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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그 길을 밟고 갔다

예산안 볼모로 특정 법안 반대-밀실협상-날치기-예산 확보 뽐내기,

매해 반복되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렸다’
등록 2019-12-14 15:06 수정 2020-05-03 04:29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12월10일 밤 자신들의 반대에도 예산안이 통과되자 본회의장 앞에서 ‘날치기’ ‘세금도둑’ 등이 쓰인 손팻말을 들고 항의하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선임기자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12월10일 밤 자신들의 반대에도 예산안이 통과되자 본회의장 앞에서 ‘날치기’ ‘세금도둑’ 등이 쓰인 손팻말을 들고 항의하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선임기자

매년 12월이 되면 하나의 유령이 국회를 배회한다. ‘날치기’라는 유령이. 여당의 예산안·법안 단독 처리를 막기 위해 ‘국회 선진화법’이 도입돼도 국회를 떠날 줄 모른다. 올해도 정기국회 마지막 날인 12월10일 밤에 국회 본회의장에 유령이 등장했다. ‘4+1(더불어민주당·바른미래당·정의당·민주평화당+대안신당) 협의체’에서 합의한 2020년도 예산안(약 512조3천억원)이 본회의에 상정되자 자유한국당 의원은 ‘날치기’ ‘세금도둑’ 등이 쓰인 손팻말을 들었다. 자유한국당의 거부 속에 예산안이 표결(162명 표결·찬성 156, 반대 3, 기권 3표)을 통해 처리되자 한국당 의원들은 “문희상 국회의장은 사퇴하라” “독재 타도” 등의 구호를 외쳤다.

한국당 ‘나를 밟고 가라’ 농성 시작

1년 전인 2018년 12월8일 국회 본회의장에서도 ‘날치기’가 등장했다. 선거제도 개혁을 요구하던 야 3당(바른미래당·민주평화당·정의당) 원내대표는 민주당과 한국당의 합의로 본회의에 상정된 예산안에 대해 반대토론을 하며 “기득권 정당 야합” “날치기 통과” “더불어한국당 의총 성사”라고 양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예산안은 야 3당의 불참 속에 민주당·한국당·무소속 의원의 표결로 처리됐다.

1년 전 야 3당은 예산안 처리에 반발해 국회 본회의장 앞에서 농성했다. 올해 12월11일에는 같은 자리에서 한국당이 ‘나를 밟고 가라’는 펼침막을 펴고 무기한 농성을 시작했다. 정당들에 ‘날치기’란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일까.

매년 ‘날치기’ 논란이 반복되는 건 한 해의 국가 살림을 결정하는 예산안이 연말 국회에서 ‘볼모’가 되기 때문이다. 예산안은 정부와 여당의 국정 철학과 정책 방향을 아는 바로미터다. 예산안 심의·의결권은 입법권과 함께 국회의 주요 권한이다. 자신들의 국정 과제 추진과 연결된 예산안을 제때 통과시키려는 정부·여당과 문제 소지가 있는 정책과 예산을 깎으려는 야당의 힘겨루기는 필연적이다. 그럼에도 ‘날치기’ 논란이 반복되는 건 예산안을 지렛대로 야당이 특정 법안 처리를 반대(또는 추진)하는 데서 비롯된다. 국회 선진화법 이전에 해를 넘겨 예산안이 처리되는 일이 되풀이된 이유는, 야당이 다른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 예산안 처리를 끝까지 막았기 때문이다. 선진화법은 이런 폐단을 막기 위해 2014년부터 예산안 심사 완료 전이라도 12월1일이 되면 예산안을 본회의에 자동부의(표결을 위한 상정 전 단계)해 다음날 처리하도록 규정했다. 시행 첫해인 2014년은 예산안을 12월2일 처리하며 시한을 지켰지만, 2015년부터 올해까지 예산은 법정 시한 뒤에 처리되면서 제도 취지가 무색해지고 있다.

지난해 야 3당이 예산안 처리에 반발한 것은 ‘예산안-선거제도 개편 연계 처리’ 요구를 여당인 민주당이 응하지 않고 한국당과 예산안 처리를 합의했기 때문이다. 올해는 반대로 패스트트랙(신속 처리 안건)으로 지정돼 본회의에 상정될 선거법 개정안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의 처리를 막기 위해 한국당이 예산안 심사를 사실상 보이콧했다. 이에 민주당이 패스트트랙에 합의했던 4+1 협의체의 뜻을 모아 예산안을 처리한 것이다.

