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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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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 캠페인] 누가 오키나와를 기념하는가

등록 2007-07-06 00:00 수정 2020-05-03 04:25

패전 앞둔 일본군이 강제한 주민들 집단자살 현장…그 끔찍한 죽음은 어떻게 천황에게 바쳐졌나

▣ 요미탄·나하(오키나와)=글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사진 스나미 게스케 프리랜서 기자 yorogadi@hotmail.com

미군이 오키나와 본섬에 상륙한 것은 1945년 4월1일이다. 1942년 미드웨이에서 일본 해군에 대승을 거둔 미군은 사정없이 일본군을 몰아붙였다. 1944년 4월 사이판이 깨졌고, 한 달 뒤 다시 괌이 깨졌다. 이듬해 1월 필리핀이 함락됐고, 3월엔 이오지마가 떨어졌다. 파죽지세였다. 오키나와의 중심 나하시에서 서쪽으로 10km쯤 떨어진 게리마열도에 상륙한 것은 그해 3월26일이었다. 오키나와 본섬에 주둔한 일본군 32군 본대는 곧 오키나와에 몰아칠 미군에 대비해 전원 옥쇄를 각오하고 있었다. 미·일 두 나라 군대 64만 명이 동원된 석달간의 처절한 싸움의 시작이었다.

아이의 머리를 으깬 아비…

미군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곳은 오키나와 본섬 서남쪽 해안 마을 요미탄촌 앞바다였다. 마을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일본군은 주민들을 상대로 “미군이 오면 큰 고통을 받다가 죽을 것”이란 말을 되풀이 가르쳤다. 그들은 “여자들은 강간을 당한다”고도 말했고, “천황의 명을 따라 수치를 당하지 말고 깨끗이 최후를 마친다”는 전진훈(戰陣訓)도 가르쳤다. 일본군은 오키나와인을 믿지 않았다. 오키나와 주둔 32군(총병력 8만6400명) 사령관 우시지마 미쓰루는 “오키나와어로 말하는 사람은 간첩으로 처벌한다”는 군회보를 공포하기도 했다.

요미탄촌 주민들은 산속 깊은 곳의 동굴로 숨어들었다. 사람들은 그 동굴을 ‘치비치리가마’라고 불렀다. ‘가마’는 오키나와말로 동굴이라는 뜻이다. 요미탄촌에서 만난 치바나 쇼이치(59)는 “그날 할아버지가 미군에게 목숨을 잃었다”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딸(치바나의 이모)과 함께 살고 있었다. 딸에게 지적 장애가 있어, 할아버지는 공동생활을 해야 하는 동굴에 갈 수 없었다. 미군이 상륙했다. 나무 덤불에 숨어 있던 그의 할아버지는 딸을 위해 죽창을 들고 미군에게 덤벼들었다. 할아버지는 미군의 총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숨졌다. 미군은 딸을 건드리지 않았다. 치바나는 “그때 할아버지는 아마 70대가 아니었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주민들이 숨어 있던 치비치리가마는 이미 아비규환으로 변한 뒤였다. 사람들은 동굴 속에서 서로를 죽여대고 있었다. 일본군은 주민들에게 수류탄을 주고 갔다. 작동법을 몰라 불발탄이 많이 생겼다. 노끈으로 서로의 목을 졸랐고, 칼로 손목의 대동맥을 그었다. 아비는 제 자식의 머리를 잡아 바위에 깨뜨렸다.

가마 안에 있던 140명 가운데 83명이 죽었다. 가마 안은 지금도 사람의 유골이 발굴돼 유족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다. 가마 입구에는 죽은 사람들의 이름과 나이가 적힌 위령비가 남아 당시의 참상을 증언하고 있다. 죽은 83명 가운데 나이를 확인할 수 있는 82명의 나이를 세어봤다. 채 10살이 못 돼 죽은 아이들이 24명, 10살 이상 20살 미만의 청소년들이 24명이었다. 숨진 이들 가운데는 ‘스에’라는 이름이 붙은 1살짜리 갓난아이도 있다. 가마 입구에는 “유족 외엔 출입이 금지된다”는 팻말이 선명했다. 취재진과 함께 현장을 찾은 ‘평화와 생활을 결속하는 모임’의 마메다 도시노리 사무국장은 “주민들은 아마도 살고 싶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 아비의 손에 목숨을 잃은 아이들이 죽는 순간 “야스쿠니에서 만나자”라고 다짐했는지는 알 수 없다.

