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한 바람이 불던 2017년 마지막 날. 새해 연휴를 하루 앞둔 일요일이라 국회는 텅텅 비어 있었다. 정당들도 모처럼 여유를 즐기는 한가한 날이었다.
그러나 국민의당은 이날 아침부터 무척 바빴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의 재신임을 묻는 전 당원 투표 결과가 발표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 투표는 외형상 안 대표의 신임을 묻는 것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바른정당과 통합할지 국민의당 내부의 찬반 의사를 묻는 성격이었다. 통합 반대파는 당원 투표에 조직적으로 불참해 이번 투표의 의미를 퇴색시키려 했지만 투표율은 23%로 예상보다 높았다. 통합 찬성파인 안 대표에 대한 재신임 찬성률도 74.6%로 반대를 압도했다.
깊게 파인 감정의 골“전 당원 투표 결과 재신임이 확정되었음을 선포….” “쾅!”
오전 10시10분께 이동섭 국민의당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 국회 인근 당사에서 투표 결과를 발표했다. 발표가 끝나갈 무렵 호남 출신으로 추정되는 한 당원이 달려들어 위원장 앞에 놓인 탁자를 힘껏 걷어찼다. 당직자들에게 끌려나가면서 그는 “야, 이 ××놈들아”라는 걸쭉한 욕설을 퍼부었다. 이동섭 위원장은 힘겹게 “선포합니다”라는 말로 길었던 이날 하루 행사를 마무리지었다.
이 장면은 통합 찬성파와 반대파 사이에 깊게 파인 감정의 골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투표 결과에 납득하지 못한 통합 반대파는 약 30분 뒤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의당 지키기 운동본부’를 발족한다. 보수 야합 중단하고 안철수 대표는 즉각 퇴진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선언에 조배숙, 유성엽, 박지원, 천정배, 정동영 등 호남 쪽 중진 18명이 이름을 올렸다. 국민의당 전체 의원 39명 가운데 절반에 육박하는 수였다.
비슷한 시각, 안철수 대표도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그는 “좌고우면하지 않고 통합의 길로 전진하겠다”며 정면 돌파 의지를 드러냈다. 반대파가 아무리 막아서도 1월 말로 예상되는 전당대회(전대)를 강행해 통합을 추인받겠다는 뜻이다. 안 대표는 ‘산을 만나면 길을 내고 물을 만나면 다리를 놓는다’(봉산개도 우수가교)를 새해 자신의 사자성어로 택했다고 밝혔다.
안 대표의 말대로 그의 앞에는 험한 산과 계곡이 놓여 있다. 통합 반대파는 전대 의장인 이상돈 의원을 통해 전대 개최를 막거나, 필리버스터(무제한 의사진행발언)로 안건 통과를 무산시키겠다는 전략이다. 찬성파는 의장 대행으로 다른 사람을 지명하거나 의장의 권한을 줄이는 시행세칙 변경으로 맞서겠다고 벼르고 있다.
반대파에선 1차 저지선인 전대에서 통합안을 막지 못하면 집단 탈당해 개혁신당을 꾸리겠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온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다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국민의당 지키기 운동본부’에 참여하는 의원들을 한데 묶을 이념적 지향성이 옅은데다, ‘반안철수’를 제외하면 하나로 뭉칠 명분이 없어서다.
통합신당 지지도는 높지만…안 대표의 고집대로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이 통합한다면, 통합신당은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을까. 최근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전망은 나쁘지 않다. 통합신당의 지지도가 두 당의 지지도 합보다 높게 나오기 때문이다. MBC가 코리아리서치에 의뢰해 2017년 12월28~29일 성인 1017명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 통합신당의 지지율은 19.0%로 자유한국당(12.3%)을 크게 앞질렀다. 현재 바른정당의 지지율은 6.6%, 국민의당은 4.9%에 머무르고 있다. 가 리서치앤리서치에 의뢰해 12월29~30일 성인 1005명에게 한 여론조사 결과도 비슷하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이 통합한다면 어느 정당에 투표하겠느냐’는 질문에 통합신당은 14.2%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40.8%)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자유한국당의 지지율은 10.1%에 그쳤다. 통합신당의 지지율은 대구·경북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자유한국당을 앞질렀다.
이는 두 당이 큰 탈 없이 무사히 화학적 결합을 마쳤을 때를 전제로 한 결과다. 통합 과정에서 일부 의원들이 줄줄이 탈당하거나 계파 갈등이 불거질 가능성이 적지 않다. 실제 한국 정당사에서 두 개 이상의 정당이 통합해 안정을 이룬 경우는 1990년 ‘3당 합당’과 2012년 ’새누리당-선진통일당 흡수합당’ 등 극히 일부다. 를 쓴 김현우 글로벌교육문화연구원 사회과학부 교수는 책에서 “해방 이후 2000년까지 70여 건의 정당 통합 시도가 있었는데 성사된 사례 중 대부분은 3년 미만에 통합신당이 와해됐다”고 적었다. 그는 “정당 통합은 성사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통합에 참여한 세력 간의 융화와 장기간의 통합 상태 지속이 중요하기 때문에, 정당 통합을 평가함에 있어서 그 기준은 무엇보다도 안정성과 지속성에 두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나마 통합에 성공한 3당 합당도 적지 않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이 이끌던 민주정의당과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합쳐 216석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을 창당했다. 하지만 내각제 개헌각서를 둘러싸고 계파 갈등이 폭발해 분당 직전의 위기까지 몰렸다. 이후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 의석이 149석으로 급감했다.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의 가장 큰 갈등 요인은 외교·안보관의 차이다. 1월4일 국민의당과 바른정당 의원들의 모임인 국민통합포럼 토론회에서도 두 당의 외교·안보관에 분명한 차이가 있고 이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 대표적으로 당헌과 강령에서 한반도 비핵화, 남북관계 개선, 햇볕정책, 북한 인권 개선 등의 문제를 어떻게 자리매김할지를 두고 의견이 엇갈린다.
햇볕정책 견해가 쟁점호남을 주요 지역 기반으로 한 국민의당에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표 업적인 햇볕정책의 지지가 매우 높다. 실제 국민의당의 호남 쪽 주요 의원들은 햇볕정책의 주요 입안·실행자였다. 박지원 의원은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이뤄진 대북 송금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고, 정동영 의원은 노무현 정부의 통일부 장관으로 햇볕정책을 시행한 당사자다. 이들은 현재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에 공감하며, 한반도 비핵화와 남북관계 개선을 병렬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비해 바른정당은 경제정책에선 중도에 가깝지만, 북핵 등 안보 현안에는 보수적 견해를 유지하고 있다. 바른정당은 현재 국민의당 강령에 포함된 “대북 포용정책을 계승·발전시킨다”는 내용을 빼기 원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두 정당의 통합이 과거 정당 간 통합과는 다른 의미를 지녔다는 해석도 있다.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은 “기존 정당 통합은 진보든 보수든 분열했던 한 세력이 도로 합쳐지는 양상이었지만 이번 통합은 다르다. 기존 보수의 일부와 진보의 일부가 합쳐 중도 세력을 형성하려 한다. 과거 정당들이 보였던 이합집산의 틀로 봐선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양극화된 양당제로 회귀하려는 강한 압박 속에서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중도 정당을 만들어 다당제 구조를 유지하려는 시도로, 한국 정치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실험”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변지민 기자 dr@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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