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900호를 맞아 과 각별한 인연을 이어온 이들에게 글을 부탁했다. 독자편집위원회 위원을 ‘무려’ 3번이나 한 김종옥 독자, 최장기 연재물 ‘한홍구의 역사 이야기’를 쓴 한홍구 교수, 에서 창간부터 13년을 일하며 평기자에서 편집장까지 완주한 고경태 전 편집장, 독자에서 인턴을 거쳐 기자까지 된 오승훈 기자가 ‘나와 ’을 추억했다. 여기에 싣지 못한 무수한 ‘나와 ’ ‘우리만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고백이 되기를 바라며 글을 싣는다. 편집자
<hr>영화배우 황정민이 ‘밥상론’을 수줍게 말할 때, 실은 한구석으론 그의 숟가락을 기꺼이 받아줄 밥상이 있다는 것 자체가 몹시 부러웠다. 이 900호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서야 문득 내가 남의 수고로움에 좀 둔한 인간이었나 했다. 900번이나 차려낸 밥상을 꼬박꼬박 받아먹고는 그 공을 몰라주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차려준 공보다 먹어준 공이 대단하다 여겨왔으니 참 무심했다 싶다. 점점 더 남이 차려놓은 밥상이 좋은 걸 보니, 남이 차려놓은 걸 한자리에서 날름날름 집어먹는 게 더 좋은 걸 보니, 나는 어느새 나이도 감성도 낡은 게으른 구닥다리가 돼가는 게 분명하다. 그래도 그중 썩 괜찮은 밥상을 찾아내는 후각은 망가지지 않았으니 아직 치매까지 든 건 아닌 모양이다.
칭찬이 과했다 싶긴 하지만, 어쩌랴. 분명한 사실은 이 그동안 내게 잘 차린 밥상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말 잘 듣는 모범생처럼 의 세상 소식을 들어왔고, 심지어 “이런 책 있네” 하면 그 책을 사서 읽고, “이 영화 괜찮네” 하면 그 영화 찾아보는 비주체적 짓거리(!)도 서슴지 않고 저질렀다. 그렇지만 기웃거리기 좋아하는 오지랖 넓은 중년 여인이 그래도 가는 곳마다 같은 일에 분노하고, 같은 일에 소리치고, 그다지 떨어지지 않는 감성을 공유하는 동지를 두루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같은 오랜 친구를 둔 데서 오는 내공의 힘이었다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니 참 홍복이다.
여전히 은 ‘구백 번 구른 구미호’처럼 노련하고 무시무시한데다 섹시하기까지 한 친구가 되어줄 것이니,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 해서, 이참에 덕에 사회성 풍부한 아이로 성장한 우리 자폐 아드님, 대입 합격 턱을 핑계로 떡이라도 해서 편집실을 찾아볼까 싶다. 그동안 밥상, 잘 받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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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의 밤샘
고경태 한겨레 토요판 에디터·2005~2006년 편집장참 버릇이 없었다.
지금 같았으면 ‘헐’이라고 혀를 차거나 ‘헉’ 하며 경악했으리라. 아무개 선배의 발언은 그만큼 문화 충격이었다. 30대 중반의 팀장급이던 그는 출판국장과 광고국장, 편집장 등 새카맣게 높은 윗선배들을 앞에 두고 ‘호통’을 쳤다. 창간 준비 과정의 부실함을 지적하며 간부들을 가차 없이 비판하고 성토했다. 목소리도 천둥 같았다. 1994년 2월이었다. 창간 한 달 전이었다. 취재·편집·광고·판매·디자인팀 30여 명이 충북 충주호 근처의 MT 장소에 모였다. 돌아가며 인사 겸 한마디씩 하는 자리였다. 나로선 다들 초면이었다. 입사가 확정된 뒤 출근을 일주일 앞두고 MT에만 참가한 상태였다. 당당하고 버릇없는 그 선배의 모습이 3년간 다닌 전 직장의 선배들과 오버랩됐다.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 신문사 분위기 골 때린다.’
점입가경이었다. 입사를 해보니, 선배들은 죄다 버릇이 없었다. 고분고분한 이들이 ‘희귀종’이었다. 편집회의를 하다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낀 적도 있다. 오가는 논박에 칼날이 서 있었다. 재떨이라도 날아다닐 것같이 살벌했다. 한번은 사장이 무언가를 의논하러 왔다가 말도 못하게 씹혔다. 아니, 그래도 사장님인데…. 내 눈엔 선배들이 못돼먹기 짝이 없었다. 위계질서는 팔아치운 것 같았다. 한데 덤으로 고정관념까지 팔아치운 듯 보였다. 예절은 없었지만, 열려 있었다.
기자 혹은 편집자로 살아가는 게 재밌다면, 이 일이 창의적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피곤하다면, 역시 이 일이 창의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창의성은 관행과의 싸움이다. 과거의 방식을 의심해야 한다. ‘새로운 시사주간지’는 신천지를 개척하는 일이었다. 선배들은 고리타분하게 관행을 들먹이지 않았다. 오만과 편견은 짝이 아니었다. ‘오만과 무편견’이 지배했다. 좋게 보자면, ‘패기’와 ‘오픈마인드’였다. 그런 선배들과 함께했음은 행운이었다.
