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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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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사님’이 투자하라니 회삿돈 빼 450억원 마련해서는…

2008년 ‘위기는 기회’ 투자 독려한 김원홍씨에게 나흘 만에 자금 마련해 선지급…
재판부, SK그룹 최태원·최재원 형제 속은 것과는 무관하게 ‘횡령’ 판단
등록 2013-10-01 13:34 수정 2020-05-03 04:27

찬바람이 분다. 구치소 안은 더 추워질 게다. ‘회장님’들은 구치소가 싫다. 거기만 가면 없던 병도 생긴다. 하물며 추운 겨울엔 말할 것도 없다. 재벌 총수 두 사람의 운명이 하루 사이에 갈렸다. 누구는 구치소에서, 누구는 구치소 밖에서 겨울을 맞을지 모른다.

녹취록 ‘반전 카드’도 효과 없어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일그러졌다. 동생인 최재원 부회장은 무너지듯 허리를 아래로 꺾었다. 혹시나 하며 기대했던 ‘무죄’는 언감생심. 최태원 회장은 1심과 똑같은 징역 4년, 1심에서 무죄였던 최재원 부회장은 징역 3년6개월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재판이 끝나자 형제는 나란히 구치소로 향했다.

지난 4월 구급차에 실려 법원에 출두하고 있는 김승연 한 화그룹 회장(맨 왼쪽), 지난 9월27일 서울 서초동 서울고법 의 항소심 선고공판에 들어가고 있는 최재원 SK그룹 부회 장(가운데), 지난 1월 1심 선고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서울 중앙지법으로 들어가는 최태원 SK그룹 회장(맨 오른쪽).

지난 4월 구급차에 실려 법원에 출두하고 있는 김승연 한 화그룹 회장(맨 왼쪽), 지난 9월27일 서울 서초동 서울고법 의 항소심 선고공판에 들어가고 있는 최재원 SK그룹 부회 장(가운데), 지난 1월 1심 선고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서울 중앙지법으로 들어가는 최태원 SK그룹 회장(맨 오른쪽).

지난 9월27일 서울고법 형사4부(재판장 문용선)는 회삿돈 수백억원을 횡령한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의 횡령)로 기소된 최태원 회장과 최재원 부회장에게 징역형을 선고했다. 두 사람이 계열사에 지시해 1500억원대의 회삿돈을 창업투자회사인 베넥스인베스트먼트(베넥스) 펀드에 출자하도록 하고, 이 가운데 465억원을 횡령해 선물투자에 사용했다는 등의 주요 혐의를 재판부는 대부분 인정했다. 최 회장 형제는 선물투자자인 김원홍 전 SK해운 고문과 김준홍 전 베넥스 대표에게 “속아서 한 일”이라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가 판단한 이 사건의 진실은 이렇다. 2008년 김원홍씨는 최재원 부회장에게 “리먼 사태 등 경제위기가 오히려 투자 타이밍”이라며 투자를 권유했다. 1998년부터 최 회장 형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김원홍씨는 투자금 명목으로 수천억원을 가져다쓰고 갚지 않았을 정도로 ‘기이한’ 신뢰를 받아온 인물이다. 무속인 출신이라 SK 안에서는 ‘도사님’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김씨의 투자 요청에 최 회장 형제는 급하게 돈 마련에 나선다. 계열사인 SK텔레콤과 SK E&S가 선지급 방식으로 베넥스에 출자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불과 나흘 만에 투자금이 선지급됐다. 이렇게 들어온 돈 450억원을, 김준홍 전 대표는 김원홍씨에게 송금했다. 당시 보험대리점을 운영하고 있던 김원홍씨는 이 돈을 개인 보험료, 생활비 등에 쓴 것으로 알려졌다. 김준홍 전 대표는 워커힐에 근무하면서 알게 된 김원홍씨의 ‘심부름꾼’처럼 자금 관리에 깊이 관여해왔다. 재판부는 최 회장 형제가 ‘속은’ 것과는 무관하게, 회삿돈을 빼썼다는 것만으로도 ‘횡령’ 혐의는 충분히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최태원 회장 쪽이 내민 마지막 ‘반전 카드’도 소용이 없었다. 그동안 사건의 핵심 인물로 꼽혔던 김원홍씨는 선고를 하루 앞둔 지난 9월26일 밤 전격적으로 대만에서 국내로 송환됐다. 김씨는 검찰 수사 전인 2011년 중국을 거쳐 대만으로 도피해 있었다. 대만 경찰이 지난 7월 이민법 위반 혐의로 김씨를 체포했지만, 국내 송환은 이뤄지지 않았었다. 최 회장의 변호인들은 ‘무죄’를 증명할 증거로, 항소심 재판에 김원홍씨의 전화 통화 녹취록을 제출했다. 김원홍씨는 최태원 회장, 최재원 부회장, 김준홍 전 대표와 각각 전화 통화를 하면서 “자기(김준홍)가 살려면 둘(최 회장 형제)을 물고 늘어질 수밖에 없는 거지” “두 형제는 송금을 몰랐고 너(김준홍)랑 나랑 한 거잖아”라는 등의 말을 했다. 최 회장 형제 ‘몰래’ 김준홍 전 대표가 SK 임원들과 펀드를 만들었다는 변호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내용이었다.

