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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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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한국 보수의 ‘주술인형’

정치적 수세 국면마다 망자 불러내 찌르고 또 찌르고… 새누리당·보수세력의 ‘부두교 정치’를 해부한다
등록 2013-10-15 17:41 수정 2020-05-03 04:27
문재인 민주당 의원이 4일 저녁 서울 세종로 세종홀에서 열린 10 4 남북정상공동선언 6돌 기념식에서 참석자들의 축사를 들으며 생각에 잠겨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문재인 민주당 의원이 4일 저녁 서울 세종로 세종홀에서 열린 10 4 남북정상공동선언 6돌 기념식에서 참석자들의 축사를 들으며 생각에 잠겨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민주당이 6·13 지방선거 참패 이후 ‘탈DJ’ 문제와 노무현 대통령 후보에 대한 재신임 문제를 둘러싼 당내 갈등으로 ‘친노’ ‘중립’ ‘반노’ 진영으로 삼분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2002년 6월17일치 )

‘친노’라는 표현이 언론에 등장한 것은 2002년 6월부터다. 지지율이 곤두박질친 노무현 후보를 정몽준 후보로 교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다. 민주당 내 분열상을 드러내는 용어였던 셈이다. 이후 그에게는 늘 ‘친노’ ‘반노’라는 대립적 단어가 따라붙었다. ‘반노’는 말 자체로 그에 대한 부정어지만, ‘친노’라는 말에도 부정적 이미지가 계속 덧씌워졌다. ‘친노 세력은 배타적’이라는 평가와 별개로, 새누리당과 보수 세력은 노무현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심을 드러내는 데 ‘친노’라는 말을 활용해왔다.

노무현이 당한 4번의 정치적 치도곤

1년 넘게 지속되는 새누리당의 2007년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 ‘우려먹기’는 ‘노무현 증오 정치’를 애국심으로 포장한 안보상업주의와 결합시켜 정국의 주요 고비마다 활용하는 행태와 다를 바 없다. 하지도 않은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을 문제 삼아 망자를 현실 정치에 불러내 폄훼하고 욕보이고 있다. 대화록 사건을 수사 중인 검찰에 10월10일 소환된 김정호 전 기록관리비서관은 “더 이상 노무현 전 대통령을 부관참시하지 말라”고 말했다. 유시민 전 장관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새누리당은 깊이 병들어 있고, 그 병은 의심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들은 예나 지금이나 노무현 대통령이 대한민국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더 좋아한 게 아닌가 의심한다. 자기네만 애국자라고 생각한다. 다른 의견, 다른 비전을 가진 사람은 ‘친북’ ‘종북’ ‘용공’이라고 의심한다. 그들은 노무현 대통령을 ‘이념적으로 살해’하려고 한다”고 썼다.

보수 세력의 ‘노무현 증오 정치’는 뿌리가 깊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은 노 전 대통령이 네 차례의 ‘정치적 치도곤’을 당했다고 표현한다. 처음부터 인정하기 싫었던 대통령을 다수의 힘으로 밀어냈고(탄핵), 정권 교체 뒤에는 검찰 수사로 전직 대통령에 대한 확인되지 않은 혐의를 유포하면서 조롱하고 야유했으며, 지난해 대선 때는 급기야 NLL을 이슈로 삼아 망자인 그를 아예 친북 인사로 규정하더니, 대선이 끝난 뒤에도 ‘대화록 장사’를 위해 그를 정쟁의 마당으로 끌어냈다는 것이다.

