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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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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은 가려 딛고 눈은 천지를 뛰어 다니네


한국전쟁 최대 격전지·현재는 한국 최고 청정지 양구, 전쟁과 평화의 문법을 온몸으로 비감하다
등록 2009-12-31 14:35 수정 2020-05-03 04:25

눈과 비가 함께 내렸다. 눈비 또는 비눈은 농밀한 안개 사이를 잘게 헤집고 지구로 낙하했다. 눈비 머금은 안개는 폐를 지그시 눅인다. 폐의 수많은 꽈리들은 어머니 양수에서 보낸 열 달을 기억한다. 수중 호흡의 유전자는 건조한 공기 대신 축축한 물기를 맞이하며 설렌다. 깊은 호흡을 시작한다.

민통선 너머에 있는 두타연은 사흘 전에 방문 신청을 해야 들어갈 수 있다.

민통선 너머에 있는 두타연은 사흘 전에 방문 신청을 해야 들어갈 수 있다.

청정함, 전쟁터의 복수 또는 보답

분지인 양구에 가면 설렐 일이 많다. 사철 내내 안개가 잦다. 한반도 정중앙에 자리한 양구에선 산 넘어 다른 산이 고개를 내민다. 안개는 산을 넘느라 몸살을 앓은 대기의 흔적이다. 잊었던 것을 생각하며 살라고 양구는 인간계를 안갯속에 빠뜨려 몸살나게 한다. 삶과 죽음, 자연과 무기, 평화와 전쟁의 경계에 물방울을 한 무리씩 부려놓는다. 사람들은 양구에서 안개만큼 많은 피를 흘렸다.

1951년 6월부터 12월 말까지 양구를 둘러싼 도솔산, 대우산, 백석산, 가칠봉에서 죽거나 실종된 군인만 2만8300여 명이다. 남과 북의 군인은 물론 미군과 중국군까지 뒤엉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951년 6월은 한국전쟁 휴전협정이 시작된 때다. 전쟁이 끝나기 전에 한 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해야 한다는 지상명령이 병사들을 총알의 안갯속으로 밀어넣었다.

지금 봉우리를 지키는 병사들은 60년 전의 전쟁을 겪지 않았다. 양구군 인구가 2만1천여 명인데, 이곳에 주둔한 군인은 그보다 조금 더 많다. 군인 반, 민간인 반이다. 주말이면 군인들을 만나러 부모와 애인들이 양구를 찾는다. 기자가 머문 숙소에도 병사의 부모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아들을 만날 생각에 발갛게 상기돼 있었다. 수수한 보퉁이마다 맛난 음식이 가득할 것이다. 읍내를 벗어나면 기름 냄새 풍기는 군용차가 수시로 지나간다. 장교를 태운 지프차도 있고 병사를 태운 트럭도 있다.

산책로 주변에는 지뢰 위험지역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늘어서 있다.

산책로 주변에는 지뢰 위험지역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늘어서 있다.

그러나 “양구는 군인의 도시다”라고 현재형으로 말하면 안 된다. 양구의 병사들도 기분 나빠질 것이다.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인 2010년을 앞두고 양구는 전쟁의 안개를 걷어내고 있다. 대신 자연의 안개를 품기 시작했다. 사람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던 땅에서 허물 벗기듯 철조망을 걷어내고 있다. 1990년대에는 제4땅굴 등 ‘안보 관광’을 내세웠지만, 최근 자연·생태 관광을 강조하면서 생명과 평화의 순례길로 거듭나고 있다.

건설사·관료·지역토호가 뭉친 토건족은 지난 60년 동안 온 산하를 파뒤집는 전투를 벌였다. 오직 양구만 개발의 휴전지역이 됐다. 맑고 깨끗한 것만 남았다. 그것들을 보러 오라고 양구 곳곳에 펼침막이 내걸려 있다. “전국 제일의 청정지역, 양구에 오시면 10년이 젊어집니다.” 청정한 양구는 전쟁터 양구의 복수 또는 보답이자, 이상한 역설이다. 전쟁 덕분에 맑아졌지만, 다시 전쟁하면 맑고 깨끗한 것들이 일순에 사라질 것이다. 군인의 논리가 민간의 개발을 막았지만, 민간의 논리를 완전히 거부하면 자연의 개방은 불가능할 것이다. 양구에 오면 전쟁과 평화의 문법을 온몸으로 비감하게 된다.

양구 두타연에서 그 역설은 ‘지뢰’ 표지판을 경계로 대치한다. 산책길 주변에는 ‘지뢰’라고 적힌 붉은 삼각 표지판이 새끼줄에 달려 있다. 민간인들이 오는 곳에 일부러 지뢰를 매설했을 리 없다. 지뢰 제거 작업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으니 조심하라는 뜻이다. 표지판 이쪽은 가없는 깨끗함을 즐기는 땅이고, 저쪽은 내디디면 죽어버리는 땅이다. 한발 차이다.