치바나 쇼이치는 “오키나와 전쟁은 군대가 결코 주민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교훈을 알려준다”고 말했다. 후세에 ‘오키나와 전쟁’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싸움에서 숨진 오키나와인은 20만 명이 넘는다. 1944년 당시 오키나와 인구 59만480명의 3분의 1이다. 치비치리가마와 같은 끔찍한 강제집단사도 최소 17곳에서 벌어져 982명이 숨졌다. “쇼와 천황이 전쟁을 끝내겠다는 결심을 좀더 일찍 했다면 그 수많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겠죠? 나가사키도, 히로시마도 말입니다.” 치바나가 말했다. 군대는 주민들을 버렸고, 투항도 허락하지 않았다. 주민들은 대안이 없었고 그렇기에 죽음으로 내몰렸다. 그는 “일본과 천황은 오키나와를 버렸기 때문에” 히노마루와 기미가요를 반대하는 요미탄촌민들을 대표해 1987년 10월26일 전국 소프트볼 대회에서 히노마루를 태웠다. 그는 8년에 걸친 지루한 재판 끝에 3100엔(히노마루 깃발값)의 기물파손죄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오키나와의 반미운동가 도미야마 마시히로(55)는 “모든 오키나와인들이 가족 한두 명을 야스쿠니신사에 묻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외삼촌 3명이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 있다. 도미야마는 “천황과 국가가 오키나와에 해준 게 없기 때문에 별로 고마운 마음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전쟁에 자식 셋을 잃은 외할아버지의 생각은 달랐다. “자식들이 어디서 죽었는지도 모르니까 기도할 데가 필요했던 거죠.” 외할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야스쿠니신사에 꼭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신사를 방문하고 돌아온 외조부는 변해 있었다. 야스쿠니신사에는 군복 입고 히노마루를 감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 옆의 전쟁박물관 류슈칸은 옛 전쟁을 미화하고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천황이 텔레비전에 나오면 신문지를 던지며 화를 내다가 5년 뒤 숨졌다.

피해자가 공로자로 바뀌는 연금술

오키나와의 유명한 민중조각가 긴조 미노루(67)는 아버지를 야스쿠니신사에 묻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동갑이었다. 두 사람은 18살 때 결혼했고, 아버지는 군대에 자원입대했다. 아버지는 파푸아뉴기니에서 22살에 숨졌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국가가 신으로 모셔주는 것은 감사할 일”이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일본 정부로부터 매달 20만엔의 유족연금을 받았다. “2년밖에 같이 살지 않았는데 그것으로 어떻게 남편을 이해합니까.” 긴조는 대들었다. 어머니는 “천황을 위해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너무 불쌍하다”고 말했다. 긴조는 “아버지는 개죽음을 당했다”고 맞섰다. 어머니는 책상을 뒤엎으며 화를 냈다. “그럼 어머니는 손자에게 전쟁에 나가라고 할 수 있습니까?” 어머니는 대답하지 못했다. 벌써 30년 전 일이다. “어머니의 생각은 그 뒤로 조금씩 바뀌었을까요?”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긴조가 자문하듯 말했다. 그는 1985년 나카소네 전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의 위헌성을 묻는 오사카 재판에 참여했고, 지금은 오키나와인들의 합사 철폐를 요구하는 야스쿠니 소송단의 단장이 됐다. 그는 “야스쿠니신사가 전쟁을 미화하기 위해 아버지의 죽음을 이용하는 것을 견딜 수 없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사람의 생각을 바꾸는 것은 힘들죠.” 6월23일, 그는 요미탄촌의 옛 미군 비행장 터에서 오키나와 전쟁 전후의 오키나와 민중들의 삶과 투쟁을 그린 100m짜리 대형 조각 연작 ‘전쟁과 인간’ 전시회를 열고 있었다. 전시회는 다음날 문을 닫았다. 6월23일은 오키나와 전쟁이 끝난 날이다.

