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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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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리는 두 번 울지 않는다

등록 2005-12-14 00:00 수정 2020-05-02 04:24

평택 미군기지 확장으로 또 내몰릴 위기에 처한 대추리·도두리에 몰려든 사람들…조제 보배, 평화유랑단, 이름없는 시민들이 명예 주민이 돼 함께 노래하는 현장

평택의 거친 들은 처절한 패배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아산만에서 바닷물은 팽택평야를 관통하는 안성천과 진의천을 타고 땅 안쪽으로 깊숙이 밀렸다. 척박한 갯벌에서 늙은 농부들은 둑을 쌓아 농토를 넓혔다. 그들이 쌓은 둑은 거센 밀물에 무너지거나 살아남았다. 그들의 노동에는 대안이 없었다. 둑이 무너져 짠물이 들로 밀고 들어오면, 그들은 땅을 버려야 했다. 고된 노동 끝에 거친 갯벌을 농토로 바꿨을 때 일본군이 들어왔고, 한국전쟁 이후(1952년) 미군이 들어와 농민들을 내쫓았다. 50년이 지난 오늘 다시 “땅을 내놓으라”고 외치고 있다. 이제 늙고 지친 대추리, 도두리 농민들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며 울었다. 그 외침을 지나치지 못한 젊은 양심들이 하나둘씩 너른 대추리·도두리 앞뜰로 모여들고 있다. 사람들이 버리고 간 대추리 마을의 빈집에 다시 불이 켜지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편집자

▣ 평택=길윤형 기자charisma@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조제 보베(52)는 12월9일 ‘명예’ 대추리 주민이 됐다. 그는 “여기 와보니 군부대 확장에 반대해 싸웠던 라르자크(la Rzac) 투쟁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1970년 프랑스 정부는 라르자크의 1만4천㏊(4230만 평)나 되는 너른 땅에 군사기지를 짓겠다고 밝혔다. 그때 그는 16살의 소년이었다. 그는 평온한 라르자크 초원을 노니는 양떼를 몰아내고 군부대가 들어선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듬해인 1971년에 그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가 됐다. 이듬해 라르자크를 직접 둘러보면서 “이것은 싸워야 할 투쟁”이라고 결심했다. “군사주의를 처음부터 싫어했던 것 같아요. 군대에 대항해 농민들이 저항한다는 사실이 무척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제2의 라르자크를 찾은 조제 보배

