게 되자 대규모 피해자가 양산됐다. 전세사기는 역전세·깡통전세 가운데 범죄 성격이 강한 일부분일 뿐이다. 세입자가 보증금을 잃게 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역전세·깡통전세와 다를 바 없다. 그런데도 정부는 전세사기 피해지원 대상을 ‘사기 피해자’로 한정해 요건을 까다롭게 적용하고 있다. ‘사기 범죄’는 개인의 책임이므로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어렵다는 논리로 시민사회가 요구하는 ‘보증금 채권 매입’ 등 실질적인 구제 방안도 외면하고 있다.
시민사회에서는 정부의 이런 정책이 ‘책임 회피’라고 본다. 주택세입자 법률지원 단체인 ‘세입자114’ 센터장 이강훈 변호사는 “상담 사례 가운데 집값이 9천만원인데 전세보증금을 9천만원으로 설정한 세입자가 있어 그분에게 ‘보증금을 그렇게 설정하면 위험한 줄 모르십니까’라고 하니 ‘잘 몰랐다’고 하더라. 이게 전세를 들어가는 임차인들의 일반적 인식이다. 특히 아무런 자산을 축적하지 못한 20·30대 계층에서 이런 문제가 많이 발생한다. 이분들에게 계속 금융교육을 하는 것으로 이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세대출을 관리하는 금융당국이 전세대출 범위를 제한했어야 한다. 그렇게 전세대출을 많이 풀어주고 이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것이 올바른 금융정책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참여연대는 2023년 3월 깡통전세·전세사기 피해를 야기한 금융당국을 감사해달라며 감사원에 공익감사를 청구했다. 금융위원회는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에 따라 전세자금대출을 관리해야 함에도 이를 하지 않았고, 금융감독원은 급격하게 늘어나는 전세자금대출을 방치했고, 주택도시보증공사는 전세보증금반환보증을 이용한 전세사기가 급격히 늘어나는 것을 알면서도 보증보험 위험을 관리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전세사기·깡통전세가 사회적 재난으로 번지면서 전세시장이 무질서하고 기형적으로 변질된 것을 정부도 인정한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2023년 6월16일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본인의 부담 능력과 위험 평가 기능에 따라 전셋값이 책정돼야 하는데, 지금은 금융기관·보증기관·임대인·임차인 모두 시장원리와는 따로 돌아가고 있다. 이 시장원리를 작동시켜야 한다는 생각”이라며 전세제도를 개선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전세시장의 거품을 꺼트리기 위해 당장은 전세보증금을 임대인과 세입자의 부채 관리 대상에 포함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현재 세입자가 은행에서 빌린 전세자금대출은 계약 만기시 돌려받는 보증금으로 상환할 수 있다고 보고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산정에서 제외하고 있다. 케이비(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의 강민석·손은경 연구위원은 2023년 6월18일 낸 보고서에서 “전세사기 방지도 중요하지만 역전세 부작용 역시 매우 광범위하므로 전세제도의 근본 개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며 “전세자금대출은 규모가 크고 과도한 대출로 인한 주택시장의 부정적 영향을 감안해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산정에 포함하는 것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주택가격 하락시 전세보증금 손실을 방지하기 위해 집값 대비 전세가격이 70% 이상이면 세입자가 전세자금대출을 못 받도록 제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원호 한국도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임대인이 상환해야 할 부채인 전세보증금은 임대인의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에 포함해 무분별한 대출을 규제해야 한다”며 “지난 3년간 전세대출 규모가 70조원 증가했다는데 과연 이 70조원이 세입자들의 안정적인 주거를 보장했는지, 이만큼의 금액이 공공임대주택에 투여됐다면 세입자의 주거권이 확보되지 않았을까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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