여름에도 계곡엔 발을 담글 수 없네

2006년 6월1일, 그 경계가 만들어졌다. 지뢰 위험지역을 피해가는 오솔길을 닦아 한국전쟁 이후 5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민간에 공개했다. 사람들은 지뢰 위험지역 사이를 찬찬히 걸으면서 청정한 자연을 발로 느낀다. 소설가 성석제는 어느 글에서 “아름다움과 공포는 혈연관계”라고 썼다. 두타연 산책길을 걸으면 그 뜻을 알게 된다. 지뢰 표지에 긴장한 발은 안전지대를 더듬는데, 계곡의 아름다움에 취한 눈은 사방천지를 미친 듯 뛰어다닌다.

내금강에서 20km 떨어진 두타연은 원래 금강산 가는 길이었다. 장차의 어느 날, 두타연 계곡을 따라 금강산에 오르는 코스가 아름답고도 간편한 지름길로 각광받을 것이다. 아직 그런 날은 오지 않았지만, 오직 두타연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하다. 민간에 개방되기 전엔 인근 사단장들만 들어와 회식하는 별장이 있었다. 군대에서 삽질해본 남성 독자들은 의심 없이 믿을 수 있을 것이다. “대체 얼마나 좋기에!” 아래의 글은 ‘사단장 별장’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를 위한 정보다.

두타연은 내금강으로 들어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지금은 그 길이 막혔다.

두타연은 내금강으로 들어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지금은 그 길이 막혔다.

금강산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기다란 채찍처럼 사방산을 휘감아 계곡을 만들었다. 두타연을 끼고 있는 사방산은 ‘동서남북 사면이 산’이라는 뜻이다. 골이 깊어 물이 맑은데, 마침 산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자리가 있었다. 생사를 화두 삼은 스님들이 절을 지었다. ‘두타사’다. 두타는 ‘버리다, 씻다’는 뜻의 산스크리트어다. 살고 죽는 경계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스님들은 용맹정진했을 것이다. 그러나 1천 년 전의 일이라, 지금은 그 공덕만 전설처럼 전한다. 수행승의 자취는 세월과 함께 사라지고 그 위를 전쟁의 잿더미가 덮었다가 이제 전몰 위령비와 생태공원이 들어섰다. 사람들은 두타연의 이름에서 절의 존재를 유추할 뿐이지만, 절경을 죽비 삼아 세상사를 되돌아보는 도량이라는 점에서 두타연은 여여(如如)하다.

민간 개방 이후 3년간 양구군청에서 두타연 트레킹 코스를 개발해왔다. 최근 흔들다리를 놓고, 전망대도 새로 설치했다. 봄이면 계곡을 따라 물철쭉이 핀다. 여름이면 두타연에 떨어지는 3단 폭포가 아우성이다. 가을에는 붉은 단풍이 켜켜이 계곡을 덮는다. “겨울이라 볼 것이 적다”고 양구군청 서동호 문화해설사가 겸양했으나, 잔설 위로 하얗게 언 폭포와 계곡은 장쾌한 맛이 이를 데 없다.

흔들다리와 징검다리로 계곡의 이쪽과 저쪽, 폭포의 위아래를 오가는 오솔길이 4km 정도 이어진다. 사람 손이 닿지 않은 청정 숲은 겨울의 앙상한 가지만으로도 빽빽한데, 봄·여름·가을의 잎과 꽃이 그 가지에 매달리면 얼마나 절경일지 짐작이 쉽지 않다.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다 하여 ‘두타연 산소길’로도 불린다. 10m 높이의 폭포가 떨어져 12m 깊이의 소(沼)를 만들었다. 두타연 계곡은 깊고 시린 물에만 사는 열목어의 국내 최대 서식지다. 여리고 맑은 그 물고기는 3단 폭포를 뛰어올라 내금강 계곡으로 향한다. 심호흡하며 걷고 잠시 앉아 둘러보고 나오는 데 1시간 정도면 넉넉하다. 아쉬움이 있다. ‘원칙적으로는’ 여름이 되어도 계곡에 발을 담글 수 없다. 물이 불어나면 지뢰가 떠내려올 수 있단다.

용늪이 정상 아래 최북단 등산로

두타연은 민간출입통제선 너머 북쪽에 있다. 지뢰 없는 오솔길을 닦았으나 군의 통제는 거쳐야 한다. 기자가 두타연 앞 초소에 도착했을 때, 자동차 내비게이션 화면에는 도로도 건물도 모두 사라졌다. 지리 정보가 입력되지 않은 군사 지역이라는 뜻이다. 상병과 이병이 대검을 소총에 꽂고 신분증을 확인한다. 그들은 명령에 따를 뿐이므로, 공연히 투정 부려야 소용이 없다. 초소를 통과하려면 방문 사흘 전에 양구군청 경제관광과(033-480-2251)로 신청을 해야 한다. 월요일엔 못 들어간다. 화~일요일 아침 9시30분에 양구 읍내 ‘명품관’에 모이면, 군청 문화해설사가 이끌고 두타연에 들어간다. 처음부터 걸어 들어갈 수는 없다. 버스건 자가용이건 자기 차량을 몰고 산책로 앞까지 가야 한다. 아무렇게나 들어갈 수는 없지만, (사단장을 빼면) 아무나 들어갈 수 없던 곳임을 생각해 약간의 번거로움을 감수할 수 있다.

