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최민희] 민언련 20년, 최민희의 20년!

등록 2004-12-01 00:00 수정 2020-05-02 04:23

제3회 송건호 언론상 받은 한국의 대표적 언론운동 단체의 제1호 간사이자 대모의 이야기

▣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지난 9월 이 참여연대 창립 10돌을 맞아 표지기사(526호)를 싣고 난 뒤였다. 메일 한통을 받았다. 예리한 지적이 담겨 있었다. “기사 가운데 오보가 하나 있어 알려드립니다. 김기식 처장님을 소개하며 최초의 상근활동가 출신 사무처장이라고 하셨는데, 김 처장님보다 더 최초는 저희 최민희 총장님이십니다. 저희 총장님이 바로 민언협(1984년 창립 당시엔 민주언론운동협의회였다가 98년 사단법인이 되면서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으로 바뀌었다) 1호 간사이자, 지 1호 기자 출신이십니다. 정말 말단 간사에서 시작해 민언련의 사무총장이 되신 거지요. 저희 총장님은 2000년부터 사무총장을 맡으셨거든요.”(민언련 간사 이송지혜)

그랬다. 깜빡 잊고 있었다. 최민희(46)씨. 자식들이 소녀 시절의 어머니를 쉽게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민언련의 ‘대모’ 최민희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민언련=최민희’라는 등식이 머릿속에 박혀 있다 보니, 그가 민언련 초창기부터 함께 커왔다는 걸 잊고 있었다.

올겨울 최민희씨는 경사가 겹쳤다. 민언련이 창립 20돌을 맞아 당당히 ‘성년식’을 치르게 됐고, 20년 동안 꾸준히 언론운동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제3회 송건호 언론상을 받게 된 것이다.

언론운동의 투사, 자연치유의 전도사

11월27일 수상식과 성년식을 앞둔 민언련 사무실을 찾았다. 오후 1시 사무실 문을 열자 김치 냄새가 팍 풍겼다. “식사는 하셨냐”는 인사말을 들으며 보니 그릇을 주섬주섬 챙기는 품새가 이제 막 점심식사를 마친 뒤였다. “우리는 항상 사무실에서 밥을 해먹어요. 돈이 안 들잖아요.” 최민희씨는 심상하게 말했다.

1984년 12월19일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협)가 세상에 처음 태어났을 때 26살 최민희씨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의 운동권 학생이었다. 동아투위·조선투위·80년 해직기자협의회·한국출판문화운동협의회 등 해직 기자와 사회과학 출판사들이 모여 만든 민언협은 처음부터 ‘새 매체 창간’을 목표로 하고 태어난 곳이었다. 어릴 때부터 글쓰기를 좋아했던 최민희씨는 민언협에서 젊은 일꾼을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선뜻 손을 들었다. “아침 7시에 집에서 나와 노동자복지협의회 등을 돌고 9시 편집회의에 참석했다가 오후가 되면 집회를 쫓아다녔죠. 회의·집회 참석, 기사 마감에 경리·총무일까지. 그때는 정말 정신없었죠.” 기자들은 경찰의 눈을 피해 숨어서 기사를 쓰고 편집을 했다. 1986년 한국 언론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 터졌다. 지가 군부정권의 언론통제책인 보도 지침을 폭로한 것이다. “이후 9개월 동안 잡지를 낼 수 없었어요. 하지만 그것은 ‘달콤한 위기’였죠. 밖에선 탄압을 받았지만 적어도 운동권 안에서 민언협에 대한 신뢰가 쌓여갔으니까요.”

1987년 6월항쟁과 뒤이어 대선. 국민들의 절망감과 간절한 민주화의 열망은 1988년 5월 창간으로 꽃을 피웠다. 민언협의 주축이었던 해직 기자들이 새 신문 창간을 주도했고 이에 뛰어들었다. 이보다 한달 앞서 88년 4월엔 지도 월간지의 틀을 갖추고 민언협에서 독립했다. 정작 민언협의 진짜 위기는 다음부터였다. 민언협과 의 관계·위상을 둘러싸고 격론이 벌어졌고, 최민희씨는 이 과정에서 민언협을 떠나야 했다. 이후엔 지 소유권 분쟁까지 벌어졌다. 민언협은 분열했고 갈 길은 보이지 않았다. 최민희씨는 이때 뭘 했을까. “소설을 썼고(그는 에 라는 단편으로 등단했다) 자연치유법을 공부했어요.” 민언협의 투사뿐 아니라 자연치유 전도사로 이름난 최민희씨의 경력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당시 남파공작원 왕영안씨를 인터뷰했는데, 그는 말기 암환자로 3개월 시한부생명을 살고 있었죠. 그를 도울 방법을 찾다가 발견한 것이 자연치유법이었습니다.”

