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하다는 기색이 얼굴에 가득했다.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는 서류가방에서 자신이 예전에 쓴 칼럼이 적힌 종이를 꺼냈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100주년을 맞아 안 의사의 유적지를 둘러보고 쓴 2009년 칼럼 ‘코레아 우라’(러시아어·‘한국 만세’란 뜻)를 읽어 내려갔다. 그는 “그(안중근)를 잊고 살았던 내가 부끄러웠다…”는 내용이 담긴 칼럼을 읽었다. “안중근 의사, 안창호 선생을 존경한다. 내가 왜 친일이냐”고 취재진에 따져묻기 위해서였다. 서울 남산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 헌화한 사실도 언급한 뒤, ‘이 꽃은 문창극님께서 헌화해주셨습니다’란 글귀가 적힌 사진을 증거로 내밀었다. 그 글귀를 기자 한 명에게 읽게 만든 뒤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크게 하세요”라고 호통도 쳤다. 박근혜 대통령이 아시아 순방을 끝내고 귀국하기 이틀 전(6월19일)의 일이다.
“크게 하세요” 호통도안 의사가 외친 ‘코레아 우라’란 칼럼 제목에 기대어 자신을 둘러싼 극우 역사관을 헤쳐가려 했지만, 심각하게 악화된 여론을 되돌리기엔 버거운 시점이었다. ‘이조 500년을 허송세월로 보낸 민족이다. 이 나라를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것은 하나님의 뜻’ ‘남북 분단이나 한국전쟁도 미국을 우리 곁에 붙잡아두고, 공산화를 막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뜻’이란 그의 교회 강연과, ‘일본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게 일본이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취지로 말한 강의 내용 때문에 번진 불을 끄기엔 ‘안중근 칼럼’은 작은 소화기에 불과했다.
그는 왜 여당도 사퇴 압박을 하는 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6월21일까지 ‘버티기’에 나섰을까? 사실 그가 버티기 민망할 만한 ‘신호’는 곳곳에서 감지됐다. 박 대통령은 국회에 보내는 문 후보자의 임명동의안과 인사청문 요청서에 대한 대통령 재가 결재를 순방 중에 하는 듯하다가 보류했다. 정치권에선 ‘총리를 지명한 대통령이 실패를 인정하고 지명 철회를 스스로 할 수는 없고, 문 후보자가 알아서 사퇴해 대통령 부담을 덜어주라’는 신호로 해석하는 분위기였다.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은 “다수 국민이 아니라면 아닌 것이고, 고집(문 후보자 임명)을 부릴 일이 아니다”라며 대통령의 결단을 촉구하기도 했다. ‘박근혜계’(친박) 핵심인 서청원 새누리당 의원도 “국민이 문창극 후보자를 총리로 원하지 않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며 문 후보자 엄호를 공개적으로 포기했다. 새누리당의 수도권 재선 의원은 “문 후보자 논란 때문에 정권 전체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고 우려했다. 총리 인사청문위원장인 박지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새누리당 여의도연구소에서 여론조사를 돌려봤더니 72% 정도가 ‘문 후보자 임명은 안 된다’는 결과가 나왔다더라. 새누리당도 이런 민심을 거스를 수 없었던 것이다. 여권 고위층이 (우리한테) 며칠만 참아달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여권도 청와대가 결국 ‘문창극 사퇴’로 정리하지 않겠느냐고 본 것이다.
그럼에도 문 후보자가 총리 집무실 ‘9 to 6 업무’(아침 9시 출근~저녁 6시 퇴근)를 강행하며 청문회를 준비한 이유를 몇 가지로 짐작할 수 있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정치외교학)는 “문 후보자는 역대 총리 후보자 중 자신을 지명한 대통령이 재가를 하지 않는 새로운 ‘총리 낙마 유형’을 만들 위기에 처한 상황이었다. 실추된 자신의 명예를 조금이라도 보상받고 싶었을 것이다. 끝까지 버티고 인사청문회를 거쳐 본회의 표결까지 가면 7·30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총리 임명 부결에 부담을 느낀) 여권이 결국엔 단결해 자신을 도와주지 않을까란 실낱같은 희망도 갖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실제 문 후보자는 언론이 교회 강연 내용의 일부를 가지고 자신의 역사관을 문제 삼고 있다며 언론에 불쾌감을 내비치기도 했다. 하지만 여론은 그의 역사관뿐 아니라 무상급식이 사회주의 발상이라고 쓴 칼럼에서 드러난 반복지 성장주의, 철거민이 숨진 용산 참사의 과잉 진압을 정당한 법치라고 옹호한 인식, 무고한 양민이 죽은 제주 4·3 사건을 폭동으로 규정한 극우적 사고들이 국민통합형 총리로서 부적합하다는 의견이 거셌다.
정국이 ‘문창극 블랙홀’에 빠져드는 동안 박근혜 정부 2기 내각이 ‘누더기 인사’라는 평가도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야권은 우선 이병기 국가정보원장 후보자가 또 다른 ‘뇌관 인사’라는 점에 주목했다. 이 후보자는 1997년 안전기획부 2차장(해외담당) 시절에 해외동포에게 돈을 주고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대선 후보가 북한의 공작금을 받았다는 거짓 기자회견을 열게 한 ‘북풍 공작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은 전력이 있다. 그는 또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의 정치특보를 맡은 2002년 대선 당시 이른바 ‘차떼기’로 불리는 불법 대선자금 가운데 5억원을 이인제 당시 후보에게 전달하는 배달책을 맡았다. 이회창 후보를 도와달라는 성격의 자금이었다.