오키나와 민중들의 분노에도 오키나와의 야스쿠니화는 그동안 꾸준히 진전돼왔다. 가장 혹독한 것은 강제 집단사 당한 전쟁 피해자들을 순국 선열로 기념해 야스쿠신사에 합사한 것이다. 니시오 이치로 평화를 만드는 류큐연대활동센터장은 “강제 집단사 당한 사람들은 1952년 원호법(‘전상병자전몰자유족등원호법) 제정 때 적용 대상에 포함됐다”고 말했다. 야스쿠니신사는 사람의 나이를 따지지 않아 30대의 아버지도, 그 손에 숨진 서너 살짜리 코흘리개들도 천황을 위해 숨진 야스쿠니신사의 신이 됐다. 배를 타고 오키나와에서 규슈 쪽으로 강제 소개되다 미 잠수함에 폭침된 배 쓰시마마루에 타고 있던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군대의 방침에 협조하다 당한 죽음이라는 이유에서다. 국가의 잘못으로 죽음에 내몰린 전쟁 피해자들이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전쟁 공로자로 뒤바뀌는 ‘야스쿠니의 연금술’이 작동한 셈이다. 니시오 센터장은 “집단 자살을 강요당한 사람들 모두가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것은 아니지만, 원호 신청을 한 사람들은 모두 합사됐다”고 말했다.

교과서에서 “군이 자살 강제” 내용 삭제

오키나와 전쟁이 마무리된 6월23일 ‘위령의 날’을 맞은 오키나와는 분노로 들끓고 있었다. 일본 문부과학성은 석 달 전인 3월30일 무려 329명이 집단 강제사 당한 도카사키 마을 사건을 다룬 고등학교 교과서를 검정하면서 “군이 자살을 강제했다”는 내용을 삭제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도카사키 사건 생존 피해자들은 피를 토했고, 대부분 자민당 의원으로 구성된 오키나와현 의회도 “교과서 검정을 철회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로써, 오키나와의 야스쿠니화는 완성되는가. 부모의 손에 죽은 코흘리개들의 영혼까지 천황을 위한 죽음으로 기억하고 감사하려 할만큼 일본은 집요하다. 아이가 숨질 때 “야스쿠니에서 만나자”라고 결심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아이는 아마도 살고 싶었을 것이다. 아이의 죽음을 ‘반성’이 아닌 ‘감사’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야스쿠니신사의 태도는 아이의 머리를 으깬 아비의 잔혹함보다 더 깊은 착잡함을 느끼게 한다.


[야스쿠니신사 합사 피해자 돕기]
동북아 평화, 그 작은 시작

13,523,000원

6월29일 현재 모금액 1352만3천원
일본 규슈 남단에서 대만에 이르는 1300km 해상에 활처럼 이어진 200여 개의 섬을 류큐열도라고 부릅니다. 이 가운데 오키나와섬을 중심으로 한 오키나와 제도가 일본의 47번째 현을 구성하는 ‘오키나와현’입니다. 오키나와는 일본이면서 일본이 아닙니다. 그들은 “천황과 군대가 우리를 지키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태평양전쟁 때 섬 주민들은 미군이 몰려오자 자살을 강요당했고, 62년이 지난 지금 일본인들은 “그것은 군의 강제가 아니었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그렇게 집단 강제사 당한 사람들은 지금 야스쿠니신사에 갇혀 있습니다. 피해자를 공로자로 바꿔버리는 야스쿠니신사의 연금술이 두렵습니다. 독자 여러분, 동북아 평화에 초석을 놓으려는 작은 노력에 여러분의 커다란 정성을 모아주세요.



계좌이체 우리은행 1006-401-235747, 예금주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ARS 060-707-1945·한 통화 3천원
주관민족문제연구소, ‘노합사(NO 合祀)’,
문의민족문제연구소(02-969-0226), 홈페이지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한국위원회(www.anti-yasukuni.org), 서울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38-29 금은빌딩 3층(우편번호 130-866)
모금자 명단
권명숙(1만원) 서용순(5만원) 최종말(5만원) 김봉길(2만원) 이상글(3만원) 신하얀(1만원) 이형구(3만원) 한겨레신문사랑모임(10만원) 민족문제연구소 도쿄지회(1만엔)
*그 밖에 ARS로 23분이 참가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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