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맙소사’란 탄식이 곳곳에서 나온다. 하필 단원고 생존 학생들이 ‘REMEMBER 0416’(4월16일을 기억해주세요)이 적힌 팔찌를 차고 눈물을 뿌리며 등교한 다음날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어린 꽃’들이 스러지기 전에 건져내지 못한 최소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던 정홍원 국무총리를 6월26일 주저앉혔다. 학생들의 손목에서 ‘리멤버 팔찌’를 끊어내는 듯한 결정이었다. 새누리당은 겉으론 “고뇌에 찬 대통령의 결단”이란 논평을 냈지만, 일부 의원들은 기자들에게 익명의 보호막을 치고 “오기인사” “정말 미치겠다”는 거친 말로 불편한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야권은 기가 차다는 반응이다. “총리가 걸레인가? 다른 사람 쓰려다 안 되니까 버리려던 것 다시 쓰는 걸레냐”는 심한 말도 나왔다. ‘코미디 같은 일’이란 촌평에 대해선 “이걸 코미디에 빗대면 자존심 상한다”는 개그맨의 항변이 나오는 지경이다. 왕성히 활동하는 한 개그맨이 들려준 얘기다. “이건 뭐 코미디도 아니다. 코미디의 목적은 행복감을 주는 것이다. 지금 상황을 보면 짜증만 나지 않나. 굳이 코미디에 빗댄다면 기분 나쁜 웃음이 나오게 만드는 저급 코미디 정도랄까.”
결정적 흠결이 또 부각되면청와대가 이런 반발의 분출을 예상 못하진 않았을 것이다. 박 대통령의 당선을 가까운 거리에서 도운 여권의 한 인사는 “청와대 내부에서도 정홍원을 유임시키면 안 된다는 의견이 올라갔겠지. 박 대통령이 결정(총리 유임)해 아래로 내려보낸 게 아니겠나”라고 얘기했다.
왜 그랬을까? 일단 윤두현 청와대 홍보수석이 ‘정홍원 유임’을 발표하며 밝힌 대통령의 의도는 ‘국정 공백 최소화’다. “청문회 과정에서 노출된 여러 문제들로 인해 국정 공백과 국론 분열이 크다. 이 상황을 방치할 수 없어 고심 끝에 대통령이 총리의 사의를 반려했다.”
‘정홍원 총리 사퇴 표명(4월27일)→안대희 총리 후보자 사퇴(5월28일)→문창극 총리 후보자 사퇴(6월24일)’를 거치며 국정의 수레를 전진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취지다. 슈퍼 전관예우 논란의 후보자(안대희), 역사관과 극우적 칼럼 논란의 후보자(문창극)를 내놓아 사회적 혼란을 자초한 대통령 자신의 성찰과 반성은 홍보수석의 설명 어느 곳에도 들어 있지 않다.
차라리 새누리당 다른 중진 의원의 설명이 솔직한 편이다. 이 의원은 “적당한 인물을 찾기 어려워 그런 게 아니겠느냐”고 했다. ‘대통령의 수첩인사’로 상징되는 한정된 인물군의 한계를 드러냈다는 뜻이다. 대통령과 코드가 맞거나, 맞을 만한 사람을 내놓았다가 결정적 흠결이 또 부각되면 권력누수 현상(레임덕)이 빨라지고, 7·30 재·보궐 선거도 불리하다는 판단이 ‘정홍원 유임’을 거들었다는 해석도 있다.
우상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윷놀이에서 원점으로 돌아가는 ‘빽(back)도’처럼 ‘돌고 돌아 정홍원’으로 회귀한 상황을 이렇게 보았다.
-이런, 정홍원 총리 유임이라니….
“사람을 못 구한 거다.”
-그래도 그렇지.
“자신의 (수첩) 안에서 선발할 사람이 없으면 인재를 널리 구하려고 문호를 개방해야 하는데, ‘나 안 해’ 하면서 기존 인사 기준을 바꾸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거다. 살다가 이런 인사는 처음 겪는다.”
-이번 인사에서 대통령의 감정이 느껴진다는 말도 나온다.
“인사 문제를 반성하는 게 아니라, ‘에이, 그냥 가. 야당 때문에 못 참겠다. 내가 나랑 일할 사람을 마음대로 못 써?’라는 대통령의 어깃장이 느껴진다. 문창극 후보자의 역사관은 보수·진보를 떠나 불편했던 것이다. 문 후보자가 총리를 할 사람인데, 되도 않는 공세 때문에 낙마한 거냐? 여론조사에서 국민 70% 이상이 문 후보자를 반대했다. 거기엔 새누리당 지지자들도 있는데, 그들도 야당한테 농락당한 거냐? 세월호는 온데간데없고 대통령이 국민과 야당을 원망하는 방식으로 흘러가고 있다. 대통령이 세월호를 잊었다.”
