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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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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캠페인] 장갑차를 막는 트랙터의 대행진

등록 2006-01-10 00:00 수정 2020-05-02 04:24

[평택 캠페인_대추리를 평화촌으로!]

미군기지에 땅을 빼앗긴 평택 농민들과 함께 평화캠페인의 서장을 열며
“올해도 농사짓자”고 외치는 팽성 주민 트랙터 평화 순례식에 동참하다

<한겨레21> 589호(2005년 12월20일치) 표지 기사 ‘대추리에 사실래요’ 가 보도된 뒤, 평택 대추리·도두리 농민들을 도울 방법을 알려달라는 독자들의 문의가 이어졌습니다. 미군기지 확장으로 삶의 터전을 빼앗길 위기에 놓인 평택 팽성읍 대추리·도두리 주민들은 세상에서 가장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습니다. 국방부는 지난해 12월 말 “미군기지 확장 반대”를 외치며 땅 팔기를 거부한 이들의 땅을 빼앗아갔습니다. 대추리와 도두리에는 집이 버려지고, 빈집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1940년대 초에 일본군, 1952년엔 미군에 쫓겨난 농민들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요.
그렇지만 대추리·도두리 농민들은 외롭지 않습니다. 1월11일에는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대추리를 평화촌으로 만들 것”을 선언합니다. 1월13일이면 주민들이 미군기지 확장 반대를 외치며 촛불을 밝힌 지 500일이 되고, 1월16일부터는 대추리 앞 너른 황새울 들판에 평화 텐트촌이 세워집니다. 1월24일부터 가수 정태춘씨 등 평택을 사랑하는 문화·예술인들이 뭉쳐 일주일에 한 번씩 평화 콘서트도 열립니다.
대추리 주민들을 돕는 방법은 많습니다. 단 하루만이라도 대추리를 찾아 ‘평택 지킴이’가 되어주세요. 시간이 없는 분들은 평택 지킴이들이 올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도록 침낭·매트리스·텐트 같은 겨울용품을 보내주셔도 됩니다. 준비가 끝나는 대로 대추리를 평화촌으로 만들기 위한 모금 운동도 펼칠 계획입니다.
대추리·도두리 농민들은 외롭습니다. 그들 곁에 당신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세요. 평택 농민들의 한숨 소리를 들으며 늘 마음에 짐이 됐던 당신. 도울 길은 많습니다. <한겨레21>도 매주 대추리·도두리 소식을 전하면서 마음만은 벌써 대추리로 달려간 당신과 함께하겠습니다.
도움을 주고 싶으신 분들은 평화유랑단 평화바람(031-691-2056),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031-657-8111), 팽성 대책위(031-691-6485) 등과 상의하시면 됩니다. 천막·텐트를 보내실 주소: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 160-12 대추초등학교(우편번호 451-802)

▣ 평택·부여=글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트랙터는 아스팔트를 어루만지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트랙터 행렬을 발견한 시민들은 둥그레진 눈으로 손을 흔들며 “힘내라”고 외쳤다. 그들의 외침은 트랙터 안까지 전달되진 않았지만, 평택 농민들은 입 모양을 통해 그들의 목소리를 감지하고 있었다. 농민들이 손을 흔들어 “고맙다”고 답례했다. 농민들의 트랙터 지붕에는 “식량주권 사수”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라고 쓰인 깃발이 펄럭였다.

라르자크의 투쟁도 트랙터에서

트랙터가 출발한 곳은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 대추초등학교 앞이다. 그들은 1월3일 오전 9시30분에 초등학교의 문을 나섰다. “팽성 주민 트랙터 전국 평화 순례식이 시작된다”는 보도자료를 받아든 기자들이 초등학교로 몰려와 트랙터 행렬에 카메라 플래시를 쏟아부었다. 미군기지 확장에 맞서 2년 넘게 싸워온 주민들은 “싸움은 이제부터”라고 크게 외쳤다. 국방부는 “미군기지를 위해 내 땅을 내줄 수 없다”고 싸워온 평택 팽성읍 농민들의 땅 90만여 평을 지난해 말 강제로 소유이전시켰다. 땅을 잃은 주민들은 이제 강제철거 위험에 노출돼 있다.

