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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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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과 지식인들이여 조금 더 섬세하게 국민을 대하라

등록 2017-05-23 15:43 수정 2020-05-03 04:28
<한겨레21>은 매주 독자 퀴즈를 통해 다음호 표지 사진이 무엇인지 미리 공개한다. 제1162호 표지에 실린 문재인 대통령의 사진은 온라인상에서 큰 논란이 되었다. <한겨레21> 페이스북 갈무리

<한겨레21>은 매주 독자 퀴즈를 통해 다음호 표지 사진이 무엇인지 미리 공개한다. 제1162호 표지에 실린 문재인 대통령의 사진은 온라인상에서 큰 논란이 되었다. <한겨레21> 페이스북 갈무리

나는 2002년 12월 노무현 대통령 당선 이전부터 퇴임 직전까지 계속 외국에 있어 그 기적적인 역전극의 감동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래서 노무현 지지자가 될 기회조차 없었다.

그 시절, 해외에 5년간 살면서 인터넷을 통해 한국의 다양한 신문과 언론을 접했다( 기자 출신이기에 조·중·동을 읽는 비중은 매우 낮았다). 내가 한국 언론을 통해 느낀 것은 말 그대로 대한민국의 ‘몰락’이었다. 경제도 사회도 정치도 다 무너져 귀국하면 주인 잃은 빈집이 널려 있고 길에는 거지들이 득실댈 것 같았다. 도대체 노무현 대통령이 정치를 어떻게 하기에 나라가 저 꼴이 된 것일까.

하지만 막상 귀국하고 나서는 반대의 의미에서 놀랐다. 국민의 표정은 수년 전 고국을 떠날 때보다 훨씬 밝았고 행복했으며 여유로웠다. 경제는 성장하고 사회는 안정되고 공기 속에는 자유로움이 가득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노무현을 ‘놈현’이라 부르며 비웃거나 사회 속에서 일어나는 나쁜 일을 그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었다. 거기에 편승하지 않은 언론과 국민이 거의 없다시피 한 모습을 보며, 나라 전체가 일종의 집단최면에 걸린 게 아닌지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 대통령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이 전반적인 상황이 우리 사회에, 특히 노무현을 지지했던 혹은 오해했던 사람들에게 남긴 트라우마는 엄청나다. 이 트라우마가, 치유될 기회가 없었던 비민주와 부패, 암흑의 9년을 지나 문재인 대통령의 시대에 다시 부상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 어리석음과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은 우리들 자신의 죄의식과 불안의 투영도 당연한 일이며 일부 언론이나 인사들의 언행에 예민함과 분노를 터트리는 것도 바로 이 트라우마 때문이다.

한때 국민적 관심을 끈 라는 TV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 프로그램을 보며 우리는 음악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어떤 가수가 진심으로 노력하는지, 대충 시간이나 때우려 하는지, 이른바 ‘진정성’을 어렵잖게 구별할 수 있었다. 단지 집중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물론 지금 이 사태에는 문재인 지지자들의 오해도 섞여 있다. 지나친 예민함과 과격함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진보 언론과 지식인들의 문장이나 표현 속에 문재인과 그 지지자들을 바라보는 차가운 시각, 학창 시절 운동권 용어를 쓰자면 ‘프티부르주아’를 바라보는 듯한 냉소도 느껴진다. 때와 마찬가지로 문재인 지지자들은 은연중에 그걸 느끼며 실망하고 분노하는 것이다. 그 결과 자신들도 예전처럼 다시 집단최면에 빠질까 더욱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런 다툼은 너무나 소모적이고 명분도 없다. 이명박의 4대강사업과 차벽처럼,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처럼, 세월호의 비극처럼, 박근혜의 무능과 독재처럼 우리 앞에는 ‘악’이라고 규정할 만한 공통의 적이 버티고 있다. 그들은 아직도 사회 곳곳에서 기득권의 네트워크를 공고히 유지하며 단지 포복으로 자세를 낮추고 있을 뿐이다. 지금의 이 다툼은 외계인이 공격해오는 와중에 지구인들끼리 싸우는 거나 다름없다.

물론 생각이 서로 다를 수 있다. 문제는 지나치게 공격적인 표현, 과도하게 분노하는 모습이 양쪽 모두에서 너무 흔히 보인다는 점이다. 이러면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 지나침 자체로 발언의 의미와 무게를 상실하고 단지 싸움만을 확장시킬 뿐이다. 상대의 주장이 일리가 있어도 그가 내게 욕하거나 악인으로 몰아붙이거나 광인으로 규정한다면 이미 이해와 타협은 물 건너간다.

