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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초 상고심’ ‘서오남 대법관’ 언제까지?

수십 년간 지속된 구성 다양화·전문화 등 개혁 목소리… ‘무익한 상고 남발’ 등 대법원 증원 반대 주장의 시대착오
등록 2025-06-13 07:14 수정 2025-06-17 17:41
조희대 대법원장(가운데)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2024년 12월19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전원합의체 선고를 위해 자리에 앉아 있다. 연합뉴스

조희대 대법원장(가운데)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2024년 12월19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전원합의체 선고를 위해 자리에 앉아 있다. 연합뉴스


“(대법원 소부의) 합의 기일에 각 주심 대법관별로 2시간, 길어야 3시간이 주어지는데, 그 시간 동안 100건의 사건을 합의하려면 1건의 합의에 허용되는 시간은 기껏해야 1분30초 정도를 넘지 못한다. (…) 주심 대법관은 (다른 대법관들의 의견을) 잠시 기다리다 (…) 다음 사건의 설명에 들어가게 된다. (…) 그 침묵 상태의 대기 시간이 불과 10여 초를 넘지 못한다.”

2016년 11월 박시환 전 대법관(2005~2011년 역임)은 ‘대법원 상고사건 처리의 실제 모습과 문제점’(민주주의법학연구회 ‘민주법학’ 제62호) 논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대법원에서 사건 한 건이 합의·처리되는 데 걸리는 시간이 10여 초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대법원 상고심의 민낯이 세상에 알려진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대법원 상고심의 민낯

2025년 6월4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제1소위원회에서 현원 14명인 대법관 수를 30명으로 증원하는 내용을 뼈대로 한 법원조직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대법관 증원은 이재명 대통령의 공약이기도 하다. 국민의힘은 “사법부 장악 우려”를 거론했고, 대법원은 “공론화 부족”이라며 반발했다. 6월12일 법안의 본회의 통과를 예고했던 더불어민주당도 “좀더 스크린(검토)해보는 것으로 결정됐다”(6월10일 노종면 대변인)며 한발 물러섰다.

박범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제1소위원회 위원장(오른쪽 둘째)이 2025년 6월4일 오후 국회 법사위 회의실 앞에서 대법관 증원 관련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뒤 내용을 기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한겨레 김경호 선임기자

박범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제1소위원회 위원장(오른쪽 둘째)이 2025년 6월4일 오후 국회 법사위 회의실 앞에서 대법관 증원 관련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뒤 내용을 기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한겨레 김경호 선임기자


대법관 수를 늘리는 법안이 이렇게 논란이 되는 건 대법원이 이 대통령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을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한 판결(5월1일) 이후 법 개정 논의가 본격화했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과 민주당이 이 대통령에게 불리한 결정을 내린 대법원을 정권 초기부터 손보려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된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법안은 새로운 내용이 아니다. 재판 규모에 걸맞지 않게 소수에 불과한 대법관을 증원해 국민이 한층 더 재판을 충실히 받을 수 있게 하고, ‘서오남’(서울대를 나온 50대 남자 법관) 중심의 대법관 구성도 다양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수십 년 전부터 꾸준히 제기돼왔다. 2010년 3월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은 사법제도개혁특별위원회까지 꾸려 대법관을 24명으로 늘리고, 대법관의 3분의 1 이상을 법관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 임명하는 내용의 개혁안을 확정해 추진(대법원 반대로 철회)했다. 2021년 대한변호사협회는 대법관 100명 증원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힌 적도 있다.

대법원 ‘사법연감’을 보면, 2014~2023년 대법원 접수 사건은 연평균 4만3878건(본안 기준)에 이른다. 한 해 20건 안팎인 전원합의체 사건만 담당하는 대법원장, 재판하지 않고 사법행정만 챙기는 법원행정처장을 제외한 12명의 대법관이 한 해 3656건, 휴일 없이 매일 10건의 사건을 처리해야 하는 규모다. 대법관의 사건 부담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1958년 11월 법사위가 대법관을 증원(9→15명)하기로 합의했을 당시에도 ‘ 상고 사건이 격증해 현재 대법관으로서도 도저히 처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1958년 11월22일치 경향신문 ‘대법원 증원 문제’ 중)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당시 대법원 쪽은 “대법관들 사이에 파벌 형성이 우려된다” 등의 논리로 거세게 반발했고, 결국 증원은 좌절됐다.

