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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유어북] 리볼리의 팔딱이는 예술

등록 2004-07-15 00:00 수정 2020-05-03 04:23

[프리유어북 | 책을 보내며]

<font color="darkblue">파리의 불법 점거 아틀리에 아티스트와의 대담 </font>

▣ 한혜원/ 한남대 문예창작과 강사

(정은아 지음·시공사 펴냄)은 프랑스 파리의 불법 점거 아틀리에에서 활동하는 16명의 아티스트와의 대담을 담고 있다. 1999년 11월1일, 작업공간이 없는 예술가 25명은 파리 리볼리가 59번지의 폐쇄된 건물을 점거했다. 이들은 기존의 불법 점거 아틀리에가 폐쇄적인 노선을 걷는 것과 달리, 아틀리에의 모든 것을 일반인에게 개방했다. 또 전시공간을 확보하지 못한 예술가들에게는 무료로 전시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곧 법적인 건물주인 프랑스 정부가 이들을 추방하기 위해서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일부 언론과 정치인들이 이 사건을 문화운동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파리 시장인 베르트랑 들라노에가 이 건물을 시에서 사들여 건물을 합법화하는 방향으로 이끌었다는 점이다. 프랑스 문화성에 따르면 현재 ‘로베르네집’은 연간 4만명의 관람객이 찾는, 파리에서 세 번째로 관람객이 많은 현대 미술관이다.

한국에서는 상상조차 불가능한 이 공간을 방문한 비디오 아티스트 정은아는 곧바로 자유와 창조로 이뤄진 ‘59리볼리 바이러스’에 감염돼서 이 책을 집필하게 됐다고 글머리에서 밝히고 있다.

사실 나도 이 책의 저자와 유사한 경험을 한 바 있다. 2002년 12월, 파리의 퐁피두센터에 들렀던 필자는 현대 미술계의 기라성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관람하고도 뭔가 부족함을 느꼈다. 미술관을 나와서 쇼핑센터로 가득 찬 리볼리 거리를 걷고 있을 때였다. 건물 외관에 설치물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을 발견했다. 필자는 어리둥절해하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작업 중인 작가와 작품에 대해 자신의 견해와 질문을 늘어놓는 관람객의 모습을 보면서 필자는 활어처럼 팔딱이는 현재진행형 예술의 묘미를 맛봤다. 그 일이 있은 지 넉달 뒤, 한국에서 이 책이 출간됐다.

이 책의 방생을 앞두고 서가의 빈 구석을 슬며시 손으로 쓸어본다. 책이란 참 요상한 물건이라서 서가에 고이 모셔두고 먼지를 털어주는 것만으로는 그 책을 소유할 수 없다. 책이 책으로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작가에게는 펜을 들어서 글을 쓰는 순간이요, 독자에게는 한장한장 넘겨가면서 글을 읽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이 책을 소유했고 그 결과 리볼리 바이러스에 감염됐다. 이제, 이 바이러스를 저 바깥 세상으로 퍼뜨릴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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