‘산소길’로도 불리는 산책로를 모두 돌아보는 데 1시간 정도 걸린다.

‘산소길’로도 불리는 산책로를 모두 돌아보는 데 1시간 정도 걸린다.

2009년 들어 양구군은 또 하나의 철조망을 걷어냈다. 지난 10월, 대암산 생태탐방로를 닦았다. 두타연 산책로와 달리 사전 신청도 검문도 없다. 예전부터 있던 광치휴양림(033-482-3315)에서 대암산 봉우리를 향해 올라 생태식물원 또는 후곡약수터로 내려오는 최장 21km의 등산로가 생겼다. 휴전선과 인접한 최북단 등산로다. 계곡과 폭포가 원시림을 갈라놓는다. 2시간부터 8시간까지 소요 시간에 따라 등산로를 골라 오를 수 있다. 다만 이곳 역시 군사작전 지역이므로 정해진 등산로를 따라 걸어야 한다. 천연기념물이자 람사르협약에 등록된 용늪이 정상 바로 아래에 있다. 광치휴양림에는 원룸 통나무집들이 있어 숙박이 가능하다.

최대 격전지 가운데 하나인 양구군 해안면 ‘펀치볼’(Punch Bowl)은 해발 1049m의 철책 위에 자리한 을지전망대에 올라 감상할 수 있다. 산으로 둘러싸인 해안면 분지를 보고 한국전쟁 당시 미국 종군기자가 칵테일을 담는 사발 그릇을 떠올렸다. 동족끼리 싸웠던 한국인들은 비극의 현장을 ‘술독’에 비유할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어쨌건 펀치볼은 ‘해안분지’보다 더 유명한 지명이 됐다. 통일기념관(033-480-2674)에서 민통선 출입신고서만 쓰면 바로 을지전망대에 오를 수 있다. 날씨가 맑으면 금강산 비로봉까지 보인다. 겨울철에 눈이 오면 출입을 막는 일이 있으니 미리 확인하는 게 좋다.

원래 양구 사람들은 전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나물 캐며 살던 이들이다. 산으로 둘러싸여 도회지의 증오에 오염되지 않고 살았다. 영화 의 동막골이 실재했다면, 그 고을은 양구에 있었을 것이다. 양구에서 나고 자란 박수근(1914~65 )은 양구 사람들의 삶에서 영감을 얻었다. 등에서 양구 사람들은 묵묵하고 소박하다. 유명한 그림들은 도회지로 팔려나가고, 고향에 만들어진 ‘박수근 미술관’(033-480-2655)에는 유품과 드로잉 등만 전시돼 있다. 화려하진 않지만 검박해 외려 박수근에게 잘 어울리는 공간이다.

양구의 음식도 담담해 맛있다. 산자락에서 안개 맞으며 자란 더덕, 배추, 무, 곰취나물 등이 유명하다. 장수 오골계 식당(033-481-8175)에선 뼈까지 검은 오골계를 숯불에 구워먹을 수 있는데 기름기 없이 담백하다. 서울~춘천 고속도로를 타고 가면 2시간 만에 양구에 도착한다. 배후령을 넘는 도로에선 조심해서 차를 몰아야 한다. 읍내에 깨끗한 모텔들이 있으나, 호텔은 KCP호텔(033-482-7700)이 유일하다.

박수근은 양구에서 태어났다. ‘박수근 미술관’은 박수근의 그림처럼 소박하다.

박수근은 양구에서 태어났다. ‘박수근 미술관’은 박수근의 그림처럼 소박하다.

광치휴양림에서 시작하는 대암산 생태탐방로가 2009년 10월 일반에 공개됐다.

광치휴양림에서 시작하는 대암산 생태탐방로가 2009년 10월 일반에 공개됐다.

전쟁으로 잃어버릴 것을 생각하는 여행

구절양장 험난한 도로가 쭉 뻗은 도로로 바뀌고, 드문드문 들어선 맛집이 더 많아지고, 호텔이나 펜션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게 과연 좋은 일인지 확언할 수 없다. 그러나 복수와 응전을 벼르며 전쟁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으로 잃어버리게 될 것을 생각하는 여행이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화려한 관광지에 없는 것들이 양구에 있다. 생명과 평화를 생각하는 산책로가 양구의 안갯속에 조심스레 뻗어 있다.

양구=글·사진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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