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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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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래된 물건] 우렁찬 소리까지 사랑스러워

등록 2007-12-29 00:00 수정 2020-05-03 04:25

▣ 박지용 서울 강남구 도곡1동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한 지도 어느덧 6년이 다 돼가는 내 일상에서 애착이 가는 물건 하나가 있다. 바로 이모님께서 주신 낡은 세탁기이다. 낯선 곳에 정착하려면 꼭 필요한 물건 중 하나인 세탁기. 우연치 않게 서울에 방을 구하면서 세탁기를 사야 하나 했는데 마침 어머니께서 이모님이 주신 거라며 써보라고 하셨다. 어차피 혼자 사는데 세탁기가 잘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 기분 좋게 받았다. 큰이모님이 쓰시다 작은이모님이 몇 년 더 쓰신 뒤 혼자 살게 된 조카가 생각나서 주신 세탁기였다.

88 서울올림픽 기념 마크가 점차 희미해지기는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쓰고 있는 동안에도 잔고장 한 번 안 난 게 신기하고 대견스럽기까지 하다. 얼마 전 이사를 했는데 끄떡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세탁기, 정말이지 보면 볼수록 애착이 더 간다. 가끔 어머니가 올라오셔서 세탁기를 돌리며 하시는 말씀. “오래돼도 고장이 안 나서 좋기는 한데, 소리가 점점 시끄러워져서 바꿀 때가 되지 않았냐.” 난 그 시끄러운 소리마저도 익숙하고 정겹다.

물건은 오래 쓸수록 더욱 애착이 가고, 더구나 고장이 안 난다면 그 애착은 더해지는 것 같다. 오래 쓰면 질려서 일부러 고장을 내서 새 제품을 사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만, 난 정말 그렇게는 하고 싶지 않다.

다만 걱정(?)스러운 부분이 있다면 결혼을 조만간 할 텐데, 그때가 되어서도 세탁기가 고장이 안 났다면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지금 심정으로는 예비신부에게 이 세탁기를 계속 써보자고 할 것 같은데, 솔직히 자신이 없다. 그래도 내가 쓸 수 있는 그날까지 고장이 안 났으면 좋겠고, 누군가에게도 기분 좋게 줄 수 있는 그런 세탁기로 영원히 남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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