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 측근과 이준석 전 대표 사이 알력으로 시작된 국민의힘 내홍이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당내 갈등이 눈덩이처럼 커지는 과정에 ‘불쏘시개’가 된 사건이 몇 차례 있었지만 주호영 비상대책위원장의 직무를 정지한 법원의 결정도 큰 역할을 했다. 2022년 8월26일 서울남부지법 민사51부(재판장 황정수)는 주호영 비대위원장 체제가 정당성이 없다며 이 전 대표의 비대위원장 의결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다. 이 결정으로 여당은 일주일째 ‘아노미’ 상태에 빠져 있다.
권성동 원내대표와 국민의힘 의원들은 궁리 끝에 새로 비상대책위원회를 세우기 위해 당헌을 고치기로 결의했다. 법원이 비상대책위 출범이 잘못됐다는 근거로 “비상상황이 아니다”라는 이유를 들자, 당헌에 ‘선출직 최고위원 5명 가운데 4명이 궐위’된 상황을 비상상황으로 규정해 새 비대위 설치 근거를 명확히 하겠다는 것이다. “근본 문제 해결이 아니라 법적 쟁송이 계속 이어질 수 있다”(최재형 의원), “편법·탈법 꼼수이고 민심에 역행하는 것”(윤상현 의원) 등 반발이 나왔지만 권 원내대표는 9월5일 전국위원회를 열어 당헌 개정을 강행하기로 했다. 추석 전인 9월8일에 새 비대위를 출범시키겠다는 목표도 제시했다.
박정하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8월31일 브리핑에서 “당헌 개정안이 정리되고 새 비대위가 출범되면 법적 문제에서 자유로워질 것으로 해석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검사 출신(권성동 원내대표), 판사 출신(주호영 비대위원장) 등 법조인이 즐비한 국민의힘이 ‘법적 문제가 없다’고 자신하며 비대위를 출범시켰다가 법원에 의해 좌초된 만큼 새로운 비대위의 존속 여부도 ‘예측 불가’ 상황이다.
이준석 전 대표는 새 비대위 출범을 막기 위해 전국위원회 개최 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앞서 권성동 원내대표와 비상대책위원 전원의 직무도 정지해달라는 가처분 결정도 추가로 냈다. 주호영 비대위원장 역시 자신의 직무를 정지한 법원 결정에 이의신청을 냈다. 추가 가처분과 이의신청 모두 같은 재판부인 서울남부지법 민사51부가 다시 맡게 됐다. 양쪽 입장을 듣는 신문기일은 9월14일로 잡혔다.
여당의 집안싸움이 막장 법정 드라마로 번지는 과정에 법원도 ‘불쏘시개’ 구실을 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반적으로 정당 내부의 의사결정은 고도의 정치적 행위이므로 정당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게 법원의 기조였다. 법원은 의사결정 절차에 위법성이 있는지 정도만 따져왔다. 하지만 주호영 비대위원장의 직무를 정지한 재판부는 이런 관행과 달리 적극적으로 정당 의사결정 내용이 정당한지도 판단했다. 재판부는 “비상상황이 아닌데 비상상황을 만들어 비대위를 출범한 건 정당활동이 민주적이어야 한다고 규정한 헌법을 위반했다”고 밝혔다.
‘비상상황’을 규정한 국민의힘 당헌 제96조 1항은 “당대표가 궐위되거나 최고위원회의 기능이 상실되는 등 당에 비상상황이 발생한 경우, 안정적인 당 운영과 비상상황의 해소를 위하여 비상대책위원회를 둘 수 있다”고 돼 있다. 이준석 전 대표가 ‘성접대 증거인멸 교사’ 의혹과 관련해 ‘6개월 당원권 정지’ 징계를 받은 이후 권성동 원내대표가 당대표 직무대행을 맡았는데, 재판부는 권 원내대표가 직무대행으로서 일상적인 당대표 업무를 수행하는 점을 비상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한 근거로 제시했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법원의 논리가 충분하지 못해 논란을 일으켰다고 평가했다. 그는 <한겨레21>과 한 통화에서 “사고 등 비상상황에서도 당대표 권한대행이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데 ‘권한대행이 직무를 수행하기 때문에 비상상황이 아니다’라는 건 논리적으로 안 맞는 얘기”라며 “비상상황인지는 당헌에 의거해 판단하고 이 해석이 객관성과 공정성을 확보해야 하지만 법원의 논리에 문제가 있어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허영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는 당이 비상상황인지 아닌지는 ‘정당활동의 민주적 정당성’과 관계없는 문제이므로 법원이 판단 자체를 해선 안 되는 사안이라고 했다. 허 교수는 “법원이 이 문제를 심판하는 건 정치 영역에 끼어드는 것인데 이는 헌법이 지향하는 삼권분립의 가치체계와 상극이다”라고 말했다.
과거 정당 내부 갈등으로 당사자들이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한 사례를 보면 법원은 절차적 위반이 명확할 때 문제로 삼되 정치적 판단은 존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2016년 4·13 총선 때 새누리당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은 주호영 의원의 지역구 ‘대구 수성을’을 여성우선추천지역으로 선정하고 이인선 현 국민의힘 의원을 후보로 공천했다. 주 의원이 공천 심의 과정에서 의결정족수를 채우지 못했다며 공천관리위 결정의 효력을 정지해달라고 가처분 신청을 냈고, 법원은 절차상 하자를 인정해 효력을 정지했다. 하지만 이후 공천관리위는 단 1시간 동안 후보자를 다시 공모한 뒤 이인선 후보를 재공천했다. 후속 절차 역시 무리수를 둔 측면이 있었고 한 당원이 다시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지만, 같은 재판부는 “추천 절차에 흠은 있지만 후보자 등록 무효 사유에는 해당하지 않는다”며 재공천의 정당성을 인정했다.
