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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눈을 감습니다. 심호흡을 합니다. 그리고 떠올려봅니다. 마지막으로 달팽이를 봤던 장소를요. 어라, 바로 지난해네요. 그런데 이거 장소가 이상합니다. 달팽이 5마리가 나란히 누워 있네요. 식탁 위인데요. 프랑스 파리 출장 때군요. (죄송) 정신 차리고 더 앞으로 돌아갑니다. 14년 전 비가 그쳐 촉촉해진 마당 위를 달팽이가 느릿느릿 기어가네요. 담장 위까지 거의 올라간 또 한 마리의 달팽이를 들어 땅으로 내려놓은 제가, 씩 웃습니다. (또 죄송) 여긴 제 고향 집입니다. 흙과 나무, 채소가 가득한 단층 주택이니 9층 아파트와는 한참 거리가 머네요.
제 과거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는 건 완전 실패입니다. 정공법으로 들어갑니다. ‘달팽이 박사’인 강원대 권오길 명예교수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대뜸 몽타주를 요구합니다. ‘큼직하다’고 했습니다. ‘왕달팽이’라고 하네요. 달팽이집 지름이 대략 7cm에 짙은 갈색인 녀석인데요. 생김새가 맞다면 ‘옆집 이동설’이 유력하답니다. 식용인 이 녀석은 관상용으로도 인기가 많은데요. 윗집, 아랫집, 옆집에서 관상용으로 키우던 이 녀석이 베란다를 통해 넘어왔을 가능성이 높답니다. 이 녀석은 속도도 빨라서 ‘달팽이계의 우사인 볼트’로 통한다고 하니, 이 정도 이동하는 건 일도 아니라고 하네요.
다른 가능성도 충분히 있답니다. 달팽이집 지름이 2cm 정도에 옅은 갈색이면 ‘명주달팽이’인데요. 이때는 ‘화분부착설’도 말이 된답니다. 화분 흙 안에 달팽이나 알이 딸려온 거랍니다. 이 녀석은 화분이나 채소밭에서 흔하게 볼 수 있거든요. 같은 맥락에서 ‘상추(채소)부착설’도 가능합니다. 단 농약이 묻지 않은 유기농 상추일 경우입니다. 달팽이집이 없는 ‘민달팽이’ 역시 두 학설 다 가능합니다.
좀더 심오한 세계로 들어가보겠습니다. 대망의 ‘자구설’입니다. 1층 화단에서 9층까지 달팽이의 힘으로 올라왔을 가설인데요. 달팽이는 대개 1초에 24mm 이동합니다. 9층 높이가 대략 23m이니 이 거리를 가려면 꼬박 2시간39분쯤 걸립니다. 생각보다 빠르죠. 과학적으로 가능한 가설, 맞습니다.
물론 반대론도 거셉니다. 연체동물 중에서도 복족류인 달팽이에겐 배가 곧 발입니다. 술 마시고 복족류로 변신하는 인간도 몇 명 봤습니다만, 아무튼 달팽이는 배 전체 근육이 물결치며 앞으로 나가게 되는데요. 이 과정엔 미끈미끈한 점액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건조한 아파트 벽을 쉼없이 이동하면 점액이 금세 바닥나 추락할 수 있다고 하네요. 이렇게 무모한 달팽이는 드물겠죠.
갑자기 이 녀석들이 우리 집에는 왜 안 오는지 궁금해졌습니다. 3층밖에 안 되고, 종종 화분도 사오는 데 말이죠. 경기도 시흥에서 ‘팽이 농장’을 운영하는 마승현 사장은 “냄새에 민감한 달팽이는 역겨운 냄새를 싫어한다”고 합니다. 헉, 설마 그것 때문은 아니겠죠. 한번 비가 온 뒤엔 베란다 문을 열어 달팽이를 기다려봐야겠어요. 아, 걱정 마세요. 저에겐 페×리즈가 있거든요!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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