아파트 저당 잡히고 다시 시작하다

하지만 민언협은 그를 ‘밖에서 나돌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1991년 민언협 중앙위원으로 다시 돌아온 최민희씨는 94년 말 사무국장을 맡게 된다. 민언협은 시민언론운동이라는 제 목표를 찾기 시작했다.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언론학교가 개편됐고 방송비평모임도 일상적으로 굴러갔다. 92년 대통령선거 당시 의 편파적인 왜곡 보도를 민언협이 앞장서 문제 삼으며 전선이 분명하게 형성되기 시작했다. 6년 뒤 모습을 드러낸 안티조선운동의 뿌리였다.

일하는 기계처럼 살았던 최민희씨는 개인적 충전을 위해 1998년 민언련 일선에서 떠난다. 하지만 2년 뒤 민언련은 다시 그를 부르고야 만다. “재정난 때문에 민언련은 사무실에서 금방 쫓겨날 판이었어요. 눈물이 나더군요.” 이사부터 해야 했다. 그는 아버지가 마련해준 자신의 아파트를 저당잡히고 5천만원 빚을 내 민언련 사무실을 다시 얻었다. 회원 배가 운동도 시작했다. 재정을 안정화하는 과정에서 운동의 목표도 뚜렷해졌다. 신문시장 정상화를 위한 법·제도 개선 투쟁, 안티조선운동, 지역언론 지원, 신문·방송 모니터 활동, 시청자 참여를 늘리기 위한 퍼블릭액세스 운동 등.

최민희씨는 각각의 운동 성과를 이렇게 평가했다. “언론개혁 투쟁의 핵심은 소유의 분산인데 열린우리당 신문법 개정안이 이 조항을 빼버렸기 때문에 다음 기회로 넘어가게 됐지만, 신문유통공사의 설립이나 신문시장의 불법·탈법을 고발한 이에게 주는 포상금제 같은 것은 신문시장 정상화를 위한 효과 있는 대책이 될 것입니다. 안티조선운동은 영향력을 부분적으로 약화시키고 시민의 대중적 관심을 늘리는 데는 효과적이었다고 자평합니다. 하지만 이제 안티조선운동은 시민의 일상생활에까지 심화돼야 하는 단계입니다. 가령 행정수도 이전 문제와 관련해 불매운동을 벌이기 시작한 대전·충남 지역이 좋은 사례가 되겠지요.”

현재 민언련은 최민희 사무총장을 비롯해 9명의 간사가 일하고 있다. 매달 1400명의 회원이 내는 돈 1500만원으로 이들이 살아가고 있다. 서울 바깥에선 경북·제주를 제외한 8개 지역에서 지역 민언련이 활동 중이거나 창립을 앞두고 있다. 100명 정도의 수강생이 참여하는 언론학교에선 매체사진·방송·신문 모니터분과의 회원을 배출해낸다.

최민희씨는 민언련이 차곡차곡 내실을 쌓아가고 있는 것과는 별도로 몇 가지 ‘오해’ 또한 쌓이고 있다고 했다. 오해들을 요약하자면 민언련이 친정부적이라는 것인데, 이에 대해 최민희씨는 사안별로 답했다. (1) 파병 철수를 외칠 때 다양한 전술과 전략이 필요했기 했기 때문이며 (2) 정부지원금 1억3천만원은 퍼블릭영상제를 진행한 프로젝트 비용으로 받은 것으로서 민언련의 일상 경비는 회원들의 회비로 충분히 돌아가므로 정부 지원과 유착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3) 열린우리당이 신문법 개정안에 민언련의 코치를 받아 언론사의 소유권 지분 제한 규정을 뺀 것은 근거없다고 답했다.

“친정부적이라는 오해를 푸세요"

인터뷰 말미에 민언련이 이번에 몇 번째 상을 받은 거냐고 물었다. 놀랍게도 ‘첫 번째’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냥 우리는 꾸준히 일해온 거고, 그래서 운이 좋은 거라고 생각해요. 나 개인으로 보면 강의와 원고료로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으니까요. 운이 좋은 만큼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상을 받은 기념으로 뭘 하실 건가요? “아~ 상이란 걸 받아본 적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있어야죠. …12월17일 시청역 근처 맥줏집에서 일일호프를 합니다. 나름대로 ‘깜짝파티’를 준비할 테니 오세요.”

한겨레 저널리즘
응원으로 지켜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