2019년 바른미래당에서는 당대표의 최고위원 지명 권한을 둘러싼 다툼이 있었다. 당시 손학규 대표가 국민의당 계열인 주승용·문병호 의원을 지명직 최고위원으로 임명하자, 바른정당 계열 하태경 의원은 최고위원과 협의하지 않았다며 법원에 손 대표의 결정을 취소해달라고 가처분 신청을 냈다. 하지만 법원은 절차상 규정 위반이 없다고 보고 기각했다. 당시 재판부는 “손 대표의 최고위원 지명은 헌법상 정당인 바른미래당의 최고위 구성에 관한 것으로, 정당으로서의 자율성과 자치가 최대한 보장받아야 하는 사안”이라고 밝혔다.
법원 판결의 정당성을 따지기 이전에 정치적 갈등을 타협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사법부의 힘을 빌리는 이른바 ‘정치의 사법화’ 현상에 대한 우려도 크다. 이번 국민의힘 내분은 직접적으로는 성접대 증거인멸 교사 의혹으로 징계받은 이 전 대표의 복귀를 막기 위해 윤석열 대통령 측근들이 서둘러 새 대표를 세우려다 터졌다. 하지만 넓게 보면 윤 대통령과 이 전 대표 사이에 쌓인 앙금이 해소되지 못하고 커져가는 동안 당내 갈등 중재 기능이 실종됐다는 점이 문제다. 권성동 원내대표는 이 전 대표를 ‘내부 총질’한다고 비난한 윤 대통령의 문자메시지를 언론에 노출시키는 미숙함으로 갈등만 부추겼다.
검사 출신 금태섭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서울남부지법의 가처분 인용 결정 당일 페이스북에 “당연히 정치로 풀 수 있고 또 풀어야 하는 문제를 법적으로 해결했다는 점에서 이번 결정이 국민의힘 완패인 것은 틀림없지만 누구의 승리라고도 말하기 어렵다. 정치의 완패”라고 말했다.
정치평론가인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과거엔 토론을 거쳐 합의에 이르고, 합의가 안 되면 다수결에 의하든 여론의 흐름에 따르든 승복하는 게 정치였지만 점점 그게 잘 안 된다. 진영논리가 강해지는 현상 때문인 측면도 크다”고 말했다. 그는 홍준표 대구시장이 2011년 한나라당 대표 시절 고립무원 상태에서 대표직을 내려놓은 사례를 언급했다. 당시 홍 대표는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 당 관계자의 선거관리위원회 누리집 디도스 공격 사건 등 악재가 터지자 당내 사퇴 요구를 받아들여 다섯 달 만에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윤 실장은 “과거엔 본인이 억울하더라도 권위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대표직을 내놓았는데 최근에는 정치에 그런 문화가 없다. 이것이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관행, 합의, 정치를 인정하는 문화가 깨져가고 있다”고 말했다.
민주화 이후 사회가 다원화하고 이익집단이 파편화되는 방향으로 바뀌면서 정치의 역할이 위축되는 구조적 원인 때문이라는 진단도 있다. 채진원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교수는 ‘한국에서 분점정부와 정치의 사법화 현상의 상관성’ 논문(2011년)에서 “후기산업화 등 변화된 시대 상황으로 정당의 이익집성 능력이 떨어지면 사회적 합의를 이뤄내기 힘들어지고, 공방과 파행이 심해질수록 공백의 부담을 헌법재판소와 사법부와 공적인 권위체에 떠넘기는 메커니즘이 발생한다”고 분석했다. 채 교수는 <한겨레21>과 한 통화에서 “이익이 파편화되는 상황이 정당 내부에서는 계파 갈등, 파벌화로 작동한다. 대의명분이나 큰 이익보다는 정치인들이 눈앞의 이익을 갖고 싸우면서 자꾸 ‘옳고 그름’을 따지는데 이렇게 되면 갈등 조정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채 교수의 말처럼 이준석 전 대표는 2022년 8월31일 페이스북에 “결국 의(義)와 불의(不義)의 싸움이 되어간다”고 썼다. 권성동 원내대표 역시 8월29일 윤 대통령이 새 비대위 구성 방침에 “존중한다”는 입장을 내면서 힘을 싣자 당내 사퇴 요구에도 꿈쩍하지 않고 있다. 다만 ‘수습 뒤 거취 표명’ 입장을 밝힌 만큼 새로 비대위가 출범하면 원내대표에서 물러날 가능성이 크다.
이 전 대표의 복귀를 원하지 않는 쪽은 이 전 대표의 징계 기간이 끝나는 2023년 1월8일 전에 전당대회를 열어 새 대표를 선출하려 한다. 이 전 대표는 소송전 등 모든 수단을 총동원할 태세다. 여기에 이 전 대표의 성접대 의혹에 대한 경찰의 수사 결과도 주요 변수다. 결국 이준석과 ‘윤핵관’(윤석열 핵심 관계자)이 만들어내는 막장 드라마의 끝은 주인공들이 아닌 사법부 손에 결판나게 됐다.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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