인사수석실 부활 끼워넣었지만‘정홍원 유임’은 세월호 참사에 대처하는 대통령의 말과 진정성을 한순간에 몰락시키는 위험성을 갖고 있다. 돌이켜보면 참사 이후 나온 대통령의 국가개조론과 눈물, 청와대·내각 인사 개편도 정홍원 총리 사퇴 표명으로 시작됐다. 박근혜 정부 스스로 그 출발점을 없던 일로 되돌렸다. 그래서 4월27일 정 총리의 사퇴 발표문을 눈으로 다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
[%%IMAGE2%%]“가족을 잃은 비통함에 몸부림치는 유가족들의 아픔과 국민 여러분의 분노를 보면서 저는 국무총리로서 응당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것이 당연하고, (이게) 사죄드리는 길이다.”
박 대통령이 사고 수습 이후 사의를 수리하겠다던 총리의 ‘응당한 사퇴’는 폐기됐다. 사퇴 표명 총리가 유임된 건 헌정 사상 처음이다. 정 총리가 박 대통령이 내민 ‘회생의 손길’을 붙잡은 뒤 내놓은 소감문에는 “필요한 경우 대통령께 진언드리겠다”는 다소 머쓱한 표현마저 등장한다. 정 총리는 세월호 참사 이전에도 대통령에게 고언을 했다는 평가를 받지 못했다. 정 총리의 유임 소감문에서 유심히 볼 문장이 두 군데 더 있다. “국가 개조에 앞장서서 마지막 모든 힘을 다하겠다. 저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하고 편한 마음으로 물러나도록 국민들께서 도와주시기 바란다.”
사죄가 마땅하다던 ‘분’이 이제 국가 개조의 선두에 서는 주체가 되겠다며, 자신이 편하게 공직을 그만둘 수 있도록 국민의 도움까지 요구한 것이다.
여권 내부에서도 ‘해도 너무한다’는 불만이 터지고 있다.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은 “정 총리는 세월호 참사로 대통령 대신 책임을 지고 그만둔 사람인데, 사퇴한 사람을 제자리에 갖다놓는다면 유가족과 국민이 어떻게 받아들이겠나. 대한민국 인재가 그렇게 없나? 총리 한 사람을 고르기 어려워 책임지고 나간 사람을 다시 앉힐 정도로?”라고 개탄했다. 김영우 새누리당 의원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정부라는 비판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박지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이번 인사는 해외 토픽감”이라고 지적했다.
어찌됐든 ‘정홍원 유임’을 밀어붙인 박 대통령은 ‘청와대 인사수석실 부활’이라는 보완책을 부록으로 끼워넣었다. 인사수석실에서 고위 공직자가 될 인물군을 관리하다가 인사 요인이 발생해 후보군을 추천하면, 민정수석실에서 이들을 2차 검증하던 참여정부의 모델을 일부 따라간 것이다. 하지만 ‘(나랑) 맞는 사람, 아는 사람, 쓰던 사람’들을 택하는 박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이 바뀌거나, 청와대 인사위원장인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이 총리 후보자들의 잇따른 낙마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지 않는 한 인사수석실 부활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지적이 많다. 특히 정치권에선 김기춘 실장의 통제 범위를 넘어서는 ‘비선조직’이 박 대통령의 인사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얘기까지 나돈다. 박지원 의원은 최근 그 장막 뒤의 세력을 ‘만만회’(이재만 청와대 총무비서관, 박 대통령 동생인 박지만씨, 박 대통령의 옛 보좌관인 정윤회씨)라고 부르기도 했다.
정치권에선 박 대통령의 정치 입문 시절부터 청와대까지 동행하는 또 다른 3명을 칭하는 ‘문고리 3인방’(이재만 총무비서관, 정호성 제1부속비서관, 안봉근 제2부속비서관)이 박 대통령과 민심의 간극을 더 벌리고 있다고 우려한다. 한 정부 고위 관료는 “3인방이 대통령의 눈과 귀를 잡고 있으면 이 정권의 앞날이 암담하다”고 걱정했다.
환상 속의 대통령, 무력감 커지는 국민‘정홍원 유임’에서 결국 다시 도드라진 근본 문제는 박 대통령이 국민을 이해시키며 나아가지 않는 상황이 끝나지 않는 장마처럼 지루하게 되풀이된다는 점이다. ‘정 총리가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더니, 유임된다고? 그 이유가 국정 공백 최소화? 그게 말이 돼?’ 따위와 같은 의문과 불만의 패턴이 국민 사이에서 반복되고 있다.
한국심리운동연구소장인 김윤태 우석대 교수는 “박 대통령이 ‘나는 잘못하고 있지 않다. 지금 약간의 위기가 있지만, 이게 지나면 국민들이 나를 믿고 따라올 것이다’라는 판타지 속에 있으며, 실제(현실)도 그러할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국민이 무엇을 요구해도 상대가 변하지 않는다는 게 반복되면 무력감이 커지게 된다”고 말했다. 이 기사의 앞부분에 등장했던 개그맨은 그런 무력감이 가진 위험성을 달리 표현했다. “코미디의 효능 중에 정치 풍자가 있다. 예전엔 정치 풍자를 하면 코미디에 격식이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요즘엔 정치 풍자를 사람들이 좋아할까란 생각마저 든다. (대상인 권력이) 풍자할 만한 격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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