1975년 소년은 22살의 청년으로 자라났다. 그는 사람이 떠난 정부 소유의 빈 농장을 접수했다. 라르자크 주민이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라르자크는 주변 1㎢ 이내에 인구밀도가 겨우 2명일 만큼 외딴 오지였다. 그는 아내와 6개월 된 딸을 데리고 평화운동가에서 양젖을 짜 치즈를 만드는 농부로 변신했다. 정부는 농민들의 저항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싸움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집에는 전기는 물론 마실 물도 마땅치 않았다. 군사기지 이전을 반대하며 똘똘 뭉쳤던 사람 가운데도 지쳐 나가떨어지는 이가 나타났다. 싸움은 10년을 끌었다. “처음에는 1~2년이면 싸움이 끝날 줄 알았습니다. 1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주민이 50% 정도 땅을 팔고 이주했습니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승리는 평화를 외쳤던 농민들의 것이었다. 1981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군사기지 건설계획을 백지화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평화유랑단 ‘평화바람’ 활동가들이 대추리 주민이 된 것은 올해 2월13일이다. 평화바람이 활동을 시작한 것은 2003년 10월이었다. 그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싸움은 이라크 파병 저지였다. 많은 활동가들이 거리와 광장에서 평화를 외쳤지만, 정부의 파병 결정을 막을 수 없었다. 문정현 신부와 함께 평화바람을 이끌고 있는 오두희(51)씨는 “전쟁을 겪은 나라에서 또 다른 전쟁에 참여한다는 사실에 참담한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운동 방향이 옳았던 것일까? 그는 “대답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평화바람의 활동은 이라크 파병을 막지 못한 대한민국의 평화운동에 대한 반성을 의미했다. 활동가들은 정형화된 집회 구호 속에서 ‘화석화’된 운동의 틀을 깨뜨리고 싶었다. 그들은 사람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갔다. 새만금 반대투쟁과 부안 투쟁의 경험을 공유한 전북 지역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인천·대구·공주 등 전국 8도에서 찾아온 사람들이 평화바람의 깃발 아래 모여들었다. 그들은 2004년 한 해 동안 전국 60여 개 도시를 돌아다니며 평화를 외쳤다. 그들이 만난 사람들은 농민, 노동자, 육아공동체, 환경운동가, 대학생 등이었다. 그들은 사람들 속에서 “이라크 파병을 철회하고, 미군기지 확장을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유랑의 첫 출발지는 2004년 2월14일 평택이었다. 10개월 동안의 대장정을 끝낸 종착역도 같은 해 11월24일 평택이었다. 그때 주민들은 평택 본정리 아리랑고개에서 비닐하우스를 세우고 꺼져갈 듯 아슬아슬한 촛불을 밝히고 있었다. 주민들의 촛불시위는 2004년 9월1일 처음 시작됐다. 국방부가 평택대에서 연 미군기지 평택이전 관련 공청회에서 주민 9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주민들이 배제된 상태에서 공청회는 끝났다. 성난 주민들은 경찰서로 몰려가 “잡혀간 사람들을 풀어달라”며 촛불을 밝혔다. 그날부터 캠프 험프리 후문 뒤에 자리한 본정리 거리, 그 앞의 비닐하우스를 거쳐 대추초등학교 운동장까지 촛불은 단 하루도 꺼지지 않았다. “그 광경을 보면서 평택 속으로 들어가야겠다는 공감대가 생겼습니다.” 문정현 신부가 말했다. 어찌 보면 그것은 “미군기지 확장을 막아야 한다”고 앞장서 외친 사람들이 짊어져야 할 짐이기도 했다. 주민들의 비닐하우스는 좁았고, 12월 칼바람에 속수무책이었다.

당신들 ‘프란체스카’ 가족이야?

똘똘 뭉친 주민과 활동가들은 이듬해 2월12일에서 3월14일까지 진행된 지장물 검사를 온몸으로 막아냈다. 대한주택공사·한국감정원·한국토지공사로 이뤄진 11개 조사팀은 차 타고 오고, 걸어서 오고, 배 타고 오고, 헬기로 왔다. 그들은 마을에 한 발짝도 들어오지 못했다. 국방부는 “협의매수에 응하지 않으면 나중에 불이익을 받게 된다”며 주민들을 윽박질렀다. 그러나 주민들의 강고한 연대는 좀처럼 깨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국방부와 협의매수가 이뤄진 땅은 전체 매수 예정지 349만 평(팽성 283만9천 평, 서탄 65만1천 평) 가운데 65%인 226만9천 평에 불과하다. 협의매수가 이뤄진 땅의 대부분은 직접 농사를 짓지 않는 외지 주민들의 것(국공유지 53만 평 포함)이다. 건설교통부 중앙토지수용위원회는 11월23일 협의매수가 이뤄지지 않은 미군기지 이전 예정 터 91만 평을 국방부가 강제로 사들일 수 있게 도장을 찍었다. 12월22일까지 토지보상금을 법원에 맡기면 땅은 주민들의 품을 떠나 국방부의 소유가 되고, 강제 철거가 가능해진다. 주민들은 “두렵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이곳에 사는 평화바람 활동가 반지·해밀·두시간·여름·밥·팔공·지선 등은 모두 별명을 쓴다. 나중에 들어온 시민들도 별명으로 부른다. 모두는 각자 맡은 역할이 있다. 여름은 컴퓨터 웹디자인, 반지는 영화·영상 작업, 밥은 사진을 찍는다. 지선은 뭐든지 잘하고, 팔공은 평화바람의 자랑인 꽃마차를 운전한다. 해밀은 음향 장비를 잘 다룬다. 집은 보증금 1천만원에 월세 40만원을 주고 세냈다. 신부님 강연비, 활동 후원금 등을 탁탁 털어 열 식구가 살 생활비를 마련한다. 먹을거리는 현지 조달이다. 주민들이 밑반찬과 쌀을 날라줘 유랑단은 한 번도 쌀을 산 적이 없다. 활동가들은 활동비 없이 교통비만 지원받아가며 1년 가까운 강행군을 견뎌내고 있다.