여권의 ‘노무현 증오 정치’는 일상적이기도 하다. 국가정보원 심리전단 사이버팀은 인터넷 게시물·댓글에서 ‘놈현이’를 들먹였다. 2009년 5월 그의 서거 이후 무리한 검찰 수사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자, 국정원은 “놈현이가 저 세상에 와서 보니 아주 큰 죄가 많았군요~ 살아 있을 때 잘하지~ 왜 거기 가서 후회하나~ ” 따위의 댓글을 다는 ‘업무’를 수행했다. 지난해 5월 이한구 당시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막장 트윗’도 대표적 사례다. 그는 “이러니 노무현 ×××지. 잘 ××다”는 욕설을 포함한 글을 리트윗했다. 문재인 민주당 의원은 “이한구 원내대표 개인적으론 인품 문제이고, 집단적으론 새누리당의 적개심, 증오감의 표출”이라며 “그 적개심과 증오감이 노무현을 부정하고, 무시하고, 탄핵하고, 퇴임 후까지도 표적수사로 끝내 죽음으로 몰았다”고 비판했다.

보수 세력은 노 전 대통령을 왜 이렇게 미워하는 걸까. 이철희 소장은 “우리 사회의 기득권 세력이 가장 미워할 만한 스펙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은 보수 세력의 가장 약한 고리를 건드렸다. PK(부산·경남) 출신인 그는 3당 합당으로 형성된 영남 블록 일부를 허물었다. 세대로 보면 20대와 30대의 지지를 받았다. 진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뚜렷한 개혁 성향을 보였다. 개혁적 보수가 아닌 수구 세력이 상대하기는 버거운 상대였다.”

그의 사후까지 증오심이 지속되는 건 ‘경계심’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노 전 대통령을 통해 이뤄졌던 민주개혁 진영의 결집과 회생의 경험이 되풀이될까봐 우려한다는 것이다. 윤희웅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조사분석실장은 “‘친노’라는 단어의 이미지와 야권의 흥망이 일치해왔다”고 말한다. ‘친노’라는 단어가 대중에게 긍정적으로 여겨지느냐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느냐에 따라 야권의 흥망이 갈렸다는 얘기다. 2002년 ‘친노’는 ‘반노’의 노무현 흔들기를 극복하고 극적인 대선 승리를 거머쥐었다. ‘친노’와 ‘반노’의 싸움으로 날을 새우던 열린우리당은 선거마다 죽을 쒔고, 2007년 대선에서 보수 세력에 정권을 내줬다. 이후 지리멸렬했던 야권은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 분노와 추모의 열기가 폭발한 2010년 지방선거에서 회생한다. 스스로 ‘폐족’이라 칭했던 친노 세력이 화려하게 부활한 것도 이때다.

야권 분열 노린 타깃 공격?

‘노무현 증오 정치’에 민주당 내부, 야권을 분열시키려는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다는 얘기는 그래서 나온다. 윤희웅 실장은 “민주·진보 진영의 분리 효과, 쪼개기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야권이 대화록 문제에 대해 일치단결해서 방어하고 있지 못하다. 조경태 의원 등 민주당 내에서도 ‘친노’의 책임론이 계속 제기된다. 야권의 문제제기는 분산되고, 그만큼 새누리당의 공세는 수월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지원 민주당 의원도 “(대화록 파문이) 민주당에 아킬레스건으로 목을 조여온다. 야권 분열로 이끌어가려는 것이다. 민주당을 자꾸 ‘친노’와 ‘반노’로 가르려고 하는 이 프레임에 우리가 갇히면 죽는다”고 말했다.

친노 세력의 ‘잠재성’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친노 세력은 2010년 지방선거에서 부활한 뒤 당권파로 득세해 2012년 총선에서 민주당 내 주류를 차지했고, 민주당 대선 후보로 문재인 의원을 내세우는 데 성공했다. 총선·대선을 거치며 친노 직계와 정세균계 등으로 분화하고, 선거 패배 책임론으로 당권을 잃긴 했지만, 친노 세력은 당내에서 상당한 규모와 결집력을 지닌 계파로 자리잡고 있다. 문재인 의원뿐 아니라 안희정 충남도지사 등 차기 주자군도 보유하고 있다. 친노 그룹에 속한 한 초선 의원은 “이명박 대통령이 퇴임한 뒤 새누리당 내 ‘친이’ 세력은 힘을 잃고 뿔뿔이 흩어졌다. 박근혜 대통령이 퇴임할 때 김기춘 비서실장 등 측근들도 뒤안으로 물러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친노 세력은 노 전 대통령 퇴임 이후 더 세력화했다. 새누리당은 친노 세력의 확장을 막기 위해 끊임없이 노 전 대통령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왕좌왕·뒷북대응… 친노 무기력도 한몫