“버티기는 이병기 보호하기 위해서?”김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문창극 버티기’가 언론의 관심을 문 후보자에게 묶어두고, 이병기 후보자를 보호하려는 목적이 아닌가란 생각이 들 정도”라고 지적했다.
“이 후보자는 정치적으로 예민한 대선 시기에 공작(1997년)과 차떼기(2002년)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이 후보자는 대선 개입(원세훈),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 무단 공개, 간첩단 증거조작 의혹 사건(남재준)을 일으킨 전임 국정원장의 뒤를 이어 국정원 개혁의 책임을 안고 임명된 사람이다. 북풍 공작과 불법자금 배달에 관련된 전력으로도 이 후보자는 국정원 개혁의 적임자가 아니다. 그의 전력으로 볼 때, 박 대통령이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을 염두에 두고 이 후보자를 지명한 게 아닌가 의심마저 든다.”
교수 출신인 김명수 교육부 장관 후보자와 송광용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은 제자 논문을 자신의 연구성과로 부풀려 내세운 사실이 공개됐다. 정종섭 안전행정부 장관 후보자는 “노동운동·시민운동의 행태들이 법치주의를 붕괴시킨 원인”이라거나 “4·3은 공산세력의 무장봉기”라는 과거 발언이 문제가 된데다, 학술지에 자신의 논문을 중복 게재해 실적을 키웠다는 의혹에 휩싸였다. 정성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기자 시절이던 1996년 음주운전 단속에 걸리자 ‘기자 신분’임을 내세워 단속을 거부하는 듯한 당시 동영상이 재조명돼 논란을 불렀다. 또 “종북·파괴주의자들의 준동을 보면서 국민의 선택이 박근혜가 아니었다면? 문재인이었다면? 모골이 송연해진다”고 2013년 9월에 쓴 그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글이 공개되면서 새로운 논란을 지폈다.
처음으로 부정 평가 긍정 평가보다 높아야권은 대통령이 적어도 3명은 지명을 철회하라고 못박았다.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는 “2기 내각 인사는 총체적으로 낡은 인사, 특히 국무총리 후보자, 정치공작에 연루된 국정원장 후보자, 논문을 표절하고 연구비를 부당 수령한 교육부총리 후보자, 이 세 사람은 절대 안 된다”고 말했다. 안 대표는 이들을 지명한 박 대통령의 “20세기 낡은 사고”와, 이들을 거부한 국민의 “21세기 눈높이”가 충돌하고 있다고 비유했다.
문창극 후보자를 비롯한 2기 내각 인사가 부실 인사란 평가가 나오면서, 박 대통령을 향한 여론도 차가워지고 있다. 한국갤럽이 6월17~19일 전국 성인 남녀 1002명을 대상으로 한 전화 여론조사 결과(신뢰수준 95%±3.1%)를 보면, 박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도에 대한 부정평가(48%)가 긍정평가(43%)보다 높았다. 갤럽 조사에서 박 대통령 국정수행 부정 평가가 긍정 평가를 웃돈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새누리당 내부에서도 “인사 실패로 정권의 타격이 너무 크다”는 걱정이 움트고 있다. 이름을 밝히지 말 것을 요구한 새누리당의 한 재선 의원은 “대통령이 친소관계에 의존해 인사를 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자신의 수첩인사에 갇힌 대통령이 사회 통합보다는 자신을 이념적으로 흔들림 없이 보좌할 보수 인물에 치중하다보니 철저한 검증에 소홀해, ‘청와대 발표→도덕적 문제 발견→사회적 논란’의 혼돈을 계속 치르고 있다는 지적도 많다.
이준한 교수는 “이번 인사는 사회 전반을 혁신하겠다는 대통령의 얘기와도 맞지 않는 오판 인사다. 개조를 하겠다더니 논문 표절 등 개조의 대상이 될 사람들을 내세웠다. 대통령의 언행 불일치다. 지방선거 결과가 여권의 패배라고 할 정도가 아니라고 자만한 것 같다. 안대희 총리 후보자 사퇴, 문창극 후보자 논란 등 일련의 상황에 대해 대통령의 진솔한 사과가 필요하다”고 했다.
여야 모두 이번엔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이 책임론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으로 보는 분위기다. 김성태 새누리당 의원은 “김기춘 실장이 청와대 인사위원장이니까 이번 인사 논란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했다. 박지원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이 김기춘 실장의 거취를 놓고 가장 고심할 것이다. 하지만 김기춘 실장도 민심 악화를 거스를 수 없을 것이다. 김 실장이 총리 지명 문제를 모두 마무리하고 물러날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참여정부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한 인사는 “통치를 하려는 박근혜 대통령의 인식 전환, 김기춘 실장의 사퇴”를 전제로, 인사 시스템의 변화도 주문했다. 그는 “인사수석실에서 인사를 1차 추천하고 민정수석실에서 2차 검증했던 참여정부의 분담과 중복 검증 시스템을 다시 검토할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 인사수석실은 이명박 정부 때 없어졌다.
‘유턴’을 못하는 대통령‘문창극 버티기’보다 심한 ‘박근혜 대통령의 버티기’가 정국을 꼬이게 만드는 원인이라는 여권 내부의 지적도 새겨들을 만한 대목이다. 이번에도 문 후보자를 향한 민심이 악화된 속도에 비하면 청와대의 대응과 뒤처리가 너무 늦었다는 얘기다.
왜일까? 친박 핵심 인사의 설명이다. “박 대통령은 자기 중심이 확고하고, 옳은 길을 가고 있다고 여긴다. 그 길을 가면 결국 국민이 알아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박 대통령이 잘못된 길로 들어서도 ‘유턴’을 쉽게 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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