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값싸고 포만감만 준다면 깊은 맛, 얕은 맛 안 가리고 위장에 욱여넣던 초년병 시절, 점심 한 끼를 위해 오전 11시부터 메뉴 고민을 시작하는 직장인들 심리를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선배들 손에 이끌려 식도락의 세계에 입문한 뒤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3만원짜리 꽃등심이든 3천원짜리 김치라면이든,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의 운명은 똥이자 살인 것을, 입안에 머무르는 20~30분의 쾌락을 위해 메뉴와 음식점을 고르고 땡볕 아래 줄서기도 마다 않는 수고를 감당할 만큼 제 입맛이 고급스럽게 진화하지 못한 탓입니다.
그런데 이런 무심함에서 예외인 음식이 있습니다. 냉면입니다. 진한 젓갈 맛의 남도 음식에 길들여진 제게, 10년 전 서울 을지로에서 맛본 평양냉면은 충격이었습니다. 숭늉처럼 밍밍한 육수가 겨자와 식초를 만나 빚어낸 경이롭도록 맑고 깊은 맛. 순간 저는 부르짖었습니다. “오, 미니멀리즘의 위대한 승리여~.” 그 이후 냉면만은 아무 데서나 먹어선 안 된다는 게 제 신조가 됐습니다. 가령 X기자가 좋아하는 칼국숫집 왕냉면이나 이제훈 편집장이 좋아하는 기사식당 칡냉면을, 저는 손톱 밑에 대바늘이 들어와도 안 쳐다볼 것입니다. 그것은 냉면에 대한 모독을 넘어, 서북방 동이족의 유구한 음식문화에 저지르는, 반달리즘에 버금가는 문화적 테러라 여기는 탓입니다. 저의 냉면 예찬은 여기까지입니다.
독자님 말대로 ‘쌈마이’든 ‘진품’이든 스테인리스 그릇에 담겨 나온다는 것은 냉면의 공통 운명입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애초 냉면의 용기는 놋그릇이었습니다. 지금도 몇몇 오래된 냉면집에선 고집스럽게 놋대접을 씁니다. 민속학자인 주강현 제주대 석좌교수는 “놋그릇이 쓰인 건 냉면의 차가운 성질과 관련이 깊다”고 말합니다. 잔치국수나 칼국수처럼 적절한 온기를 유지할 필요가 없는 냉면은 굳이 열전도율이 낮은 뚝배기나 자기 그릇에 담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금속 그릇은 그 자체로 냉기성의 시각효과를 발휘할 뿐 아니라, 전도율이 높아 담긴 음식의 냉기를 먹는 사람의 신체(손바닥)에까지 고스란히 전해줍니다. 냉면을 먹으면 입안과 위장뿐 아니라, 눈과 손까지 덩달아 시원해지는 경험을 누구나 해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1960~70년대를 거치며 놋그릇은 스테인리스 그릇으로 바뀝니다. 산업화와 함께 철강이 주력산업이 되자 내수 확장을 위해 스테인리스 용기 보급이 범국가적 사업으로 펼쳐진 탓입니다. 주 교수는 회고합니다. “장사꾼들이 동네마다 돌아다니며 놋그릇 가져오면 스테인리스 그릇을 내줬다. 가가호호 엿 바꿔먹듯 놋그릇을 처분하던 시절이었다. 냉면집이라고 별수 있었겠나.”
“선배, 냉면 어때, 냉면?” X기자, 오늘도 여지없이 수작을 걸어옵니다. 마음이 동합니다. 그래도 참습니다. 다음달 날아들 카드 명세서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습니다. 요즘 냉면 너무 비쌉니다. 1년 새 2천원이 올랐습니다. 왜 짜장면은 묶어두면서 냉면값은 방치하는 겁니까. 마음 같아선 외치고 싶습니다. “허울 좋은 MB 물가, 냉면 외면 웬 말이냐.”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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