그러나 ‘노무현 증오 정치’를 활용하는 새누리당의 오랜 공세에 민주당도, 친노 세력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문재인 의원이 국가기록원에 보관 중인 대화록 정본 공개라는 패착을 두고, 당 지도부가 이를 강제 당론으로 밀어붙인 결과 엉뚱하게 ‘사초 실종’ 문제가 불거졌을 뿐 아니라, 대화록의 작성과 이관 과정 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중구난방 대처를 해왔다. 심상정 정의당 원내대표는 “참여정부 출신 인사들이 막연한 믿음에 근거해서 해명을 계속 내놓는 것이 오히려 불필요한 정치 공방을 더욱 부추기는 경향이 있다. 사실관계에 입각한 진실이 밝혀지도록 검찰 수사에 대해 철저히 대비하고, 정쟁에 일일이 대응하지 말아야 한다”(10월7일 당 상무위원회)고 공개 비판하기도 했다. 분열로 비칠 것을 우려해 자제하는 분위기지만, 민주당 내에도 친노 세력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 수도권 지역의 한 초선 의원은 “대부분의 의원들은 대화록 작성과 이관 과정에 대해 알지 못한다. 친노 쪽이 제대로 설명을 해야 하는데, 설명은 제대로 안 하고 무조건 아니라고만 하는 대응으로 사태를 키웠다. 친노 쪽의 피해의식도 이해는 가지만 사실관계는 명확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절대 그럴 리 없다’는 신념적 논리로 방어하면서 자충수를 둔 측면이 크다는 얘기다.

새누리당 최경환 원내대표와 홍문종 사무총장이 11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새누리당 최경환 원내대표와 홍문종 사무총장이 11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검찰의 ‘기습 브리핑’이 지난 10월2일 이뤄진 점을 고려하면, 10월9일 김경수 봉하사업부 본부장의 기자회견, 10월10일 문재인 의원의 “나를 소환하라”는 성명 발표 등 친노 세력의 ‘정리된 입장’이 너무 늦은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한 친노 인사는 “대응이 미숙하다는 지적은 달게 받겠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이 계속 발생하고 있지 않나. 노 전 대통령이 살아 계셨다면 명쾌하게 정리될 수 있는 부분도 말을 할 수가 없으니 정치적으로 공박하는 수밖에 없는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문 의원은 성명에서 “검찰의 최근 대화록 수사는, 전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간 2009년 ‘정치검찰’의 행태를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다. 짜맞추기 수사의 들러리로 죄 없는 실무자를 소환해 괴롭히지 말고, 나를 소환하라”고 말했다. 대화록 사태를 ‘소환 자진 요청’이라는 정면 돌파로 종결시키고, 당 안팎에서 제기되는 ‘문재인 책임론’을 회피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의 소환 여부와 관계없이 검찰 수사 결과는 지금까지와 다른 정치적 후폭풍을 가져올 공산이 크다.

노무현을 극복해야 친노가 산다

‘친노’라는 단어의 정치적 사용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새누리당의 ‘노무현 증오 정치’ 때문만은 아니다. 야권도 2010년 지방선거, 2012년 대선 등에서 ‘친노 프레임’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활용해왔다. 당내 선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윤희웅 실장은 “야권은 노 전 대통령으로 인해 회생했지만 그것에 의존함으로써 스스로의 역량을 확대하고 지지층을 넓히는 일을 소홀히 했다. 민주당과 친노 세력 내부에서 노무현을 극복하는 분화와 경쟁이 이뤄져야 정치적 타깃으로서의 ‘친노’가 약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맹목성을 수반하는 증오 정치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은 새로운 대안뿐이라는 얘기다. 그 사람이 ‘친노’이든 ‘반노’이든.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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