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1학년 때의 어느 날 큰언니가 아빠 몰래 검은색 네모진 물건을 사왔다. 바로 삐삐였다. 대학생이던 큰언니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마련한 삐삐를 우리 자매들은 행여나 흠집이 날까봐 신줏단지 모시듯 조심스럽게 구경했다. 당시 삐삐의 창엔 숫자만이 찍혔기에 나는 큰언니에게 매일 0455(빵사오오)라는 번호를 남겼고, 저녁마다 언니의 두 손은 무거워졌다. 우리 자매는 옹기종기 모여서 번호 연구를 하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귀했던 삐삐가 점차 유행하면서 내가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땐 친구들이 집 전화번호 대신 삐삐번호를 부를 정도가 됐다. 아! 그 흔했던, 하지만 나는 갖지 못했던 삐삐. 난 친구들에게 언니 번호를 남발하고 다녔고, 친구들의 연락에 귀찮아진 언니는 내 생일날 최신식 흰색 삐삐를 사줬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새 학기가 되고서 사서함 확인하는 재미에 푹 빠졌다. 하지만 수업시간에 반 친구들의 삐삐 소리가 울릴수록 교내 단속은 심해졌고, 학생주임 선생님이 삐삐 검사를 했을 땐 어찌나 긴장되던지 청소함이며 화분, 교복 안주머니 곳곳에 숨기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다들 떨고 있었다. 그 뒤 차츰 삐삐는 휴대전화에 밀리기 시작했고, 나도 수험생이 되면서 고별을 고했다.
대학교에 입학한 뒤 최신식 휴대전화를 샀지만 매일 새 기능으로 출시되니 ‘한달 뒤면 골동품이 되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컴퓨터처럼 지능 좋은 휴대전화에 환멸을 느끼며 서랍 속에서 삐삐를 꺼내봤다.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삐삐 밥을 먹였더니, 다시 살아났다. 에델바이스, 옹달샘, 러브스토리…. 지금 들으면 조악한 느낌이 나는 벨소리들에 웃음이 난다. 그 시절 삐삐에도 나름대로 다양한 벨소리가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휴대전화를 잠시 꺼두고 주먹만 한 삐삐를 사용해보려 한다. 친구들을 만나면 한번 보여주려 한다. 9년밖에 안 된 물건인데, 이렇게 초라한 벨소리를 가지고 있다니. “아! 그땐 그랬었지”라며 ‘추억은 방울방울’하겠지?
박서형/ 광주시 남구 봉선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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