기자들을 앞에 두고 도두2리 이상렬 이장은 “우리가 아무리 알리려고 해도 목소리와 입장이 전달되지 않아 농기계를 몰고 거리로 나오게 됐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트랙터는 녹슬지 않는다” “트랙터 가는 발자국마다 생명 평화열기 몰고 오소서” 등의 펼침막을 들고 트랙터 행렬을 전송했다. “추워서 어째쓸까”는 말만 되풀이하던 서순희(68), 김영녀(80) 할머니가 그들을 배웅했다. 주민들이 평택 평화투쟁의 최고 인기가요가 된 ‘팽성은 우리 땅’(<독도는 우리 땅>을 개사)을 부를 때, 캠프 험프리에서 이륙한 미군 블랙호크 헬기가 맹렬한 소음을 내며 날아올랐다.

평택을 빠져나온 트랙터 행렬은 39번 국도를 따라 아산을 향해 남진하기 시작했다. 문정현 신부가 이끄는 평화유랑단 ‘평화바람’의 꽃마차가 선두에 서고 그 뒤를 트랙터 7대, 다시 그 뒤를 행사 본부 구실을 하는 봉고차 1대와 짐트럭 1대가 이었다. 평택 대추리에서 출발한 순례단은 10박11일 동안 부여·군산·부안·나주·광주·남원·진주·마산·부산·경주·대구·대전 등 전국 33개 도시를 거쳐 다시 평택으로 돌아올 예정이다. 가장 마지막에 따르는 봉고차에는 “교통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미군기지 없는 세상, 생명과 평화의 땅 평택 지키기 팽성 주민 트랙터 평화 순례단”이라고 적혀 있다. 트랙터는 시속 20km의 속도로 하루에 80~120km를 이동할 계획이다.

김택균 사무국장은 지난해 프랑스 라르자크에 답사 갔던 경험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지난해 여름 문규현 신부와 함께 프랑스 라르자크에 갔습니다. 그곳 주민들이 우리보다 먼저 군부대 확장 반대투쟁에서 승리했거든요. 투쟁의 국면을 결정적으로 돌려놓은 게 트랙터 순례였습니다.” 1970년 프랑스 정부는 라르자크의 1만4천㏊(4230만 평)의 땅을 군사기지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주민들은 양떼를 몰아내고 군사기지를 만들겠다는 정부의 계획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곧 반대투쟁이 시작됐고, 싸움은 10년 동안 이어졌다. 처음엔 주민들이 아무리 평화를 외쳐도 관심을 갖는 사람이 없었다. 뭔가 충격요법이 필요했다. 그들은 라르자크에서 파리까지 800km를 트랙터를 몰면서 시위를 했다. 그 시위를 시작으로 사람들은 비로소 라르자크의 투쟁에 관심을 갖게 됐다.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라르자크에서 열린 평화 집회로 3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주민들은 경찰에 전화를 걸어 “사람들이 더 오면 위험하다”며 “적절히 통제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결국 1981년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군사기지 계획을 백지화하기에 이른다.

민주화되니까 좋아졌냐고?

아산 시내로 접어들자 시민들이 트랙터의 행렬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꽃마차에 탄 ‘평화바람’ 활동가 해밀이 “전쟁은 미군의 책임입니다. 미군기지 확장을 막아야 합니다”라고 외칠 때 트랙터 행렬은 온양온천역을 지나고 있었다.

지난해 6월 주민들은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실 관계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농민들에게 “민주화되니까 좋아지지 않았으냐”고 물었다. 트랙터 4호차를 운전하던 정만진(40·도두2리)씨는 “‘피식’ 웃음이 났다”고 말했다. 그의 가족이 평택에 정착한 것은 그의 부친이 17살 때였다. 조부는 경상도 합천 사람이었다. 그는 평택에서 나고, 자라고, 교육받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 그는 자기 땅과 남의 땅을 합쳐 4만 평 농사를 짓는다.

“민주주의는 ‘과정’ 아닙니까.” 농부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그들이 보기에 주민들을 내쫓고 땅을 빼앗는 ‘과정’은 권위주의 군사 정부와 비교해 깻잎 한 장의 두께만큼도 달라지지 않았다. 정부는 미군기지 확장 계획을 발표하면서 주민들의 의사를 묻지 않았다. 정부는 평택대학교에서 열린 공청회에서 주민들을 강제로 끌어내 경찰서에 가뒀고, 지장물 검사를 억지로 진행했으며,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보상금을 법원에 공탁해 땅을 강탈해갔다. 주민들이 바닷물을 막아 피땀으로 개간한 땅의 소유권은 12월19일부터 4일 동안 국방부로 넘어갔다. 그들은 이제 주민들과 몸싸움을 벌여가며 포클레인으로 땅을 작살낸 뒤, 주민들의 집을 강제로 철거할 것이다.