이런 오랜 역사적 맥락 때문에 대법관 등 일부 고위법관을 제외하면 판사·검사·변호사·법학자 등 법률전문가 그룹은 대법관 증원 찬성 여론이 훨씬 크다. 2018년 전국법관대표회의 설문조사 결과 판사 54%가, 같은 해 대한변협의 변호사 설문조사에서 78%가 각각 대법관 증원에 찬성했다. 법무부·검찰도 대법관 증원에 적극적이다. 법무부 고위 관계자는 한겨레21과 한 통화에서 “그간 대법원의 주장을 보면 대법관은 단 한 명도 늘릴 수 없다는 주의다. 상고 기각률이 엄청 높은 점(2023년 기준 상고심 원심파기는 민사 3.6%, 형사 5.6%)을 근거로 ‘무익한 상고가 남발되고 있다면서 상고를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기각률이 높은 건 심리가 불충분했기 때문일 가능성도 상당히 있다”며 “이미 과거 역사에서 고법 상고부, 상고 심사제, 상고법원 등은 모두 국민이 수용할 수 없는 제도임이 확인됐다. 대법관 증원이 유일한 방법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단기 해법으로라도 충분히 도입할 만하다”고 말했다.

 

재판받을 권리 제한하는 상고 제한제

대법원도 상고심 증가와 그에 따른 재판 지연 문제를 심각하게 보고 나름의 대응을 하고 있다. ‘재판거래 의혹’ 등으로 불거진 초유의 양승태 전 대법원장 구속 사태(2019년 1월 구속·1심 무죄)도 대법원에 올라오는 사건을 줄이기 위해 ‘상고법원’ 설치를 무리하게 추진한 것이 발단이 됐다. 문제는 대법원이 “대법관 증원 없이 상고심을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을 고수한다는 점이다. 대법관의 진보·보수 성향을 떠나 이 주장만큼은 한목소리였다.

그 결과 상고를 제한하기 위한 복잡하고 다양한 제도들이 시도됐다. 대법원에 보낼 사건을 미리 추려내는 ‘고등법원 상고부’가 1948년과 1961년에 설치됐다.(각각 1~2년 뒤 폐지) 1981년 전두환 신군부의 국가보위입법회의가 상고 여부를 대법원 허가로 결정하는 ‘상고허가제’를 실시했다.(1990년 폐지) 상고심 증가에 역행하는 대법관 축소(16→13명), 법원행정처장에 대법관 임명 등도 민주적 정당성이 없는 상황에서 법원 협조가 필요했던 신군부에서 실현됐다.

이런 상고 제한 제도들은 모두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를 제한한다는 이유로 폐지됐다. 다만 현재는 중대한 법령위반이 아닌 상고 사건(형사사건 제외)에 대해선 별도 심리나 이유 설명 없이 기각하는 ‘심리불속행제도’가 1994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70~80%에 이르는 사건이 심리불속행제도로 인해 판결 이유를 적어주지도 않고 상고 기각되는 바람에 ‘이유 없는 재판’이라고도 불린다. 이 때문에 심리불속행제도가 군부독재 산물인 ‘상고허가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러면서 대법관 수는 44년째 13~14명으로 유지되고 있다.

“(대법관이 30명으로 증원되면) 모든 사건이 상고화돼서 재판 확정은 더더욱 늦어지고 그렇기 때문에 이 부분은 ‘사실심’(1심과 2심) 확대·강화와 더불어서 전체 사법제도 개혁의 일환으로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신중하고 아주 치밀한 그런 검토가 필요하다.” 5월14일 법사위에 출석한 천대엽 법원행정처장이 밝힌 ‘대법원 증원 반대’ 이유다. 대법관이 많아지면 국민이 상고심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송사 기간이 길어지고 국민 고통도 커지니 1·2심 강화를 포함한 사법제도 전체를 신중하게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임지봉 서강대 법학전문대학 교수는 “국민 피해 때문에 하급심부터 강화해야 한다는 건 대법원이 과거부터 계속 반복하는 논거”라며 “‘왜 내 인생이 걸린 사건인데 대법원에서 심리도 안 해주느냐’는 국민의 아우성 때문에 상고허가제가 폐지되는 실정이다. 더욱이 국민에게 ‘대법원 판단도 받아보자’는 의식이 더욱 강해지도록 한 건 법률심 역할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사실관계에 개입한 대법원 자신”이라고 꼬집었다.

하급심의 법률 위반만을 판단해야 할 대법원이 증거채택 범위를 이유로 사실관계를 뒤집는 관행은 하급심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는 주된 요인으로 지적된다. 2015년 대법원이 댓글 공작 사건으로 2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은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재판에서 ‘425지논’ 파일 등의 증거물 채택이 잘못됐다며 파기환송한 일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대법원장이 바뀐(양승태→김명수) 2018년 대법원은 원 전 원장에 대해 징역 4년형을 확정했다. 2020년 대법원이 실시한 법률전문가 1518명(판사 886명 포함) 대상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49.1%가 ‘대법원이 상고심에서 사실관계 판단에 과도하게 개입한다’고 답했다. 특히 법관들의 이 응답 비중(74.5%)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 아울러 젊고 경력이 짧은 판사 위주로 지방법원에 배치해 법원을 서열화하는 법관 인사 관행도 하급심 약화의 원인이다.