활동이 자리를 잡아갈수록 대추리 주민이 되기를 자처하는 일반인들도 늘고 있다. 전직 인터넷 신문기자 김효정(29)씨는 11월10일에 대추리에 합류했다. 그는 일을 잠시 그만두고 평택 시민이 됐다. 그는 전주 인권영화제에 평택을 알리고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한 짧은 다큐를 만든다. 지난 7월에 평택을 처음 찾은 뒤 이곳 생각만 하면 마음이 답답해졌다고 한다. 그 무렵 일을 그만두고 평화바람 쪽에 “갈까”라고 물었더니 “와라”라는 화답이 왔다. 김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짐을 쌌다.

주민들은 평화바람이 처음 대추리 주민이 되던 날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 유랑단을 쳐다봤다. 허연 수염을 휘날리는 노인(문정현 신부)에서부터 20대 처녀(반지, 여름)까지 일곱 식구는 당시 유행하던 엽기 가족 <안녕 프란체스카>를 꼭 빼닮았다. 김지태 대추리 이장은 “한 사람이라도 필요한 상황”이라며 유랑단을 반겼다. 유랑단은 농활대처럼 봄 못자리 만드는 일부터 감정평가단을 내쫓는 일까지 마을 사람들과 힘을 모았다. 김기옥(36)씨는 “처음에 왔을 때 저 사람들은 뭘까 궁금했지만 지금은 큰 위로가 된다”고 말했다. 두시간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주민들과 감정 이입이 되고, 주민과 나의 경계도 희미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마음에 북소리가 들렸습니다”

마리아(26)는 10월26일 대추리로 들어왔다. 그는 ‘땅과 자유’라는 공부모임에서 활동하던 ‘백수’였다. 대추리를 알게 된 것은 올해 여름이다. 7월10일 평택에서 있었던 평화대행진을 알리려고 대구를 찾았던 유랑단을 만났다. 그는 “그때 평택에 꼭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평택으로 오기 전에 대구 동성로 대구백화점 앞에서 2주에 한 번씩 미군기지 확장에 반대하는 1인 시위를 했다. “10월에 일주일 정도 있었어요. 주민분들 살아온 얘기를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녹음기 같은 것을 챙겨서 내려왔죠.” 그는 일주일 정도 작업을 마치고 대구로 돌아갔다가 짐을 싸 다시 대추리로 들어왔다. 이번엔 살러 온 것이다. 부모님께는 “유학 보낸 셈치라”고 말했다. “박정희가 살아 돌아오면 업고 다닌다”던 아버지는 “벌써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복숭아와 대추를 키우는 그의 아버지는 ‘자꾸만 삶의 현실이 그쪽으로 가게 만들어’ 얼마 전 민주노동당 당원이 됐다.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황씨 아저씨’(프리랜서 작가)가 대추리 소식을 접한 것은 올해 10월이다. 교보문고 앞을 지나다 평택이 고향인 정태춘의 노랫소리를 듣게 됐다. 문득, 잊고 지냈던 고3 때 추억이 떠올랐다. “그때 정태춘 노래 모음집이라는 책이 나왔거든요. 그때 제일 첫 곡이 <양단면 마름>이었고요. 박은옥씨가 그 노래를 설명하고 있더라고요.” 그는 집에 돌아와 “분명 대책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행여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하겠다”고 글을 남겼더니 답장이 왔다. 그는 10월23일 대추리 주민이 됐다.