재판장 “최 회장 형제가 법원을 농락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녹취록 대화는 논리적으로 모순되고, 김원홍씨의 인간됨을 볼 때 전혀 믿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최 회장 쪽 변호인들은 “김원홍씨를 증인신문해야 한다”며 변론 재개를 요청했지만, 재판부는 판결 선고를 강행했다. 되레 ‘괘씸죄’까지 더해졌다. 문용선 재판장은 “최 회장 형제가 법원을 농락했다”고까지 표현했다. 최재원 부회장은 1심에서 “형은 몰랐고 내가 저지른 일”이라고 자백했다가, 항소심에선 “검찰 수사 전까지 전혀 몰랐던 일”이라고 말을 바꿨다. 최태원 회장도 1심에선 “몰랐던 일”이라고 했다가, 항소심 막바지엔 “김원홍씨가 권유해 펀드 투자를 지시하긴 했지만 김준홍씨가 김원홍씨에게 송금한 사실은 몰랐다”고 주장했다.

‘선장’을 둘이나 잃은 SK그룹은 충격에 빠졌다. 회사 관계자는 “억울한 재판 결과다. 김원홍씨를 증인으로 부르지도 않고 판결을 선고한 것은 매우 유감”이라고 말했다. 김원홍씨를 증인신문하지 않은 것을 ‘지렛대’ 삼아, 대법원에서 파기환송 판결을 끌어내겠다는 것이다. 지난해 말 그룹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에 김창근 부회장을 임명하고 계열사 자율경영을 강화해온 터라, 당장 그룹 운영에 큰 어려움은 없다. 하지만 해외 신규사업 추진이나 계열사 투자 등에는 차질이 생길 것으로 예상된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일단 한숨을 돌렸다. 지난 9월26일 대법원 1부(주심 고영한 대법관)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의 배임·횡령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된 김 회장의 상고심에서 “원심의 법리 오해와 사실관계 파악에 잘못이 있다”며 사건을 다시 판단하라고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김 회장은 당장 감옥에 갇히는 일만은 피했다. 대법원에서 실형 선고가 확정되면 꼼짝없이 3년을 감옥에서 생활해야 할 판이었다. 올 1월 첫 구속집행정지 결정을 받고 나서 모두 4차례나 기간을 연장해, 김 회장은 구치소가 아닌 서울대병원에 8개월째 누워 있었다.

대법원의 판단은 ‘묘하다’. 김 회장이 그룹 계열사로 하여금 개인적으로 차명 소유한 위장계열사인 웹롭과 한유통 등을 지원하도록 한 행위에 대해 대법원은 “배임의 고의가 인정된다”고 못박았다. 위장계열사에 연결자금을 제공할 그룹 계열사를 ‘합리적’으로 정한 것도 아니고, 자금 지원도 그룹 계열사 이익보다는 회장 개인의 이익에 도움이 됐다는 것이다. “그룹 구조조정 차원에서 합리적인 경영 판단을 한 것”이라는 김 회장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만 업무상 배임에 해당하는 재산상 손해액을 정하는 과정이 법리상 잘못됐으니, 다시 따져보라고 판결했다. 한화석유화학이 소유한 전남 여수시의 부동산을 위장계열사인 웹롭에 싼값에 떠넘긴 배임 행위와 관련해서도, 부동산에 대한 감정평가를 다시 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항소심에서 인정된 배임액(1797억원)이 낮아질 여지가 생겼다는 뜻이다.

김승연 회장은 서울대병원에 8개월째

파기환송심에서 집행유예형이 내려질지는 미지수다. 항소심의 징역 3년보다 형량이 높아질 가능성도, 낮아질 가능성도 다 열려 있다.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마련한 횡령·배임에 대한 양형 기준상으로는 실형 가능성이 높다. 배임액이 300억원을 넘으면 감경해도 징역 4~7년을 선고하도록 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배임액이 줄어든다고 해도 300억원 밑으로 내려가긴 어렵다. 이원곤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2부장은 대법원 판결 직후 “김승연 회장에게 유리한 파기환송이 아니다.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한 금액은 606억원밖에 안 된다. 게다가 이 부분은 형량이나 죄질과 크게 상관없다. 집행유예가 나와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사실 형량이란 건 ‘고무줄’과 같다. 특별양형인자와 집행유예 참작 사유가 종합적으로 고려되기 때문이다. 김 회장의 변호를 맡았던 한 고위 법관 출신 변호사는 “대법원이 파기환송했다는 건 내심 실형이 못마땅했다는 뜻”이라며 “건강상 이유나 피해액 변제 등 양형에 감안될 다른 요인들도 있기 때문에 (집행유예 판결을 받는 건) 해볼 만하다”고 말했다.

이르면 올겨울, 두 재벌 총수의 운명이 결정된다. 법원은 유난히 재벌에게만은 ‘따듯’했던 과거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기업 범죄 엄단이라는 ‘냉정’을 이어갈 것인가.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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