 

독일·프랑스 최고법원 판사는 200∼300명

최고법원 판사가 200~300여 명인 독일·프랑스처럼 대법원을 전문화·다양화해야 충실한 심리와 권리구제가 가능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종수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독일의 최고법원은 연방통상법원·연방행정법원·연방노동법원·연방조세법원·연방사회법원 등 전문분야별로 5곳으로 나뉘었고, 최고법원 법관도 300명이 넘는다. 대법원은 대법관이 많아지면 판결의 일관성·통일성을 저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대법관들이 전문화·분화돼야 오히려 판결의 일관성이 확보될 수 있다. 독일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라고 설명했다. 프랑스도 민사·형사 재판 최고법원인 파기원과 최고행정법원인 국시원으로 나뉘어 있다. 이 교수는 이어 “대법관과 법관을 대폭 증원하면 권위주의나 사법 관료화 문제도 상당히 해소될 수 있다. 대법관 같은 호칭도 마치 판사와 다른 무엇이라는 느낌을 주는데, ‘대법원판사’ 같은 중립적인 호칭으로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외 사례를 검토할 때 헌법재판소 설립 여부를 함께 따져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헌법재판소가 없는 미국·영국·일본 등은 대법관 수가 적은 반면 대법관 수가 많은 독일·프랑스 등은 우리나라처럼 헌법재판소가 설치돼 있다. 임지봉 교수는 “소수의 사건을 깊이 있게 봐서 사회 발전 방향을 제시하는 최고 법원을 ‘정책법원형’이라고 하는데, 미국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사건 규모로 보나 제도로 보나, 한국의 대법원은 프랑스·독일과 같이 개별 사건들을 충실하게 심리하는 ‘권리구제형’으로 가는 것이 맞다. 헌법재판소가 있는 나라들은 헌법재판소가 정책법원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 대법원은 정책법원형과 권리구제형을 애매하게 함께 추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대법원은 여당이 함께 추진하는 재판소원제(대법원 재판의 위헌 여부를 헌법재판소가 심사)도 민감하게 주시하고 있다. 천대엽 처장은 재판소원에 대해 사실상 4심제라며 헌법에 어긋난다(5월14일 법사위 출석 발언)고 단언했다. 앞서 헌법재판소가 한정위헌(법원의 법률 해석의 위헌 여부 판단) 형태로 법원 재판을 취소하는 결정(1997년 1차례와 2022년 2차례)을 내렸지만, 그때마다 대법원은 “법령 해석·적용 권한은 대법원을 최고법원으로 한 법원”이라며 그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임 교수는 “헌법소원제는 독일에서 그간 잘못된 재판으로 국민 기본권을 침해했다는 반성에서 처음 시작됐다. 1987년 헌법재판소 제도가 도입될 때 법원 반발에 헌법소원 대상을 정할 때 ‘법원 재판을 제외하고’라는 문구를 집어넣었던 것일 뿐, 재판소원이 위헌이라는 이론적 근거는 없다”고 꼬집었다. 판사 출신 ㄱ변호사도 “법원에서 상고심 등 재판 지연 문제에 대한 자연스러운 해결책인 대법관 증원을 탐탁지 않아 하는 건 (대법관의) 희소성과 권위가 떨어진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말했다.

조희대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2025년 5월1일 오후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의 공직선거법 사건 전원합의체 선고를 위해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 입장해 자리에 앉아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조희대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2025년 5월1일 오후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의 공직선거법 사건 전원합의체 선고를 위해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 입장해 자리에 앉아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법원 신뢰도, 검찰 이어 뒤에서 둘째

그렇다면 재판의 권위는 어디에서 나올까. 소수인 최고 법관들의 결정에서 나올까. ‘2025~2026 유권자 패널조사’(한겨레·한국정당학회, 5월8~11일 2775명 대상 조사)에서 10점 척도(0~10점)로 해당 기관의 신뢰도 지수를 물어보니, 법원은 국회와 동점인 3.8점을 기록했다. 검찰(3.2점)에 이어 뒤에서 둘째다. 행정부(4.2점)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4.7점)보다도 낮았다. 6개 기관 중 헌재가 5.2점으로 가장 높았다.

“국민이 납득하는 판결이 많이 나와야 권위가 생겨나는 것 아닐까요. 세상의 절반이 여성인데 여성 대법관은 3명밖에 안 됩니다. 특정 대학·성·연령대·출신에 편중돼 있으니 전원합의체에서조차 치열한 논쟁이 이뤄지지 않습니다. 인권의 최후 보루인 대법원이 억울한 국민의 목소리를 더 반영하는 것이 대법원 신뢰를 높이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재근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이 한 말이다.

 

김양진 기자 ky029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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