12월6일 평택역 앞에서 진행된 촛불집회는 힙합 동아리 ‘런피플’의 댄스 공연으로 시작했다. 기말고사를 제끼고 올라온 조진배 원장 신부와 천주교 예수회 수사들은 “그동안 신경쓰지 못해 미안하다”며 <바위처럼>을 불렀고, 수원·성남·고양에서 올라온 ‘1일 실천단 시민’들은 “아버지는 말하셨지 평택을 지켜라”에서 시작해 “발이 가요, 발이 가 평택역에 발이 가”로 이어지는 패러디 CM송 메들리로 흥을 돋웠다. 인터넷에서 평택의 소식을 들었다는 인천공항 직원(27)은 24시간 3교대가 끝난 오전 9시에 평택에 왔다. 그는 피곤함을 이기고 평택 시민들을 찾아 기지 확장의 부당함을 외쳤다. “평택의 사연을 본 뒤 심장에서 북소리가 들렸어요. 그동안은 참으면서 살았는데 앞으로는 북소리가 하자는 대로 하며 살 겁니다.”

그 울먹임이 세상을 바꾸리라

집회가 끝나고, 촛불이 꺼지고, 갑작스럽게 떨어진 기온 탓에 평택역 앞 광장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노래가, 그들의 율동이 “미안하다”며 서로를 다독이던 그들의 울먹임이, 또 서투른 그들의 힙합댄스가 마침내는 세상을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집회를 마치면서 문규현 신부가 쥐어 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사노라면”을 선창했다. “두 번씩 야속하게 꼭 뺏어야 하냐”던 조선례(88) 할머니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신부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라르자크의 기적’이여 다시 한번

조제 보베와 농민들의 군사기지 반대 투쟁, 프랑스 전역의 시민들이 몰려들어

조제 보베(52)는 프랑스의 농민운동가다. 그는 1999년 8월12일 프랑스 미요에서 미국식 신자유주의의 상징인 맥도널드 신축 공사장의 일부를 파괴하는 시위를 주도하면서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됐다. 유럽이 미국 쇠고기의 수입을 거부하자, 미국은 프랑스산 로크포르(양젖으로 만든 치즈) 등 100가지 유럽 제품에 대해 100%의 보복 관세를 매기게 된다. 그때 조세 보베는 군사기지 확장저지 투쟁으로 유명해진 프랑스 남부의 라르자크(La Rzac)에서 양떼를 키우던 농민 운동가였다. 시위에 적극 참여한 대가로 그는 징역 3개월을 선고받았지만, 그를 지지하는 동료 농민들이 한두 푼씩 보석금을 모아 6주 만에 자유의 몸이 됐다. 그는 같은 해 11월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 반세계화 시위에 적극 참여하며 미국식 세계화의 흐름에 온몸으로 맞서는 전세계 농민의 건강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떠올랐다.
그가 애초부터 농민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농업의 길로 들어선 것은 라르자크 군사기지 확장저지 투쟁에 동참해 1975년 이곳으로 이주해 오면서부터다. 프랑스 정부는 1970년 라르자크 고지대 땅 1만4천㏊(4234만 평)에 군사기지를 늘려 짓겠다고 결정했다. 농민들은 ‘대포 대신 양을’ ‘밀을 살리고 무기를 죽여라’ ‘이 땅은 우리 목숨 끝까지 지킨다’ 등의 구호를 외쳤고, 기지 확장을 막기 위해 군대가 매입한 농장들을 불법 점유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탱크를 앞세우는 물리적인 협박 작업에 들어갔지만, 평화를 바라는 주민들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농민 103명은 ‘103인 위원회’를 꾸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마을에 모여 앉아 회의를 열었다. 그들은 라르자크에서 파리까지 800km가 넘는 거리를 트랙터를 몰고 시위를 했고, 에펠탑에 양떼 60마리를 풀어놓고 천막 투쟁을 벌였다.
농민들의 투쟁이 세상에 알려지자 농민·파업 노동자·양심적 병역 거부자·페미니스트·지방분권주의 운동가 등 사회의 모든 저항세력들이 앞다퉈 라르자크로 몰려들었다. 첫 집회 때는 10만 명이 모였고, 그 다음 집회에는 30만 명이 모였다. 결국 이긴 것은 ‘더 질긴 놈’이었다. 1981년 6월3일 새로 취임한 미테랑 대통령은 군사기지 확장안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김택균 미군기지 확장반대 팽성대책위 사무국장은 “라르작에서 일어났던 기적이 평택에서도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라르자크 농민 103명이 매일 밤 모여 무릎을 맞댄 것처럼, 평택 농민들도 500일 가까이 모여 꺼지지 않을 촛불 빛으로 어두워지는 도두리 뜰을 밝히고 있다.