13년을 일했다. 스물일곱에서 서른아홉까지. 은 내 직업전선에서 가장 긴 플랫폼이었다. 창간호부터 631호까지 만드는 동안, 1천 일 넘는 밤을 새웠다. 컴퓨터 모니터를 쳐다보다 사무실에서 동트는 아침을 맞은 게 며칠이었던가. 내 파괴된 시신경과 뭉쳐버린 어깨 근육은 오로지 탓이라고 확신한다. 병원비라도 확 청구하고 싶지만 참는다. 그러기엔 배운 게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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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나’라는 주제로 대표적 필자의 한 사람으로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이거 어떻게 하지?’ 하고 잠시 고민했다.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중간에 좀 쉬긴 했지만 내 이름을 단 고정란을 갖고 쓰고 싶은 대로 글을 썼으니 외람되지만 의 대표적 필자로 꼽히는 건 당연할 수도 있다. 내가 잠시 고민했던 것은, 내가 단순한 외부 필자라기에는 과 남달리 ‘유착’돼 있었기 때문이다.
베트남전 진실위원회에서 만난 ‘웬수’ 같은 고경태의 꼬임에 빠져 내가 ‘한홍구의 역사 이야기’를 연재하기 시작할 무렵, 은 분명 미쳐 있었다. 어떻게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관련 캠페인을 1년 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베트남전 진실위원회 활동의 일환으로 글을 몇 번 썼는데, 그게 반응이 좋았던지 2001년 1월 342호부터 고정란을 맡게 되었다. 내가 연재를 시작한 지 한 달도 안 돼 345호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대한 기사를 최초로 실었고, 나 역시 병역거부 운동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2004년 베트남전 진실위원회는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로 확대·개편됐는데, 이때는 가 상당한 지면을 할애해 10회가량 보도해주었다.
그러니 내가 지난 10여 년간 주력했던 베트남전 진실위원회, 병역거부 연대회의, 평화박물관이 모두 과 함께한 것이다. 2004년 가을, 나는 국가정보원 과거사위에 차출됐는데 2006년이 되자 위원회 활동으로 너무 경황이 없었다. 더구나 에도 주5일제 근무가 도입돼 마감 날짜가 월요일에서 금요일로 변경됐다. 조사 중인 사건에 대해 쓸 수도 없고, 주말에 따로 준비할 틈도 없고, 정말 원고 쓸 틈이 없었다. 금요일 저녁 8시가 마감인데 밤 9시에 책상머리에 앉아 ‘무얼 쓰지?’ 하고 그때부터 생각한 적도 몇 번 있었다. 원고 매수는 40장. 새벽 4시에 원고를 보내니 나도 죽을 지경이지만, 편집·디자인·인쇄 모두 내 원고 오기만 기다리며 밤을 새우니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그래서 2006년 여름 연재를 중단하기로 마음먹고 그 뜻을 편집진에 전했다. 편집진은 내가 그래도 명색이 의 최장수 코너를 맡은 ‘인기 필자’였는데, 빈말이라도 ‘연재를 더 해야 할 텐데’ 하고 말리지도 않았다. 내 지은 죄가 하늘에 가닿을 만했지만 그래도 섭섭했었었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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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키드’의 다짐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중학교 2학년 때, 우연히 서점에서 박세길씨의 를 읽고 불온서적의 세계로 빠져들던 나는, 매형이 처가에 두고 간 를 보며 일상적으로 의식화(?)의 세례를 받았다. 그러다가 가 주간지를 창간한다는 소식을 듣고 제호 공모에 응모도 했더랬다. 다행히 떨어졌다. ‘한겨레’ 같은 순한글로 지어 보냈는데 지금 생각해도 뜬금없었다.
매형을 통해 을 얻어보다, 대학 입학 선물로 첫 정기구독을 하게 됐다. 어설프게 읽은 사회과학책 때문에 극단적 사고를 가지고 있던 난, 을 보며 세상 보는 눈을 키웠다. 베트남 민간인 학살 사건 기사를 보고 구조가 인간을 어떻게 괴물로 만드는지 알았고, ‘쾌도난담’을 읽으며 가장 치명적인 공격은 ‘풍자’임을 배웠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칼럼을 읽고 학교 전공 공부에선 맛보지 못한 역사학의 실천성을 확인했고, ‘김소희의 오마이섹스’를 읽고 도발적인 글쓰기의 매력을 느꼈다. 내게 은 똑똑하고 재미진 친구였다. 난 ‘한겨레21키드’였다.
대학 졸업 뒤 에서 인턴기자로 일하며 그 속살을 엿볼 기회를 얻기도 했다. 책에서 기사와 이름으로만 만나던 기자들과 함께 떠났던 초여름 대성리 MT를 잊지 못한다. 그날 난 ‘육체의 샴쌍둥이’ 같은 평생의 선배를 만났다. 그와 가까워진 그날을 내 생애 가장 큰 길일 가운데 하나로 치고 있다.
그렇게 나를 키운 매체에서 밥벌이를 하는 지금, 고된 마감에 정신없다가도, 가끔 흐뭇함에 젖는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도 이 그런 ‘친구’가 될 수 있도록 애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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