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2일 치러진 새누리당 원내대표 선거에서 유승민 의원은 박빙 승부가 펼쳐질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19표 차이(84 대 65)로 이주영 새누리당 의원을 크게 이겼다. 표면적으로는 ‘친박 이주영’과 ‘비박 유승민’의 싸움에서 비박이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속내는 약간 더 복잡하다. 이주영 의원은 2년 전 원내대표 선거에서 비박 대표로 출마해 친박 대표였던 최경환 의원(현 경제부총리)에게 패한 경험이 있다. 반대로 유승민 원내대표는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당대표를 맡던 시절 비서실장을 지낸 ‘원조 친박’이다. 그랬던 두 사람이 어느샌가 반대 입장이 돼 선거를 치른 것이다. 유 원내대표의 당선에 친박 일부가 어느 정도 역할을 했다거나, 이주영 의원이 ‘골수 친박’인 홍문종 의원과 짝을 이룬 것이 중도표를 갉아먹는 패인으로 작용했다는 등의 후문은 각각 두 인물이 이런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이번 선거를 단순히 계파 싸움의 결과로 봐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일부 친박을 포함해 많은 수의 새누리당 의원들이 유승민 원내대표를 선택한 이유는 뭘까. 은 이번 선거에서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표를 획득한 것으로 보이는 수도권과 대구·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유 원내대표를 선택한 7명의 의원에게 ‘유승민을 찍은 이유’에 대해 구체적으로 물었다.
의원들이 공통적으로 꼽은 이유는 ‘위기감’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과 함께 최근 새누리당의 지지율까지 동반 하락하면서 ‘이대로 가면 안 되겠다’는 위기감이 작동했다는 것이다. 대구·경북 지역의 한 의원은 “가장 큰 것은 위기감이다. 수도권에서 새누리당 지지도가 20% 밑으로 내려앉았다거나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30% 밑을 찍었다는 조사가 나오니까 이런 것에 대해 특히 수도권 의원들의 위기감이 팽배했다”고 분석했다. 충청 지역의 한 의원도 “지금은 대다수 의원들이 변화와 혁신을 원하는 시기다. 총체적으로 위기라는 공감대를 가지고 우리 스스로 혁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당이 위기를 맞은 이유는 ‘청와대의 불통’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았다. 수도권의 한 재선 의원은 “청와대가 일도 못하는데 뻣뻣하고 호통을 치고 있다. 소통은 먼저 겸손해야 한다. ‘당신들 얘기도 맞고 우리가 부족하지만 도와달라’고 얘기해야 하는데, 우리 얘기가 맞으니 따라오라고만 하니 (의원들도) 열받는 거다. 의원들이 점점 체념하는 와중에 지지율 하락이 현실화되니까 ‘다 죽게 생겼다’는 불안감이 왔다. 유승민 원내대표의 당선은 이런 일련의 과정이 같이 설명돼야 한다”고 말했다. 대구·경북 지역의 한 의원도 “친박(이주영-홍문종) 결합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 최근에 연말정산 등 국민들 정서와 민생 현장을 살피지 못하는 정부·각료의 안이한 대처가 화를 부르고 있다는 인식도 작용했다. 의원들이 민심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나. 유 원내대표의 당선은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로 봐야 한다”고 꼬집었다.
그동안 당 지도부가 어긋나게 행동하는 청와대를 제대로 견제하지 못하고 거수기 노릇만 해온 것에 대한 지적도 나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청와대에 ‘쓴소리’를 하는 대신 ‘입단속’을 해야 했던 의원들의 피로감이 선거에서 상당하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한 비례대표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새누리당의 문제는 의원들이 소외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158명 한명 한명이 헌법기관으로서 역량이 뛰어난데 그들이 스스로 외롭다고 느끼고 있다. ‘내가 국회의원으로서 뭘 하는 거지?’라는 생각을 하는 거다. 주체적으로 역량을 발휘할 통로나 기회가 없고 하다못해 말조차 편하게 하지 못하는 것, 의원들이 당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것이 우리 당의 가장 큰 문제였다. 유승민 원내대표라면 의원들의 이런 소외감을 잘 다독여 새누리당의 주인으로 자리매김하도록 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른바 충성심에는 변함없다’는 신뢰감그렇다면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 기반인 대구·경북 지역이나 친박계에서 유 원내대표를 선택한 것은 어떤 이유일까. 그가 ‘원조 친박’으로서 박 대통령에게 완전히 등을 돌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대구·경북 지역의 한 의원은 “친박의 이너그룹들은 이주영·홍문종 조를 찍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너그룹이 아닌 많은 사람들은 ‘유승민이 그만하면 잘할 수 있다. 대통령과도 정책을 가지고 얘기할 수 있지만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이른바 충성심에는 변함이 없다’는 신뢰가 있다. 그러니까 아주 안쪽의 친박 외에는 유승민을 도와주자는 식으로 분위기가 흘러갔다”고 말했다. 유 원내대표가 강조한 ‘대통령에 대한 쓴소리’는 국정운영을 더 잘하게 하기 위한 채찍질일 뿐 본격적으로 대통령과 맞서보겠다는 ‘전쟁 선포’는 아니라는 의미다. 유 원내대표 본인도 선거전에서 “저만큼 사심 없이 대통령의 성공을 바라는 사람이 없다고 자부한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이런 점이 친박 의원들에게 제대로 먹혀들어간 것이다.