“한 달 안에 500조원 예산 심사는 눈속임”

한국당은 기존 관행대로 여야 교섭단체가 아닌 4+1 협의체에서 예산안을 심사하고 예산 수정안을 작성한 것은 법적 근거가 없는 깜깜이 예산 심사라고 반발하며 ‘날치기 프레임’을 밀어붙이고 있다. 한국당 소속인 김재원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예결위) 위원장은 4+1 협의체에 대해 “국민의 세금을 도둑질하는 떼도둑 무리에 불과하다”고 원색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황교안 당대표는 12월12일 “좌파독재 완성을 위한 의회 쿠데타가 임박했다. 우리는 비상한 각오로 막아내기 위한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했다. 짧게는 선거법 등의 처리를 막기 위해, 길게는 내년 총선까지 염두에 둔 여론전으로 읽힌다.

그러나 한국당의 ‘투쟁’이 좀처럼 힘을 받지 못하는 것은 4+1 협의체에서 협상 테이블로 돌아오라고 지속해서 요청했지만 안건 199건에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걸며 사실상 보이콧했기 때문이다. 12월9일 새로 선출된 심재철 원내대표가 문희상 국회의장의 중재로 예산안 처리와 필리버스터 철회를 약속했지만 이마저도 하루 만에 뒤집었다. 한국당은 여야 3당 예결위 예산안 심사 테이블로 돌아온 지 하루 만인 12월10일 다시 협상장을 박차고 나갔다. 민주당이 4+1 협의체에서 만든 예산안을 고수한다는 이유였다. 문희상 의장의 중재로 이인영(민주당)·심재철(한국당)·오신환(바른미래당) 3당 교섭단체 대표가 이날 저녁까지 또다시 마라톤협상을 이어갔지만 끝내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한국당이 필리버스터로 ‘지연’은 시킬 수 있지만 4+1 협의체가 뜻을 모을 경우 예산안처럼 선거법과 공수처법은 통과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소동이 벌어지는 것은 특정 정당의 ‘날치기’ 때문만은 아니다. 매년 졸속·깜깜이 심사라는 비판을 받는 국회의 예산 심사 구조와 관행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9월3일(회계연도 개시 120일 전)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예산안은 상임위원회 예비심사-예결위 심사-예결위 조정심사소위원회(예산소위) 등의 과정을 거치며 수정돼 본회의에 올라간다. 국회가 예산을 들여다보는 시간은 90일에 불과한데 이마저도 전년 결산을 마무리하면 한 달 남짓만 남는다. 올해 예결위에서 2020년 예산안을 본격적으로 심의한 것은 10월28일부터였다.

여야는 빠듯한 시간을 이유로 결국 법적 근거도 없는 ‘소소위’(여야 예결위 간사 협의체)를 구성해 수백조원의 예산을 주무른다. 회의록도 없고 언론에 공개되지 않는 소소위는 ‘밀실협상’이라는 비판에 항상 시달린다. 지역구 민원이 담긴 ‘쪽지 예산’도 소소위 단계에서 반영될 가능성이 크다. 올해는 소소위의 역할을 4+1 협의체가 대체한 것이다. 한 초선 의원은 “500조원 예산을 한 달 정도 심사하는 것은 눈속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당연히 졸속 심사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견제를 덜 받는) 정부만 편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문제를 풀기 위해 예산안 심의 기간 확대, 예결위의 상시적 예산 심의 등 제도 개선 요구가 국회 안팎에서 매번 나왔지만 공염불에 그쳤다.

‘남의 것’이 아니라 ‘국민의 것’

‘날치기 논란’이 지나가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이 있다. 의원들의 ‘지역구 예산 확보’ 뽐내기다. 한국당 소속 장석춘 의원은 당이 반대했던 예산안이 통과되자마자 지역구 예산 확보를 홍보하는 보도자료를 냈다가 논란이 돼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지역구 예산 확보가 실제 지역민에게 도움이 된다면 문제될 것은 없다. 하지만 매년 졸속·깜깜이 심사로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여야 모두 국민에게서 ‘날치기’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날치기의 다른 사전적 의미는 ‘남의 물건을 잽싸게 채어 달아나는 도둑(질)’이다. 예산은 의원들의 것이 아니라 ‘국민의 것(세금)’이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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