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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22일 오전 11시께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 서관 417호 형사 대법정. 10명 남짓한 사람들이 이미 와서 기다렸다. 절반은 기자인 것 같았고, 나머지는 (이하 ) 팬들처럼 보였다. 배심원 선정이 3시간 만에 끝나자 법정 문이 열렸다.
배심원의 진지함과 중립적인 태도검사와 변호사가 배심원 후보들 중 편파적인 태도나 부적절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가려내는 게 배심원 선정 절차다. 평결하는 주체들을 선정하는 것이기에 매우 중요한 일이다. 나중에 전해들은 이야기지만, 검사 쪽은 를 아는 후보들을 모두 배제했다고 한다. 그렇게 총 11명의 배심원들이 선정됐다.
판사는 미리 준비한 슬라이드를 보여주며 공판 진행 순서를 친절히 설명했다. 범죄 증명의 정도와 관련해 ‘합리적 의심’(Reasonable Doubt)이라는 용어가 나왔다. 영어를 번역해 용어가 어색하지만 ‘유죄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피고인이 유죄라는 사실에 대해 합리적 의심이 들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이라고 판사가 말했다.
드디어 ‘ 국민참여재판’의 전쟁의 막이 올랐다. ‘친절한’ 판사님과 6명이라는 수로 힘을 단단히 준 변호인단, 그리고 이례적으로 수사검사까지 참석했다. 검사 쪽이 참석한 모두진술이 첫 번째 절차였다. 검사는 정성껏 준비한 슬라이드로 공소장과 사건의 쟁점, 입증 방법 등에 대해 배심원단을 바라보며 말했다. 검사라는 국가기관 사람이 일반 국민에게 이렇게까지 친절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국민참여재판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닐까.
다음으로 증거 조사 절차가 이어졌다. 검사가 먼저 진행한다. 피고인의 범죄 사실에 대한 입증책임을 지녔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진술을 하기 전에 검사는 새로운 증거를 추가 신청했다. 판사가 변호인 쪽에 이 증거의 동의 여부를 물었다. 상대방이 동의해야 새로운 증거를 배심원에게 공개할 수 있어서다. 검사와 변호인 사이에서 날카로운 공방이 펼쳐졌다. 방청석에서도 그들 간의 긴장감이 확실하게 와닿았다.
양쪽의 의견이 조율되자 검사 쪽은 방송 일부분을 법정에서 재생했다. 김어준 피고인의 유명한 욕설인 ‘씨×’ 등의 발언과 낄낄대는 웃음이 흘러나오자 방청석에서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배심원들과 판사의 반응을 살펴봤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오히려 냉랭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그들은 30여분의 재생 시간 동안 별다른 감정 표출을 보이지 않았다. 배심원의 진지함과 중립적인 태도를 느낄 수 있었다.
계속된 검사의 서증(서류 형식의 증거) 조사 절차는 지루했다. 조는 배심원도 몇몇 발견했다. 판사도 지루했는지 시계를 자주 봤다. 어떤 것을 설명할 때 내용도 중요하지만 전달하는 방식도 매우 중요하다. 배심원을 상대로 설명할 준비가 검사 쪽은 변호인 쪽에 비해 부족했다. 배심원도 인간이므로 동정 같은 감정에 휩쓸릴 위험이 있다. 배심재판에서 검사는 감정이 평결에 개입하는 걸 되도록 차단하는 역할을 맡는다. 범죄 사실의 입증을 명확하게, 효과적으로 함으로써 말이다. 변호인 쪽에서 화려한 시각 도구를 사용해 배심원의 감성 재판을 부추겼다는 주장은 결국 검사 쪽이 제대로 임무를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사한 증거 평가하며 객관적 시선 형성증거조사 절차는 첫날에 마무리되지 못해 이튿날까지 계속됐다. 다음날 검사와 변호인 쪽은 다시 증거 동의 절차와 관련해 치열하다 못해 신경질적이고 감정적이기까지 한 공방을 벌였다. 이 광경을 지켜보는 배심원은 이성적인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압박감이 컸을 것이다. 실제 국민참여재판을 방청하면 피고인이 재판정에 들어서는 순간 배심원이 모두 숨죽이는 게 느껴진다. 그렇다, 지금 상황은 영화 속 사건이 아니다. 실제 피고인이 앞에 앉아 있다. 평소 말을 나눌 기회가 없는 검사와 변호사가 번갈아 친절하게 사건을 설명해준다. 합리적 판단을 해야 한다는 요구가 점점 커진다.
검사 쪽은 총 6명의 증인을 신청했다. 그러나 피고인 쪽은 1명, 그것도 주진우 피고인의 동료 기자밖에 신청하지 않았다. 정치적 사건은 신청한 증인 수만 놓고 보면 확실히 검사 쪽에 유리해 보였다. 검사 쪽의 증인 중에는 경찰관이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5촌 조카 살인사건을 수사한 경찰관은 단호한 목소리로 당시 수사 상황에서 어떤 의심점도 찾아볼 수 없다고 증언했다. 이로써 승기가 검사 쪽으로 기울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변호인이 반대신문을 하며 수사의 여러 허점을 드러냈다. 범행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 칼의 지문 의뢰를 하지 않은 점, 두 변사자들의 마지막 출입 장소인 주점의 폐쇄회로텔레비전(CCTV)을 확인하지 않은 점 등을 공격했다. 증언의 신빙성이 떨어졌다. 경찰관이 증언할 때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이미 결정을 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던 배심원단이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증언의 신빙성을 판단할 때 심리학이 개입할 여지가 크다.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하는 데는 신문의 주체와 증인의 태도 등이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모든 증거절차와 양쪽의 최후변론이 끝났다. 마지막 순서로 피고인들이 최후진술을 했다. 감성에 호소하는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최후진술 뒤에 바로 유무죄를 평결하는 것이 아니다. 배심원은 이틀 동안 조사한 증거를 평가하는 평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나는 ‘그림자 배심원’으로 평의 절차에 다섯 차례 참가했다. 그림자 배심원은 평결을 내리는 것만 제외하고는 실제 배심원과 같은 임무를 수행한다. 평의가 시작되면 먼저 모든 배심원이 유무죄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다. 반드시 이유를 얘기한다. ‘그냥, 불쌍해서, 미워서’라고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증거를 언급하며 이성적인 판단을 내렸음을 강조한다. 개개인이 재판에서 감정적 평가를 했더라도 배심원은 조사한 증거를 다시 평가한다. 그렇게 평의 과정을 거치며 객관적 시각이 형성된다.
국민참여재판은 ‘국민에 의한 판단’국민참여재판은 ‘국민에 의한 판단’이다. 판사와 달리 기계적인 법 적용이나 선행 판례, 심급에 따른 기속력에 얽매이지 않는다. 자유롭고 건전한 상식을 가진 국민이라서 책상 앞에서 시간을 더 많이 보낸 판사보다 어쩌면 더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이윤정 한림대 법심리학 연구소 연구원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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