‘유승민’이라는 개인이 가진 인격도 선거의 승패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수도권의 한 의원은 “유 원내대표는 세 가지 장점이 있다. 첫째는 솔직하다, 둘째는 용기 있다, 셋째는 한결같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당대표나 원내대표를 뽑는 선거에서 선거 당사자에게 ‘도와준다’거나 ‘못 도와준다’는 얘기를 확실히 한다. 양쪽 다 도와줄 것처럼 하지 않는 것이다. 또 유 원내대표는 자신이 손해 볼 것을 생각하지 않고 소신대로 행동한다. 이해관계가 얽힌 일도 명분이 어긋나면 안 하고 마는 성격이다”라고 설명했다. 앞선 원내대표인 최경환 경제부총리와 이완구 국무총리 후보자는 원내대표를 발판으로 임명직에 가고 싶었던 욕구가 눈에 보인 반면, 유 원내대표는 임명직에 대한 욕심이 없기 때문에 당 혁신에 주력할 것이라는 분석도 함께 나왔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부족한 자질인 ‘소통’에서 강점을 보인다는 평가도 있다. 한 비례대표 의원은 “초선 비례대표로 정치 경험이 까마득한 후배인데 소통이 너무 잘됐다. 별것 아닌 얘기도 귀담아들어주고, 연락하고 싶을 때 연락이 가능했다. 유 원내대표가 말하는 것을 들으면 미래의 시대정신을 굉장히 많이 고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새누리당만의 고민이라기보다 국가 차원의 시대정신을 고민하고 그것을 자기의 가치관이나 살아왔던 행보, 소신과 어떻게 연결해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 등을 초선인 나에게도 편하게 얘기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유 원내대표가 선택된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새누리당의 ‘정책통’으로서 그동안 민심과 괴리돼왔던 정부의 여러 정책들에 대해 확실한 주도권을 쥘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다. 유 원내대표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위스콘신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선임연구원을 지낸 정통 ‘경제통’이다. 여기에 국회 외교통상위원회 위원과 국방위원장까지 거치면서 국방·외교·안보 분야까지 발을 넓히는 등 정책을 총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금까지 청와대가 주도권을 쥐어온 당·정·청 관계에서 당이 존재감을 나타낼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진 것이다. 부산·경남 지역의 한 의원은 “그동안 당·정·청 간에 소통 면에서 아쉬움이 있었다. 서로 막혀 있던 부분을 이번에 유 원내대표가 뚫어준다면 원래 가고자 했던 방향으로 속도를 붙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비례대표 의원도 “당·정·청에서 지금은 정·청만 있다. 당이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당이 들어가게 하는 데 유 원내대표의 역할이 가장 크게 있어야 한다. 정확하게는 현장의 목소리, 민심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고 당부했다.
당내 많은 이들이 일단 유승민 원내대표의 진정성에는 신뢰를 보이고 있다. 원내대표 당선 뒤 며칠 동안 그가 한 발언만 봐도 “증세 없는 복지는 거짓말이다” “국민 눈높이를 감안한 수준의 과감한 인적 쇄신이 됐으면 좋겠다” “건강보험료 (개편) 추진의 취지에 대해서는 옳다고 생각을 하고 다시 추진을 하겠다” “개헌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등 기존 여당 원내대표들과는 차별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문제는 청와대가 과연 유 원내대표의 발언을 귀담아들을 것인가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벌써부터 이 부분에 대한 우려가 나오고 있다.
새누리당의 한 초선 의원은 “청와대가 유 원내대표의 메시지를 잘 읽는 게 중요하다. 청와대가 받아줄 자세가 돼 있느냐. 만약 안 돼 있다면 콩가루가 되는 것이다. 서로 이야기를 들어줄 자세가 돼 있고 서로 견인하고 받쳐주고 하면 찰떡 집안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청와대가 그 뜻을 못 읽고 있다는 게 답답하다”고 말했다.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을 지냈던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도 최근 라디오 인터뷰에서 비슷한 지적을 했다. “과연 청와대에서 이 부분(증세 논란, 보험료 개편 등)에 대해서 순수하게 협력할 것인가. 만약 그렇게 할 것 같으면 지금까지 이 문제를 세금 문제를 주도해온 최경환 부총리나 안종범 경제수석이 그만둬야 한다. 문책을 해야 되지 않겠나. 이런 문제가 있는데 그것이 과연 가능하겠는가. (인적 쇄신 부분에서도) 박근혜 대통령이 이른바 ‘문고리 3인방’이나 ‘십상시’, 이런 사람들을 쇄신 차원에서 교체하기는 쉽지 않다.”
청와대는 순수하게 협력할 것인가유승민 원내대표는 지금 정치적인 시험대에 올라 있다. 여기서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할 경우 청와대는 물론 야당과의 관계에서도 확실한 주도권을 쥐게 되는 기회다. 그렇게 된다면 이렇다 할 대선주자가 없는 여권에서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의 반열에까지 단숨에 올라설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이 그다지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청와대의 인식 변화와 함께 앞으로 당내에서 터져나올 다양한 의견을 조율할 수 있는 리더십 또한 필요해 보인다. 청와대와 극단적인 대립이 생겼을 경우 ‘원조 친박’의 굴레를 벗어나 자신의 소신을 끝까지 지켜낼 수 있을지도 지켜볼 일이다. 정치권 안팎의 많은 눈이 유 원내대표를 주목하고 있다. 과연 그의 미래에 어떤 길이 펼쳐져 있을까.
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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