계속 이런 식으로 간다면 섭섭함과 오해가 아니라, 진짜 증오와 저주로 변해버릴 것이다. 그래서 일단 한 가지 제안하고자 한다. 지금 유행하는 멸시의 호칭부터 중단하자. ‘한걸레’니 ‘달레반’이니 하는 말들, 사실 누워서 침 뱉기일 뿐이다. 누구 말마따나, 우리가 남인가? 남이면 얼마나 남인가. 비판할 때 하더라도 예의는 지켜야 대화가 가능하다. 비웃지 말고 납득하도록 풀어내야 고개가 끄덕여진다.

나에게도 트라우마가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투신하기 불과 며칠 전 검찰 수사를 받던 시절, 블로그에 ‘이제 노무현을 버려야 하는가’라는 글을 쓰며 그의 부도덕성을 성토했기 때문이다. 그가 서거한 뒤 그 글을 도로 읽으며, 냉철과 객관성을 가장한 내가 실은 얼마나 냉정하고 잔인했는지 깨달으며 후회의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러고는 그가 떠난 지 5시간 만에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눈물을 흘리며 추모의 글을 써서 에 게재했다. 쓰는 단어 하나하나마다 내 자신의 잔인함과 경솔함을 상기시켜 고문하듯 괴롭혔다.

그 기억과 고통을 아직도 간직하기에, 나는 언론과 지식인보다는 단순하고 순수한 열혈 국민들을 변호하고 싶다. 강성 문재인 지지자들 말이다. 그들을 홍위병이나 나치, 심지어 극우 태극기 부대와 동일시하는 비난까지 등장하는데 이것은 언론과 지식인이 국민에게 보일 태도가 아닐뿐더러 본질과 무관한 지적이다. 지금 이 순간 문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원하는 것은 그를 김정은처럼 받들고 신격화하려는 게 결코 아니다. 되레, 만약 그가 전직 대통령처럼 헌법을 유린하고 업무를 게을리하며 국정 농단을 펼친다면 가장 먼저 비판하고 단죄할 사람이 바로 그들이다. 단지 기나긴 기다림 끝에, 지금 현재 누가 봐도 좋은 방향으로 세상을 바꿔가는 대통령에 대한 존중과 예의와 성의를 함께 기쁨으로 나누고 싶은 것이다. 거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 마음 상하고, 한편으로 노무현 대통령에게 들이대졌던 잔인함의 화살이 언론을 통해 반복될까봐 두려운 거다. 충분히 이해할 만하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인간 사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고민하는 진보 언론과 지식인들이라면 이런 국민을 따뜻하게 감싸줄 줄도 알아야 한다. 다소 억울하더라도 그들의 트라우마와 예민함을 이해하지 못하고 “문빠들 덤비라”며 국민을 상대로 주먹을 들이밀거나 욕설과 빈정거림으로 대응하는 게 언론과 지식인의 책무일 리는 없다.

나 역시 문재인 대통령에게 그때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는 것만큼은 절대 보고 싶지 않다. 내 힘이 닫는 데까지 지키고 보호하고 싶다. 그 시절 내 고통의 크기만큼 말이다. 하지만 그를 보호하기 위해 모두를 적으로 돌릴 생각은 더욱 없다. 그것은 도리어 대통령을 궁지에 몰아넣는 결과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국회는 여소야대다. 대통령이 지금처럼 시원하게 국정을 펼치는 것은 곧 벽에 부딪히게 된다. 이제 박근혜 재판도 있고 이명박 수사도 있을 것이고 수구 반민주 세력의 반격도 그만큼 거세질 것이다. 정말 중요한 장기전을 앞두고, 아직 그 전투는 시작도 안 했는데 서로 욕하고 비웃는 것으로 우리가 얻을 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나는 비록 열렬한 문재인 지지자임에도 불구하고, 호칭 문제나 사진의 각도 같은 것들보다 훨씬 명백하고 심각한 왜곡과 악의적인 공격이 일어나지 않는 한, 우리와 마찬가지로 9년간 어둠 속에서 버텨온 진보언론을 믿고 존중하려 한다. 대다수의 국민이 분노하고 절망하면서도 생활에 큰 지장은 받지 않고 이명박과 박근혜 시대를 살아온 반면, 이른바 ‘한경오’라고 하는 진보언론들은 엄청난 정치적·경제적 압력과 개인적 생활고를 겪으며 그 명맥을 지켜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이 노고는 그리 쉽게 무시될 것이 아니다.

그저, 를 비롯한 언론과 지식인들께 부탁드린다. 조금 더 섬세하게 우리 국민을 대해주시기 바란다. 국민을 상대로 싸움하려 들지 마시기 바란다. 휴머니즘과 정의를 생명으로 하는 언론과 지식인이 자기 국민을 대국적으로 이해하고 감싸지 않는다면 대체 누가 그들의 편에 선단 말인가.

원종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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