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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 캠페인] “총살당한 동료를 내 손으로 묻었다”

등록 2007-07-06 00:00 수정 2020-05-03 04:25

오키나와로 끌려간 강제징용자 강인창씨, 돌아오지 못한 1200명의 한을 달래다

▣ 요미탄(오키나와)= 글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사진 스나미 게스케 프리랜서 기자 yorogadi@hotmail.com

강인창(86)씨의 오키나와 방문은 이번이 여덟 번째다. 1944년 여름, 그의 첫 오키나와행은 느닷없이 시작됐다. “음력 5월17일(양력 7월8일)이었던가?” 노인은 얼굴을 찌푸리며 얘기를 풀어냈다. 가족과 보리 추수를 하던 중이었다. 일본인 경무주임과 조선인 면 서기가 그의 팔을 잡아 영양경찰서로 연행했다. 경찰은 강씨에게 “대구에서 비행장 닦는 일을 하는 데 길면 석 달, 짧으면 두 달이면 끝난다”고 말했다. 그날 밤 군청에서 잠을 잤고 이튿날 9시30분 사람들과 목탄차 8대에 나눠 타고 안동으로, 안동에서 기차로 대구로 이동했다. 그 와중에 도망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구로 간다고 속여 일본으로

속았다는 사실을 안 것은 대구에서였다. 대구에서 군복을 나눠줘 입었다. 겨울 군복이었다. 소대장의 이름은 하세가와였고, 부대 이름은 ‘球 8885’였다. 일주일 동안 경례, 정렬 보행, 방공호 대피 요령 등 군사훈련을 받고 7월25일 오후 5시30분 화물차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 맞는 게 두려워 어디로 가는지 묻지 못했다.

부산에서 탄 배가 향한 곳은 시모노세키였다. 다시 5일 동안 훈련을 받았다. 7월31일 배를 타고 가고시마로 이동했다. 가고시마 앞에서 배는 암초에 걸렸는지,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았는지 휘청거렸다.

오키나와에 상륙한 것은 8월12일이다. 강씨와 같이 경북 북부지방에서 오키나와로 끌려온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은 3천 명에 달했다. 하루 쉬고 선창에서 등짐을 날랐다. 1500명씩 두 개 조로 나눠 반은 아침에, 반은 오후에 폭탄·총알·군량미 등을 날랐다. 오키나와 본섬의 남쪽에 있는 요나바루에서 일하다 이듬해 2월 오키나와 본섬의 부속 도서 중 하나인 게라마 제도의 아카섬으로 이동했다.

섬에서의 훈련은 단순했다. 배에 ‘바다의 가미가제’인 특공정을 2대 싣고 동굴 속에 감췄다 바다에 띄웠다 하는 훈련을 반복했다. 특공정은 폭탄을 설치한 어뢰 모양의 작은 잠수함을 타고 적 함정에 몸을 부딪쳐 자폭하는 배를 말한다. 일본군은 한 달에 집에다 100원, 용돈으로 30원을 준다고 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아카섬에 대한 미군의 함포 공격은 1945년 3월14일부터 이틀 동안 계속됐다. 일본군은 산으로 도망쳤다. 3월26일 미군이 상륙했다. 훈련했던 특공정은 하나도 띄우지 못했다. 식량이 떨어져 조선인 군속들은 오키나와 주민들의 고구마를 훔쳐 먹었다. 13명이 잡혔다. 1945년 4월19일 저녁 8시에 일본군 3명은 고구마를 훔친 다른 조선인 13명을 붙들어 매고 길을 떠났다. 한 명이 도망쳤다. 강씨는 “나를 포함한 세 명은 이들을 묻으러 따라갔다”고 말했다. 12명이 총을 맞고 쓰러졌다. 구덩이는 배가 고파 깊이 파지 못했다. 채 숨이 끊어지지 않은 동료들을 묻고 흙으로 덮었다. 그 사건은 강씨의 평생 한으로 남았다.

이후 강씨는 미군에 투항해 포로가 됐고, 이듬해 고국으로 돌아왔다. 함께 떠났던 3천 명 가운데 1200명이 돌아오지 못했다. 일본군의 군속으로 숨진 그들은 아마도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 있을 것이다.

유골을 못찾은 대신 위령비 세워

두 번째 방문은 53년 만에 이뤄졌다. 1997년 7월이었다.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전국교환회’ 행사에 초청된 강씨는 “그때 죽은 동료들의 유골을 고국에 가져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해 12월 유골 조사가 시작됐지만, 뼈는 찾을 수 없었다. 일본인들은 대신 위령비를 세우기로 하고 이름을 ‘태평양전쟁, 오키나와전 피징발자 한(恨)의 비’로 정했다. 5개월 동안 700명이 700만엔을 모았다. 그 돈으로 1999년 8월12일 경상북도 영양군에서 ‘한의 비’를 제막했고, 2006년 5월13일 똑같은 비를 오키나와 요미탄촌에 세웠다. 비석 안에서 일본군이 총의 개머리판으로 눈을 가린 조선인 징용자의 목을 후려치고 있고, 이 광경을 바라보는 조선인 어머니가 아들의 무릎을 부여잡고 울부짖고 있다. 6월22일, ‘한의 비’ 1주년 개막식에 참가한 강인창씨는 “고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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