39번 국도를 내리닫던 트랙터의 행렬이 어느덧 충남 공주시 유구읍으로 접어들었다. 순례단의 선두에 선 꽃마차는 허술해 보이지만 2천만원짜리 중고 독일제 벤츠다. 2003년 말 평화유랑을 준비하던 문정현 신부가 사재를 털었고 모자라는 돈은 문규현 신부가 보탰다. 우리나라에 딱 3대만 수입된 희귀한 차다. 애초에는 쌍용에서 정비용 부품을 싣고 다니던 차인데, 평화유랑용으로 특별히 구입했다.

다시 해밀의 목소리가 읍내에 울려퍼졌다. “쌀 개방만은 늦춰달라는 농민들을 때려죽인 정부가 이제 평화를 외치는 평택 주민들의 땅을 빼앗고 있습니다. 전쟁을 일으키는 미군기지를 몰아내자는 평택 농민들의 외침에 함께해주십시오.” 고요하던 시골 읍내가 정태춘의 노래와 <팽성은 우리 땅> 가락으로 소란해졌다. 유구에서 32번 국도와 몸을 섞었던 39번 국도는 읍내를 벗어나자마자 다시 둘로 갈라졌다. 이곳에서 오늘의 목적지 부여까지는 43km, 공주까지는 27km다. 트랙터를 운전하는 팽성읍의 이장들은 액셀러레이터를 더 힘차게 밟기 시작했다.

부여 농민회와 촛불을 들다

그렇지만 트랙터 행진이 쉽게 성사된 것은 아니었다. 트랙터는 많았지만, 사람이 문제였다. 트랙터는 도로가 아닌 논두렁을 달리는 농기계다. 농민들은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며 망설였다. 투쟁 시작 이후 처음으로 대책위 안에서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눈길 한 번 줄 사람이 어디 있냐”는 설득에 토를 달긴 힘들었다. 트랙터는 하루에 경유를 30ℓ씩 먹는다. 일정을 모두 소화하면 기름값만 500만~600만원이 든다. 신문과 방송은 “평택의 ‘일부’ 농민이 더 많은 보상금을 노리는 싸움을 하고 있다”고 보도했고, 운동 진영에서는 평택 싸움을 “이미 끝난 것”으로 보고 포기하고 있었다. 앞뒤로 길이 막힌 농민들의 싸움은 외로워 보였다.

트랙터의 행렬은 오후 4시가 지나니 부여에 가까워졌다. 그들은 39번 국도를 버리고 29번 국도로 접어들었다. 부여 시내로 들어가 금강을 건너 부여 중앙로로 들어섰다. 부여 군청 앞의 계백 장군 기마상이 트랙터 행렬을 맞았다. 기마상에서 좌회전해 부여 시외버스터미널 앞 에펠제과 골목에서 트랙터들은 고단한 하루 여정을 마무리했다. 현장에는 전국농민회총연맹 산하 부여군 농민회 농민들이 마중나와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평택과 부여의 농부들이 촛불 앞으로 모여들었다. 강경선 부여농민회장은 “그동안의 싸움에 함께하지 못해 미안했다”고 말했고, 여성농민회장은 “우리가 너무 농민운동에만 매몰돼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평택과 부여의 농민들은 시민들을 향해 “평화를 깨뜨리는 미군기지 몰아내자”고 외치고 촛불을 밝혔다. 근처 에펠제과·코닥사진관·서울약국·금남다실의 간판에 불이 들어왔다.

농민들은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라고 외쳤다. “내년에도 농사짓자”라는 그들의 구호는 해를 넘겨 “올해도 농사짓자”로 바뀌었다. 김영오(58·함정리 이장)씨는 “내가 농부인데, 올해도 농사짓자는 구호를 외치는 현실이 서글프다”라고 말했다. 그는 “가슴속에서 뭔가 뜨거운 게 치받고 올라오는 느낌”이라고 말했지만, 제 손으로 논을 일궈 쌀 한 톨 입에 넣어본 적 없는 기자는 그 말의 깊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김종일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사무처장은 “왜 농민들이 1500만원을 걷어 이런 순례를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 물음에 답해야 할 1차 책임을 갖는 정부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농민들은 그 대답을 찾기 위해 직접 사람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김 사무국장은 “지난해 7월10일과 12월10일 평택 ‘평화대축전’에서 전국의 사람들이 모여줬다”며 “그들을 위해 이렇게라도 마음의 빚을 갚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가 찾고 싶었던 것은 아마 희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농민들의 트랙터 행렬은 500일을 맞는 팽성 촛불집회 기념일(1월13일)에 맞춰 평택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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