누굴 위한 장밋빛 약속일까

첨단농업단지·산업단지 조성한다는 정부 정책의 과실은 주민들과 무관

2004년 현재 평택에 머물고 있는 주한미군 병력은 서탄면·신장동 오산 공군기지(K-55)와 팽성읍 캠프 험프리스(K-6) 등 2곳(458만 평)에 1만567명이다. 미군기지의 면적은 용산 미군기지와, 동두천·의정부·파주 등에 흩어진 미 2사단 병력을 받아들이는 2008년에 가면 349만 평 늘어난 806만 평으로 확대된다.
평택대 진세혁 사회과학부 교수팀이 평택시의회의 연구 용역을 받아 2004년 9월에 발표한 ‘미군기지 평택이전 지역영향 연구’를 보면 “주한미군의 평택 이전에 대한 의견을 자유롭게 말한다면, 미군의 평택 이전은 부정적인 평가를 더 많이 받을 것”이라고 적혀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세계에서 미군 주둔지역 도시가 발전한 예가 없으며, (일본·독일·필리핀 등의 예에서 보듯) 궁극적인 해결책으로 미군 철군이나 지역으로부터 퇴출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택 지역의 불만의 목소리를 잠재우기 위해 정부는 2020년까지 농업·제조업·도시정비·교통물류·관광 등 9개 분야 89개 사업에 18조8016억원을 쏟아붓기로 하고, 지난해 ‘주한미군 기지 이전에 따른 평택시 등의 지원 등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어 지난 4월1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정부는 이를 위해 평택시 일대에 첨단농업단지·도시첨단산업단지·재래시장·평택호 관광지 개발 등의 사업을 추진하고 특성화 대학과 외국인 학교 등을 들여와 외국 전문인력을 키울 계획이다. 정부의 계획대로라면 평택의 인구는 해마다 3%씩 늘어나 2020년에는 80만 명이 되고, 지역 주민 1인당 생산은 2000년 1400만원에서 2020년에는 그보다 2.5배쯤 늘어난 4200만원으로 껑충 뛴다.
정부의 장밋빛 예측이 들어맞아야 하겠지만, 도시 성장의 과실은 미군기지 확장으로 직접 피해를 입는 평택 팽성읍 대추리·도두리 주민들에게 돌아갈 것 같지 않다. 오두희 미군기지 확장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은 “나이든 60~70대 주민들에게 삶의 근거인 논을 빼앗으면, 형편 좋은 자식에게 쫓겨가는 것 말고는 별다른 대안이 없다”고 말했다. 대추리 인구 504명 가운데 61살 이상의 고령 인구는 134명이다. 이들은 12월11일에 열리는 평화 대행진을 위해 1만~2만원씩 쌈짓돈을 모으고 있다.


한겨레 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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